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사고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길 원하지 않았다. 『철학적 탐구』는 독자들이 편리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미리 잘 꾸려진 사상들을 제공하기보다는, 독자들을 자극하여 스스로 사고하도록 의도되었다. 이런 의도는 글 쓰는 스타일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글은 파편적이고 우회적이며,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건너뛰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되돌아온다. 그는 철학적 물음들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예들이나 이야기들을 통해 암시한다. 실마리는 주어지지만 그 함축은 대개는 분명하지 않다. 풍성한 비유들이 있지만 이것들을 해석하는 일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장보다는 번호 매긴 짤막한 절을 사용한다. 책의 이러한 구성이 모두 그의 탓만은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1953년에 출간되었으며, 그가 수년 동안 작업해온 필사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철학 논고』와의 관련 relation to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비트겐슈타인의 생시에 출간된 유일한 책은 1921년에 출판된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하 『논고』)였다. 이 책은 번호를 매긴 일련의 간결한 서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논리와 인간 사고의 한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적인 스타일과 잘 결합시켰다. 이 책은 ‘말할 수 없는 곳에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최종적인 선언으로 가장 유명하다. 이것은 실천을 위한 격언이라기보다는 사고의 한계에 대한 자기 견해들의 요약이다. 인간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의 세계 바깥에 있다. 이것들은 표현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면에서 『철학적 탐구』는 『논고』에 나타난 견해들에 대한 비판이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더 최근 사상과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논고』를 『철학적 탐구』의 서론으로 출판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철학의 본성 the nature of philosophy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파리가 갇혀 있는 병에서 그 파리를 꺼내주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철학자들은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언어가 할 수 없는 일을 언어로 억지로 시도하다가 스스로 갖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어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가 ‘휴가를 떠날’ 때에(언어가 활동을 멈출 때: 옮긴이) 생겨난다”(38절). 다른 말로 하자면 철학적 문제는 말을 부적절한 맥락에서 사용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접근은 그런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기획이다. 언어의 실제적 사용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리하여 병에 갇힌 파리를 나올 수 있게 해줌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접근은 때때로 치료적 접근으로 특징지어진다. 철학은 치료를 요하는 질환이다. 철학은 ‘인간의 이해력이 언어의 한계를 향해 치닫다가 부딪혀서 얻은 혹’(119절)을 검사한다. 치료법은 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우리는 어째서 언어가 반드시 기능해야만 한다고 상상하는지를 살피기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어의 실제 사용에 대한 그의 분석은 사회 인류학에서의 작업 같은 것은 아니다. 언어가 사용되는 몇 가지 방식들을 확인시켜줌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사고와 유의미성의 한계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기획의 많은 부분이 언어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이론들을 제거하는 일을 포함한다. 언어의 특정한 사용에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러한 대규모의 이론화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신념에 있다. 이런 이론들은 우리가 탐구하는 사물의 본질이 발견될 수 있다는 틀린 가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용으로서의 의미 meaning as use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본성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라고 여기는 이론을 공격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견해의 대표적인 예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 습득에 관한 설명, 즉 대상을 가리키고 이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언어를 습득한다는 설명을 꼽는다. 언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그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단어는 대상의 이름이며, 결합된 단어의 고유한 기능은 실재를 기술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 사과를 내보이며 ‘이것이 사과다’라고 말한다. 이런 방법을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 의한 가르침이라 부른다. 즉 그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을 가리키는 방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직시적 정의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모든 언어습득의 기초가 된다는 견해에 따르는 많은 어려움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러한 직시적 정의는 상당량의 배경설정을 요구한다. 그 아이는 대상을 가리키는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이 그 사과의 색깔이나 모양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직시적 정의는 지적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허용한다. 나아가서 설령 그 아이가 어떤 특정 사례의 직시적 정의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가 이 사례에서 이것과 유사한 다른 사례로 넘어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매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우리가 여러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종류의 용구들을 한데 모아놓은 도구상자와도 같다.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비유를 빌면 언어는 기관실의 레버들과도 같다. 단어들은 서로 모양이 닮았기에 우리는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종류의 기능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기관실의 레버들처럼 그 유사성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 레버는 밸브를 작동시키고 다른 레버는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어떤 것은 오직 두 개의 위치, 즉 ‘꺼짐’과 ‘켜짐’의 위치만을 가지지만 다른 것은 연속선상에서 작동할 수도 있다(가령 라디오의 음량조절 단추는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옮긴이).
실제 언어의 성격을 검토해본다면 우리는 금방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어들의 의미는 이것들의 사용에 의해 주어지며 이것들이 지시하는 대상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밑바닥에 있는 본질, 즉 공통분모 또는 하나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조사해보면 우리는 여러 다른 맥락에서 작용하는 중첩된 기능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어구가 의미하는 바는 언어사용이란 ‘가지고 노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다양한 규칙에 따르는 작용들이 있고 이것들 안에서 언어가 기능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삶의 형식, 즉 그 다양한 사용들을 통해 발전된 사회적 규약들 안에 붙박여 있다. 말의 의미는 우리가 그것들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게 된 방식에 의해 지배된다. 사용의 맥락인 삶의 형식에서 벗어나면 말들은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