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은 그것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다

그해는 점차 우울증이 심해진 아버지 파울 융이 암 진단을 받고 융의 곁에서 숨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떠안게 된 융은 열아홉 살의 자신과는 다른 어떤 모습을 외부로 발산했다. 후에 융은 그것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으며 시인 예이츠는 이를 “가면”이라고 명명했다.
동료 학생들은 그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촌스러운 책벌레였던 그가 북적이는 대학생활에 적응했고 알베르트 외리에 따르면 그는 “술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가 술에 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일단 취하면 매우 시끄러웠다. 처음에 그는 초핑기아Zofingia[융이 가입한 학생 모임]에서 춤을 추며 여자들을 만나느라 시간을 보내는 등의 낭만적인 생활에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꽤 춤을 잘 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핑엔Zofingen에서 열린 큰 파티에서 … 춤을 추다가 불어가모국어인 소녀와 속절없는 사랑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그는 가게에 가서 결혼반지 두개를 사면서 카운터에 20상팀을 놓고 매우 감사하다고 말하고 가게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반지 가격이 몇 프랑 정도는 된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융은 반지를 돌려주고 그가 냈던 20상팀을 도로 집은 후 20상팀밖에 없다고 결혼을 못하게 하는 못된 주인이라고 욕설을 내뱉고는 가게를 떠났다. 그는 이 일을 매우 수치스러워하며 다시는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사연으로 그“ 술통”은 몇 년간 결혼을 생각하지 않은 채 계속 술을 마셔댔다.
융은 자신의 대학 시절을 “지적으로 살아 있는” 나날이며 “우정을 쌓은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꿈꾸는 삶을 위해 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이와 함께 과학, 철학, 고고학,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플라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의 철학에는 찬성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자들이 따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에는 반대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에서는 “생명의 숨결”을 느꼈으며 쇼펜하우어와 칸트에서도 그보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 괴테의 『파우스트Faust』는 대극들의 문제를 일깨움으로써 그에게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쵤너, 크룩스와 같은 권위 있는 사상가들의 저서와 스베덴보리의 “7권 전집”을 읽은 융은 초자연적 현상이 평생 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새로운 연구 분야라고 확신했다.
수많은 책을 읽은 그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당연하게 생각한 이야기들과 동일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전 세계의 여러 문화에서 보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예견하는 꿈, 죽음이 찾아올 때 시계가 멈추는 현상, 폭풍과 지진을 예지하는 동물들, 귀신에 대한 경험 등이 그것이었다. 융의 가족사를 보면 신통력이 있는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있었다. 그의 사촌 헬레네 프라이스베르크 역시 그러했는데 융은 그녀를 영매로 삼아 강령회를 열고 연구했다. 집에서는 멀쩡했던 식탁이 아무 이유 없이 둘로 쪼개졌고 서랍 속의 칼은 네 조각으로 부서졌다. 이 일들을 계기로 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융의 사촌 헬레네는 가족이 참석하는 교령회交靈會[séances: 산 사람이 망자의 혼령과 교류를 시도하는 모임]에서 영매를 맡았다. 그녀는 최면상태에 빠져 만다라에 대해 설명했고 융은 이를 그림으로 그렸다.
나는 이상하고 의심스러워 보였던 심령론자들을 관찰하면서 객관적인 심령현상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 나는 그것이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나의 삶에는 새로운 차원이 추가되었으며, 세상에는 깊이와 배경이 생겼다.
주변의 친구들은 그 같은 새로운 관심사로 생긴 그의 변화를 감지했다. “융은 훌륭한 이야기꾼이 되겠군”이라고 한 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융은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보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말에 화가 났고 심지어 모욕감을 느꼈다.
융은 영적 세계에 관한 문학을 연구하고 그 분야에서 상당한 실험을 거치면서 추가적인 심리학 연구로 이론이 수정되지 않는 한 자신의 확신을 지키고자 했는데, 나는 그가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의 용기를 힘겹게 시험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주술적occult 현상의 존재를 연구하고 규명하는 대신 그것을 철저하게 부정했던 당시의 공식적인 과학에 반기를 들었다.
융이 그의 사촌 헬레네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준비한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소위 주술적 현상의 심리학과 병리학On the Psychology and Pathology of So-Called Occult”이었다. 영매로서의 그녀의 능력은 초기에 무의식을 탐구하던 융에게 나침반이 되었다. 융은 당시 그의 흥미를 끌었던 두 가지 힘에 대해 자서전에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과학의 구체적인 사실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비교종교학에서 철학이 포함된 영적인 문제들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나는 과학에서는 의미의 요소가 부족하고, 종교에서는 경험주의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과학은 제1인격의 요구사항을 매우 광범위하게 충족시켰으며 인문이나 역사 연구는 제2인격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었다.
나는 이 두 축 사이에서 망설이느라 오랫동안 어느 쪽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무엇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다양한 관심사를 주 연구 분야 하나로 수렴할 수 있을까? 융은 크라프트-에빙의 저서 첫 몇 페이지를 통해 당시 경시되던 정신의학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서 크게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유일하게 가능한 목표가 정신의학이라는 사실이 번뜩이는 깨달음을 통해 분명해지자 강한 흥분을 느꼈다. 내가 관심을 갖던 두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 강바닥을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모든 곳을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생물학과 영적인 사실들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경험주의가 정신의학에는 있었다. 여기가 바로 자연과 영혼의 마주침이 현실이 되는 곳이었다.
융의 선택에 교수들과 동료 학생들은 “놀라움과 실망”을 보였다. 이에 그는 다시 소외감을 느끼면서 “오랜 상처가 … 다시 도지기” 시작했지만 여러 해의 연구 끝에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한다”라는 충분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