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철학적 탐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사고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길 원하지 않았다. 『철학적 탐구』는 독자들이 편리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미리 잘 꾸려진 사상들을 제공하기보다는, 독자들을 자극하여 스스로 사고하도록 의도되었다. 이런 의도는 글 쓰는 스타일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글은 파편적이고 우회적이며,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건너뛰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되돌아온다. 그는 철학적 물음들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예들이나 이야기들을 통해 암시한다. 실마리는 주어지지만 그 함축은 대개는 분명하지 않다. 풍성한 비유들이 있지만 이것들을 해석하는 일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장보다는 번호 매긴 짤막한 절을 사용한다. 책의 이러한 구성이 모두 그의 탓만은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1953년에 출간되었으며, 그가 수년 동안 작업해온 필사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철학 논고』와의 관련 relation to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비트겐슈타인의 생시에 출간된 유일한 책은 1921년에 출판된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하 『논고』)였다. 이 책은 번호를 매긴 일련의 간결한 서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논리와 인간 사고의 한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적인 스타일과 잘 결합시켰다. 이 책은 ‘말할 수 없는 곳에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최종적인 선언으로 가장 유명하다. 이것은 실천을 위한 격언이라기보다는 사고의 한계에 대한 자기 견해들의 요약이다. 인간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의 세계 바깥에 있다. 이것들은 표현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면에서 『철학적 탐구』는 『논고』에 나타난 견해들에 대한 비판이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더 최근 사상과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논고』를 『철학적 탐구』의 서론으로 출판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철학의 본성 the nature of philosophy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파리가 갇혀 있는 병에서 그 파리를 꺼내주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철학자들은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언어가 할 수 없는 일을 언어로 억지로 시도하다가 스스로 갖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어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가 ‘휴가를 떠날’ 때에(언어가 활동을 멈출 때: 옮긴이) 생겨난다”(38절). 다른 말로 하자면 철학적 문제는 말을 부적절한 맥락에서 사용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접근은 그런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기획이다. 언어의 실제적 사용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리하여 병에 갇힌 파리를 나올 수 있게 해줌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접근은 때때로 치료적 접근으로 특징지어진다. 철학은 치료를 요하는 질환이다. 철학은 ‘인간의 이해력이 언어의 한계를 향해 치닫다가 부딪혀서 얻은 혹’(119절)을 검사한다. 치료법은 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우리는 어째서 언어가 반드시 기능해야만 한다고 상상하는지를 살피기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어의 실제 사용에 대한 그의 분석은 사회 인류학에서의 작업 같은 것은 아니다. 언어가 사용되는 몇 가지 방식들을 확인시켜줌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사고와 유의미성의 한계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기획의 많은 부분이 언어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이론들을 제거하는 일을 포함한다. 언어의 특정한 사용에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러한 대규모의 이론화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신념에 있다. 이런 이론들은 우리가 탐구하는 사물의 본질이 발견될 수 있다는 틀린 가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용으로서의 의미 meaning as use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본성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공격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견해의 대표적인 예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 습득에 관한 설명, 즉 대상을 가리키고 이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언어를 습득한다는 설명을 꼽는다. 언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그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단어는 대상의 이름이며, 결합된 단어의 고유한 기능은 실재를 기술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 사과를 내보이며 ‘이것이 사과다’라고 말한다. 이런 방법을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 의한 가르침이라 부른다. 즉 그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을 가리키는 방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직시적 정의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모든 언어습득의 기초가 된다는 견해에 따르는 많은 어려움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러한 직시적 정의는 상당량의 배경설정을 요구한다. 그 아이는 대상을 가리키는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이 그 사과의 색깔이나 모양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직시적 정의는 지적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허용한다. 나아가서 설령 그 아이가 어떤 특정 사례의 직시적 정의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가 이 사례에서 이것과 유사한 다른 사례로 넘어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매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우리가 여러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종류의 용구들을 한데 모아놓은 도구상자와도 같다.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비유를 빌면 언어는 기관실의 레버들과도 같다. 단어들은 서로 모양이 닮았기에 우리는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종류의 기능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기관실의 레버들처럼 그 유사성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 레버는 밸브를 작동시키고 다른 레버는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어떤 것은 오직 두 개의 위치, 즉 ‘꺼짐’과 ‘켜짐’의 위치만을 가지지만 다른 것은 연속선상에서 작동할 수도 있다(가령 라디오의 음량조절 단추는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옮긴이).

실제 언어의 성격을 검토해본다면 우리는 금방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어들의 의미는 이것들의 사용에 의해 주어지며 이것들이 지시하는 대상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밑바닥에 있는 본질, 즉 공통분모 또는 하나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조사해보면 우리는 여러 다른 맥락에서 작용하는 중첩된 기능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어구가 의미하는 바는 언어사용이란 ‘가지고 노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다양한 규칙에 따르는 작용들이 있고 이것들 안에서 언어가 기능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삶의 형식, 즉 그 다양한 사용들을 통해 발전된 사회적 규약들 안에 붙박여 있다. 말의 의미는 우리가 그것들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게 된 방식에 의해 지배된다. 사용의 맥락인 삶의 형식에서 벗어나면 말들은 의미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카르멘 하라의 ‘움켜쥔 자아 풀어주기’

 

인간은 ‘우주’라 부르는 전체의 한 부분이며,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

는다. 인간은 일체의 다른 존재들과 분리된 것처럼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끼는데, 이는 의식이 만들어낸 일종의 시각적 환상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이 지구상의 모든 개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유한한 개별자인 동시에, 더 큰 우주적 의식의 한 부분을 지닌 영원한 영혼이다. 우리가 일체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후자에 눈뜨고 신성함과 회복의 힘을 지닌 모든 존재와의 연결고리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신적인 힘과 우리를 지켜주는 천사, 우리를 돌보는 영적 존재, 우주와 자연, 모든 인간과 생명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라도 이 개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이들은 그 부름에 답할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으면 우리는 성취감과 조화 그리고 용기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또 우리가 자아에 사로잡혀 끝없는 공포에 시달리느라 깨닫지 못했던 창의성과 기회,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오로지 물리적 자아에만 집착하고 일체감을 모른 척한다면(좋은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이는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 잔인하고 매정한 세상에서 길을 잃고 외롭게 헤맬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가 의식을 지배함으로써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옥은 당신이 신으로부터 그리고 신의 현현顯現인 만물과의 신성한 연결고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거짓된 관념에서 비롯된다. 문학작품이나 종교에서 지옥은 죄를 지은 영혼이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저주받으며 사는 곳으로 묘사된다. 물론 엄청난 상상과 비유를 동원한 해석이기는 하지만, 지옥은 실제로 존재한다. 우리가 우주라는 거대한 의식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아가 모든 행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때 지옥이 탄생하는 것이다.

자아Ego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개별자라고 느끼므로 자아가 있다.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에 침잠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자아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자아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스스로가 어떤 점이 특별한지 볼 수 있게 해주고, 유한한 존재인 자신의 안전과 생존에 공헌한다. 만약 자아가 없다면 자신을 돌볼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자아는 우리에게 핵심적인 요소다. 하지만 자아가 유일한 정체성이라면 또는 의식을 온통 지배한다면 문제가 있다. 일체감은 균형에 관한 것이어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정체성 사이의 균형도 한몫을 담당한다. 자신이 삶이라는 거대한 직물 속에 짜인 영원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자아는 우리를 끔찍한 단절 상태로 이끈다.

우리의 자아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비관적인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비이성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고유한 기억과 생각, 관념과 재능을 지닌 개체가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의 의식이 우주적 의식에 완전히 지배당하면 어떡하지? 자아는 이런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의 자아는 존재의 개별적인 면이 영원한 의식과 언제나 함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의 동반자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떨림과 사랑에 빠졌을 때의 느낌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죽는다고 해서 그런 의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종종 조언을 요청하는 당신의 사려 깊은 성향이나, 친구들이 낙담하여 기운이 필요할 때 그들의 짐을 덜어주는 당신의 유머 감각은 그대로 유지된다. 당신이 일체감을 깨닫고 자신의 의식이 집단의 의식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느낀다 해도, 당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아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비이성적이다. 당신은 자아와 더 큰 전체 간의 아름다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둘은 모두 빛을 내뿜으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런 균형을 찾으면 자아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을 잠재우고 일체감을 감싸 안기가 더 쉬워진다.

 

 

자아의 목적

자아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생존이다. 인간은 강력한 생존 본능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그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인류라는 종으로서의 발전 초기에 인간은 험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야 했다. 직관과 이성적 능력을 동원해 인간은 도구와 불 그리고 사회적 유대라는 생존 수단을 찾아냈다. 이를 통해 위험과 죽음을 더 쉽게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위험이 닥치면 살아남기 위해 재빨리 반응할 수 있는 신체 구조를 갖추어야 했다. 그 결과 인간의 뇌는 위험을 자동으로 인식하고 부교감신경을 작동해 ‘싸우거나 도망치거나fight or flight’ 둘 중 하나로 반응하도록 형성되었다. 위험하다고 느껴지는(그 위험이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황 앞에서 인간의 몸은 심장박동 수가 빨라지는 반응을 보인다. 호흡은 얕아지고 두뇌의 명령에 따라 스트레스 호르몬이 혈관으로 분비된다. 이 모든 생리학적 반응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재빨리 달아나 숨을 곳을 찾든지 아니면 싸우든지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직관이나 인식 능력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사용되도록 요구받는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빙하기를 견딘 인간의 정신력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싸우거나 도망치거나’라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정말로 절박한 상황에서는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번개처럼 움직여야 한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당신도 닥쳐올 위험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을 것이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는 일상에서 거의 사용할 일 없는 비상사태이며 일시적인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행동을 부추기려는 의도로 제작된 광고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나면, 당신의 자아는 위험을 느끼고 몸도 그에 따라 반응한다.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이 발동하여 마치 폭풍 속에 내던져지거나 야생동물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이 ‘싸우거나 도망치거나’의 증세를 연쇄적으로 일으킨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위험’은 그저 당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때가 많다. 그러니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의 사슬을 끊고 불안함에 굴복하는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의지의 힘을 작동시켜보면 어떨까? 삶에 스트레스가 얼마나 줄어들지 상상해보라.

자아는 허약한 척 자주 엄살을 피우는 경향이 있다. 그런 자아가 당신의 의식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면 마음은 공포를 정당화하고 부풀리는 생각들로 가득 찰 것이다. 고객들에게 인지 요법을 사용할 때 나는 중요한 요소를 꼭 상기시킨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조그만 신호라도 보이면 우리의 마음은 금방 안전하다는 의식을 버리고 위태로워진다는 점을 일러두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는 과거의 무서웠던 기억을 떠올리거

나 미래에 닥칠 상황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도처에 ‘위험’ 요소가 깔려 있는 듯 보인다! 그 결과 당신의 몸도 ‘싸우거나 도망치거나’의 자세를 유지하며 좀처럼 진정되지도, 안정되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찾아오는 걱정과 두려움, 분노가 당신의 건강과 행복을 서서히 좀먹는다. 게다가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 장애나 소화 장애, 만성 통증, 암 같은 병에 걸릴 수도 있다. 이런 해로운 증상들은 자신의 자아를 점검할 때만 멈출 수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은 미지에 대한 공포를 잠재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통과 관습에 매달린다.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고자 한다. 변화는 불안과 혼란을 불러오므로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고 싶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너 미쳤구나! 인생은 더 나아질 수 없어!’라는 뿌리 깊은 두려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변화가 불러올 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변화에 이끌리기도 한다.

두려움을 내려놓으면 미래를 믿을 수 있고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일체감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신비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아무런 도움 없이 버려진 외톨이가 아니며, 혼자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할 필요도 없다. 나는 정부의 허가 없이 한 발자국도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에서 자란 까닭에, 미국으로 오겠다는 꿈 자체가 내게는 표면적으로 터무니없어 보였다. 내가 살던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어릴 때 품었던 야망, 특히 언젠가는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다는 꿈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차라리 화성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게 낫지! 그런데 나는 내가 속한 곳에서 원하는 곳으로 갈 방법을 전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꿈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나를 도와 기회를 주시고 도와줄 이를 내려 보내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영적 능력 덕분에 그 꿈이 허황되지도 않고 내가 미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일을 하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직관을 개발하고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일들이 지닌 신비로운 연관성을 깨닫도록 조언한다. 연결고리를 볼 수 있는 능력에서 오는 자신감을 다른 사람들도 경험하게 하고 싶다. 나는 종종 고객들에게 “이게 보이나요?” 아니면 “이게 이해가 되나요? 여기에 동의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내 직관뿐 아니라 그들의 직관에 귀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내가 본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많은 고객들이 코웃음을 친다. 이성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내가 묘사하는 상황을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몇 년 후 다시 나를 찾아와서 “믿지 못하시겠지만 당신이 옳았어요!”라고 인정한다. 물론 내가 본 것이 항상 실현되지는 않는다. 미래는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나중에 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하겠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던 미래가 실체로 다가오면 대부분은 상당히 충격을 받는다.

대개 사람들은 앞날에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일상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중요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지금부터 내 인생은 예상대로 될 거야’라는 오랜 믿음에 빠져서 살아간다. 인간의 마음은 그러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때 대부분이 충격과 혼란에 빠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지의 세상에 대해 불편함을 덜 느끼는 방법은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영적 존재가 항상 우리를 돌본다고 믿는 것이다(그렇다, 나중에 다시 좀 더 이야기하겠지만 우리는 항상 영적 존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신성한 힘과 일체감 사이의 연결고리를 기억한다면, 당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신성한 힘은 당신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어떤 단계로 나아가야 할지 가르쳐준다.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마음을 용기와 믿음이 채우게 되고, 이제 당신은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기대하며 어렴풋이 내다볼 수 있는 능력마저 갖게 된다. 인생은 망망대해를 홀로 노를 저어 가듯이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하는 곳이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당신이 삶의 고비에 맞닥뜨릴 때마다 마치 신실한 친구처럼 신이 당신 곁에 함께할 것이다.

 

 

상실의 두려움과 마주하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상실을 겪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포기해야 할 대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친구 하나는 화재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려서 아까운 물건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잃어버리고 나니 오히려 해방된 느낌을 받는 물건도 있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물려준 가구라든지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가지고 있어야 했던 물건들에 상당히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물려준 보석함 없이도 엄마는 아직도 나와 내 삶의 한 부분에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저 지금까지 엄마한테 물려받은 물건들을 놓아주기가 두려웠던 거야. 엄마는 분명히 ‘대체 왜 그렇게 낡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니?’라고 말씀하실 텐데 말이지.”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 더 이상 필요 없거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 매여 산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삐걱거리게 하고 내리누를 뿐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믿음이나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도 포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인류는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진정으로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를 갈라놓기만 하는 종교가 진정으로 필요한가? 진정한 부를 창출한다는 환상만 부추기는 복잡한 금융 시스템과 수많은 직업들이 정말로 필요한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경제 시스템이나 분리에 열을 올리는 종교의 소멸, 현 감옥 시스템의 붕괴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를 뒤돌아보면 당시에는 터무니없이 여겨졌던 많은 변화와 상실이 사람들에게 곧 받아들여지고 자연스럽게 정착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던 이륜마차나 말의 시대는 끝났지만 우리는 이동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나라마다 개별적으로 사용하던 화폐가 대부분 폐지되었지만, 그렇다고 경제가 재앙을 맞지는 않았다. 미국에 존재했던 인종분리법은 폐지되었지만, 그 법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변화했지만, 우리는 그 속도에 어리둥절해 있느라 아직 제대로 결과를 볼 수조차 없다. 빠른 속도에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수천 년 동안 인류에게 고통을 준 문제들을 해결할 가능성을 드디어 발견하고 환호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긍정적 변화는 이제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오래된 신념과 감정 그리고 행동 양식을 버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남편과 결혼하고 미국 시민이 되면서 아무리 좋은 변화라 하더라도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상실이 뒤따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힘들어한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며 새로운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친숙한 것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자신을 열고 신성한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창의성을 허용할 때 훨씬 더 나은 사고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신은 우주를 창조했다. 우리 인간은 신과 더불어 괄목할 만한 사회와 예술, 문화를 창조했다. 그러니 특별한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개인의 노력에 신이 왜 동참하지 않겠는가?

상실의 고통이나 새로움에 대한 적응을 두려워하면 미래로 나아가기 어렵다. 신경학자들은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면 뇌에서 두려움과 관련된 부분으로 피가 몰려 낙천성과 창의성에 연관된 부분의 활동이 크게 제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려움이 우리가 꿈꾸고 상상하고 계획하는 능력을 닫아버린다. 또한 궁극적이고 혁신적이고 사랑이 충만하고 강력하고 신성한 힘이라 할 수 있는 신과 우리가 힘을 합쳐 창조해 나간다는 신성한 관념을 바로 두려움이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일체감은 두려움을 없애고 긍정과 창의성으로 우리를 연결해준다. 신이라는 존재 덕분에 사람들이 꿈을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안고 있는 문제를 혼자 해결할 필요가 없다. 해결책이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 결국은 우리에게 해결책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풍요로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도움의 손길을 확신하라.

그렇지만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도 맡은 일을 해야만 한다. 즉 꼭 쥐고 있던 자아를 느슨하게 풀어줄 필요가 있다. 자아야말로 당신을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것이면서, 아울러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며 상처를 치유해주는 신성한 연결고리를 믿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내면의 변화를 방해하고, 원하는 삶을 상상하며 세상을 향해 실천하는 길을 가로막는다.

다음 장에서는 자아의 본질을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자아를 조절함으로써 질주하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는지 살펴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사고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길 원하지 않았다. 『철학적 탐구』는 독자들이 편리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미리 잘 꾸려진 사상들을 제공하기보다는, 독자들을 자극하여 스스로 사고하도록 의도되었다. 이런 의도는 글 쓰는 스타일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글은 파편적이고 우회적이며,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건너뛰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되돌아온다. 그는 철학적 물음들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예들이나 이야기들을 통해 암시한다. 실마리는 주어지지만 그 함축은 대개는 분명하지 않다. 풍성한 비유들이 있지만 이것들을 해석하는 일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장보다는 번호 매긴 짤막한 절을 사용한다. 책의 이러한 구성이 모두 그의 탓만은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1953년에 출간되었으며, 그가 수년 동안 작업해온 필사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철학 논고』와의 관련 relation to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비트겐슈타인의 생시에 출간된 유일한 책은 1921년에 출판된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하 『논고』)였다. 이 책은 번호를 매긴 일련의 간결한 서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논리와 인간 사고의 한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적인 스타일과 잘 결합시켰다. 이 책은 ‘말할 수 없는 곳에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최종적인 선언으로 가장 유명하다. 이것은 실천을 위한 격언이라기보다는 사고의 한계에 대한 자기 견해들의 요약이다. 인간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의 세계 바깥에 있다. 이것들은 표현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면에서 『철학적 탐구』는 『논고』에 나타난 견해들에 대한 비판이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더 최근 사상과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논고』를 『철학적 탐구』의 서론으로 출판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철학의 본성 the nature of philosophy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파리가 갇혀 있는 병에서 그 파리를 꺼내주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철학자들은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언어가 할 수 없는 일을 언어로 억지로 시도하다가 스스로 갖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어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가 ‘휴가를 떠날’ 때에(언어가 활동을 멈출 때: 옮긴이) 생겨난다”(38절). 다른 말로 하자면 철학적 문제는 말을 부적절한 맥락에서 사용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접근은 그런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기획이다. 언어의 실제적 사용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리하여 병에 갇힌 파리를 나올 수 있게 해줌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접근은 때때로 치료적 접근으로 특징지어진다. 철학은 치료를 요하는 질환이다. 철학은 ‘인간의 이해력이 언어의 한계를 향해 치닫다가 부딪혀서 얻은 혹’(119절)을 검사한다. 치료법은 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우리는 어째서 언어가 반드시 기능해야만 한다고 상상하는지를 살피기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어의 실제 사용에 대한 그의 분석은 사회 인류학에서의 작업 같은 것은 아니다. 언어가 사용되는 몇 가지 방식들을 확인시켜줌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사고와 유의미성의 한계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기획의 많은 부분이 언어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이론들을 제거하는 일을 포함한다. 언어의 특정한 사용에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러한 대규모의 이론화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신념에 있다. 이런 이론들은 우리가 탐구하는 사물의 본질이 발견될 수 있다는 틀린 가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용으로서의 의미 meaning as use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본성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공격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견해의 대표적인 예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 습득에 관한 설명, 즉 대상을 가리키고 이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언어를 습득한다는 설명을 꼽는다. 언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그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단어는 대상의 이름이며, 결합된 단어의 고유한 기능은 실재를 기술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 사과를 내보이며 ‘이것이 사과다’라고 말한다. 이런 방법을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 의한 가르침이라 부른다. 즉 그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을 가리키는 방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직시적 정의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모든 언어습득의 기초가 된다는 견해에 따르는 많은 어려움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러한 직시적 정의는 상당량의 배경설정을 요구한다. 그 아이는 대상을 가리키는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이 그 사과의 색깔이나 모양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직시적 정의는 지적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허용한다. 나아가서 설령 그 아이가 어떤 특정 사례의 직시적 정의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가 이 사례에서 이것과 유사한 다른 사례로 넘어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매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우리가 여러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종류의 용구들을 한데 모아놓은 도구상자와도 같다.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비유를 빌면 언어는 기관실의 레버들과도 같다. 단어들은 서로 모양이 닮았기에 우리는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종류의 기능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기관실의 레버들처럼 그 유사성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 레버는 밸브를 작동시키고 다른 레버는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어떤 것은 오직 두 개의 위치, 즉 ‘꺼짐’과 ‘켜짐’의 위치만을 가지지만 다른 것은 연속선상에서 작동할 수도 있다(가령 라디오의 음량조절 단추는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옮긴이).

실제 언어의 성격을 검토해본다면 우리는 금방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어들의 의미는 이것들의 사용에 의해 주어지며 이것들이 지시하는 대상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밑바닥에 있는 본질, 즉 공통분모 또는 하나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조사해보면 우리는 여러 다른 맥락에서 작용하는 중첩된 기능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어구가 의미하는 바는 언어사용이란 ‘가지고 노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다양한 규칙에 따르는 작용들이 있고 이것들 안에서 언어가 기능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삶의 형식, 즉 그 다양한 사용들을 통해 발전된 사회적 규약들 안에 붙박여 있다. 말의 의미는 우리가 그것들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게 된 방식에 의해 지배된다. 사용의 맥락인 삶의 형식에서 벗어나면 말들은 의미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개글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인 다비드에 대한 책이다. 다비드는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그렸으며 예술적, 정치적으로 프랑스 화단에 많은 영향을 행사했다. 그의 영향은 부정적인 면과 아카데미에 대한 개혁과 같은 긍정적인 면을 모두 포괄한다.

다비드에게 있어서 나폴레옹이란 인생 최대의 기회이며 운명이었고 자신의 야심을 펼치는 데 완벽한 배경이었다. 때문에 프랑스 혁명과 다비드의 그림을 모르고 나폴레옹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어려우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을 모르고 다비드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

지은이는 프랑스 역사에 다비드와 나폴레옹이 끼친 영향을 똑부러지게 설명하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또한 엇갈린 다비드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 비평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떠맡긴다. 다비드는 천재화가인가, 기회주의자인가? 그 판단은 책을 다 읽은 뒤라야 가능하다.


결국 정치가와의 유착 고리가 끊어졌을 때, 즉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 나폴레옹의 사람 다비드도 그와 더불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고 다비드는 스스로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 뼈를 묻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김광우 - 197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City College of New York과 Fordham University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했다. 1980~86년까지 뉴욕 교회에서 바이블 스터디를 지도하고 욥기 주석을 편역했다. 예술의 중심지가 된 뉴욕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미술과 미술비평에 관심을 가졌으며, 일찍부터 뉴욕 미술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대가와 친구들' 시리즈를 집필했다.

지은 책으로는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