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종교

 

 

 

 

 

 

 

몇몇 서방인들은 이슬람교라면 으레 “칼의 종교” 를 떠올린다. 이같이 왜곡된 시각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도 그렇지만,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인 사이프울이슬람의 이름이 “이슬람교의 칼” 이란 뜻이라서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지하드운동 연구에 영향을 미치는 오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에 귀감을 얻은 폭력이 역사적으로 이슬람교의 중심이라는 신세계 무질서 사상은 현대 지하드운동과 전통 지하드의 융합을 부추겼다. 그런데 교황도 그 차이를 잘 모르는 것 같다. 2006년 9월, 교황 베네딕트는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종교, 이성, 대학-기억과 반성”을 주제로, 1392년 이슬람교가 포교의 일환으로 폭력을 허용한 점을 비판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마누엘 2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슬람교와 서방세계의 논의를 위해 폭력을 제기했다. 현역 정치인과는 달리 베네딕트는 원고 집필자를 고용하지 않고, 마치 자문을 구하지 않는 학자인 양 강연 원고를 몸소 작성한 탓에 가끔 말썽을 일으켰다. 강연에서 교황이 마누엘의 『어느 페르시아인과의 대화Dialogue Held with a Certain Persian』에서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가 벌인 짓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가 설파한 종교를 칼로 퍼뜨리라는 명령을 비롯하여 온통 악하고 비인간적인 만행뿐일 것이요.” 종교재판과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를 대변하는 사람이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을 문제 삼으려는 의도가 다분해 분명 어설픈 면이 있다. 그러나 그에 깔린 메시지는 수긍할 만하다. 즉 교황은 포교의 일환으로 폭력이 정당한가를 두고 이슬람세계를 논의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요구 자체라기보다는 그렇게 한 방식에 있었기에 이를 지켜본 이슬람주의자와 전 세계의 무슬림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물론 교황의 의도가 불순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에게 이슬람혐오증이 있다기보다는, 폭력이 법으로 금지된 문명사회가 나누는 진솔한 대화에 무슬림을 참여시키고 싶어 그랬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폭력을 동원한 개종활동과 종교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잘못일까? 이에 무슬림이 이슬람혐오증을 운운하며 열을 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줄의 인용문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종교적 폭력이라는 원대한 쟁점에 열통이 터진 것일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슬람주의자와 무슬림 여론주동자들은 이를 계기로 열린 대화에 거리를 두었다. 무슬림은 대부분 이슬람교가 지하드 덕분에 확산되었다고 믿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근거란 없다.
물론 그들에게는 평화적인 노력으로 비쳐지며 전쟁과는 관계가 없다. 무슬림은 스스로 평화적 종교의 민족이라 자부하지만 이는 교화(다와)가 성전과 관계가 깊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대립된다. 그럼에도 무슬림은 지하드가 평화를 지향한다고 믿기에 개종을 폭력과 결부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지하드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수련이다. 교세를 확장하는 데 폭력을 사용할지도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신자들” 이 포교에 걸림돌이 될 때에 자기방어 차원에서 그럴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1453년 이슬람의 정복, 즉 성전이 있기 수년 전에 자행한 군사 공격으로 비잔틴 제국이 몰락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마누엘 2세의 아들은 죽임을 당했고, 이스탄불로 변모한 도시는 이슬람 제국의 마지막 수도가 되었다. 그 전의 스페인도 평화적 교화나 “자기방어” 와는 거리가 먼 정복 전쟁을 벌였다. 지하드는 자기수련이란 뜻이지만 물리적인 투쟁이란 의미도 있다. 그래도 고전 지하드는 전쟁이지 테러리즘은 아니다.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교황이 강연한 의도는, 그 후 무슬림에 공식적으로 사과할 때에도 재차 언급했지만, “문화와 종교의 순수한 대화가… 오늘날 절실히 필요하다” 는 점을 일깨워주려는 것이었다. 필자라면 그와 더불어 대화가 솔직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양측은 폭력과 종교의 관계를 진솔하게 논의해야 한다. 2001년 미국과, 2004~06년간 유럽에서 벌어진 테러 공격은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지하드 외에 다른 명분은 없었다. 이 사건으로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다.
유럽에서 부상하는 무슬림 이민자들도 화두가 되었다. 이를테면, 소수집단 신세계 무질서의 통합성이 부족한 탓에 “포위된 이슬람교”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지하드운동의 도입이 정당하다는 여론까지 일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우리는 양측의 자기기만으로 점철된 궁지를 이슬람교 안에 둔 셈이다. 일반 무슬림은 과거의 폭력적 지하드를 외면하는 반면, 지하디스트들은 뻔뻔스레 다양한 폭력으로 고대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어 할 것이다. 지하드운동과 지하드는 양측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차이가 미묘하다. 전
통 지하드에는 폭력도 해당되나 테러가 아닌 정규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지하드운동은 정치적 이슬람교에 근거한 현대 사상이다. 이 장을 쓰는 목적은 이슬람교의 폭력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자행하는 현대 지하드운동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으로, 학술적 연구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 것이 국내외 정책에도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주의가 지하드를 테러의 수단으로 변조한 경위를 이해하려면 우선 지하드의 독트린과 그 역사를 둘러싼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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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본질에 관한 몇 가지 결론적 생각

 

 

 

 

 

 

이 장을 마치기에 앞서 지금까지 줄곧 독자들을 괴롭혀왔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 장 전반에 걸쳐 강조한 바 있는 공리주의의 이점 가운데 하나는 그 이론에 내포된 자연주의 논리다. 공리주의자들은 어떻게 우리가 한편으로는 도덕을 신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엔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와 관련 있으면서 매력적인 또 다른 이점은 공리주의 이론이, 다른 여러 경험적 의문에 답하듯이 도덕적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공리주의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들여다보며, 최대의 행복을 어떻게 만들어낼지를 궁리한다. 공리주의자들에게 도덕적 의문이란 기술적인 문제와 다를 바가 없다. 목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룰 길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이런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는 도덕적 추론방법에서 큰 발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책을 열던 첫 대목에서, 인간의 도덕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려는 도덕적 추론과 탐구 방식이 대체로 모호하여 다른 형태의 추론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행복은 측정될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면, 이것 역시 커다란 진보다. 행복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잴 수 있는 것이라면, 공리주의자들의 기획은 무척 희망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의 잠재적인 문제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행복이 정의하기 어렵다거나 도덕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제 나름의 판단에 따라 정의된다면, 공리주의 견해는 자연주의적으로 정리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세상에는 경험적 조사에 적합한 것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바로 저기에’ 있고, 그 본질이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방 안에 식탁이 몇 개 있는지를 알려고 한다면, 방 안을 둘러보며 수를 세면 된다. 거기에는 독립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답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는 경험적 조사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 따로 있어서, 이들을 판단하려면 먼저 하나의 평가적 시각을 지녀야 한다. 예컨대, 방 안에 있는 식탁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지, 아니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지를 판단하려면 먼저 하나의 평가적 시각을 지녀야 한다. 공리주의는 다음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무엇이 최대의 행복을 가져오는가?”라는 공리주의의 기본적 의문이 “방 안에 식탁이 몇 개 있는가?”라는 경험적 의문에 가까운지, 아니
면 “방 안에 있는 식탁들이 정리되어 있는가, 아니면 흩어져 있는가?” 같은 경험적 의문에 가까운지를 결정해야 한다. 공리주의가 나타난 동기를 살펴볼 때 설명했듯이,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의 문제를 경험적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을 띤다.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강점 하나는 윤리를 애매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는 데 있다고 알려졌다. 행복의 문제를 평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면, 공리주의에 대한 고찰을 시작할 때 나온 의문들이 다시 나온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측면에서 그러할까? 행복이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종류의 사실이 행복에 관한 사실일까? 여기서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이 어떤 방법으로건 측정될 수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경향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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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이론은 도덕이 인류 복지를 증진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로 여기서 스마트는 규칙 공리주의보다는 행위 공리주의를 개선하여 발전시켜 나아갈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대안적 공리주의를 더 자세히 검토하기 위해 먼저 공리주의를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본 공리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의 지침을 마련해주는 결정의 절차로 본 공리주의다. 이 장에서는 행위 혹은 규칙 공리주의를 설명하면서 공리주의 행위자는 공리주의 이론을 액면대로 받아들여 어떻게 행위할지 결정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이론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지시하는 동시에 우리의 행위를 인도할 것이며, 이 두 가지 작용은 결국 하나의 같은 작용으로 합쳐질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론에 비추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충실한 공리주의자는 이 이론에 따라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려고 노력할 것이다.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려던 노력이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 때에는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설명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규칙 공리주의로 견해를 바꾸었다. 그렇지만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규칙 공리주의마저 때에 따라서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스마트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무엇으로 가리는가에 대한 공리주의의 기본 이해는 두 가지 중 어느 것에 따라서도 바뀔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만 행위의 결과에 비추어 가려질 문제일 뿐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도덕적 사안이지만, 하나의 행위자가 예컨대,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좋은 공리주의자로서 어떻게 사고하고 행위해야 하는지는 시행착오를 거쳐 검증될 수 있는 하나의 경험적 문제다.

지금까지 검토에서 드러난 점은 좋은 공리주의자는 모름지기 행위 공리주의자나 규칙 공리주의자로 행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둘 가운데 어떤 쪽으로 행위하더라도 이익을 최대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제시하려는 대안은 공리주의자라면 마땅히 옳고 그름에 대한 일정한 인식을 지녀야 하겠지만, 규칙을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느 범위에서 따를 것인지, 우정을 쌓을 것인지, 자기 발전에 매진할 것인지, 권리를 존중할 것인지 같은 문제를 놓고 어떻게 행위할지를 정하는 것은 열린 문제로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열어둔다고 해서 옳거나 그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당사자가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경험적 문제들의 경우처럼, 우리는 단순히 그 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 답은 추후의 실험과 조사를 거쳐 얻어질 일이다.
지금까지 도덕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 공리주의 이론이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공리주의 이론은 도덕이 인류 복지를 증진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도덕적 기준이 중요한 것도 인류 복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공리주의 이론은 어떤 행위는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식의 모호한 사고를 거부하는 한편, 일종의 자연주의를 선호하면서 인류의 복지를 중시하는 일반 경향과의 조화를 모색한다. 또한, 일반 상식에서 동떨어진 도덕적 결과를 내놓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자연주의 논리가 공리주의 이론을 정당화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공리주의는 도덕적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문이나 노예화, 그리고 거짓말 같은 행위조차 상황에 따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에 대한 비평에 맞서 공리주의자들이, 그 대안은 무엇이냐고 다음과 같이 물을 법하다. 그렇다면 도덕적 상식은 ‘……해서는 안 되느니라’에 해당하는 영역을 따로 마련해두었을까? 우리가 이 점을 추궁할 때 대답할 말이 있는가? 급진적 공리주의는 그에 반대하는 논자들의 도덕적 추궁 앞에서 반직관적 결론을 고수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이들은
반대론자들의 가정,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도덕적 기준이 현실적일 수 있다는 가정을 뒤엎는 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복지의 성과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을 길잡이 삼아, 지금까지 공리주의가 매력적이면서도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이론으로 발전해나갈 길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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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그것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다

 

 

 

 

 

 

그해는 점차 우울증이 심해진 아버지 파울 융이 암 진단을 받고 융의 곁에서 숨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떠안게 된 융은 열아홉 살의 자신과는 다른 어떤 모습을 외부로 발산했다. 후에 융은 그것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으며 시인 예이츠는 이를 “가면”이라고 명명했다.
동료 학생들은 그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촌스러운 책벌레였던 그가 북적이는 대학생활에 적응했고 알베르트 외리에 따르면 그는 “술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가 술에 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일단 취하면 매우 시끄러웠다. 처음에 그는 초핑기아Zofingia[융이 가입한 학생 모임]에서 춤을 추며 여자들을 만나느라 시간을 보내는 등의 낭만적인 생활에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꽤 춤을 잘 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핑엔Zofingen에서 열린 큰 파티에서 … 춤을 추다가 불어가모국어인 소녀와 속절없는 사랑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그는 가게에 가서 결혼반지 두개를 사면서 카운터에 20상팀을 놓고 매우 감사하다고 말하고 가게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반지 가격이 몇 프랑 정도는 된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융은 반지를 돌려주고 그가 냈던 20상팀을 도로 집은 후 20상팀밖에 없다고 결혼을 못하게 하는 못된 주인이라고 욕설을 내뱉고는 가게를 떠났다. 그는 이 일을 매우 수치스러워하며 다시는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사연으로 그“ 술통”은 몇 년간 결혼을 생각하지 않은 채 계속 술을 마셔댔다.
융은 자신의 대학 시절을 “지적으로 살아 있는” 나날이며 “우정을 쌓은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꿈꾸는 삶을 위해 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이와 함께 과학, 철학, 고고학,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플라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의 철학에는 찬성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자들이 따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에는 반대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에서는 “생명의 숨결”을 느꼈으며 쇼펜하우어와 칸트에서도 그보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 괴테의 『파우스트Faust』는 대극들의 문제를 일깨움으로써 그에게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쵤너, 크룩스와 같은 권위 있는 사상가들의 저서와 스베덴보리의 “7권 전집”을 읽은 융은 초자연적 현상이 평생 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새로운 연구 분야라고 확신했다.
수많은 책을 읽은 그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당연하게 생각한 이야기들과 동일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전 세계의 여러 문화에서 보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예견하는 꿈, 죽음이 찾아올 때 시계가 멈추는 현상, 폭풍과 지진을 예지하는 동물들, 귀신에 대한 경험 등이 그것이었다. 융의 가족사를 보면 신통력이 있는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있었다. 그의 사촌 헬레네 프라이스베르크 역시 그러했는데 융은 그녀를 영매로 삼아 강령회를 열고 연구했다. 집에서는 멀쩡했던 식탁이 아무 이유 없이 둘로 쪼개졌고 서랍 속의 칼은 네 조각으로 부서졌다. 이 일들을 계기로 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융의 사촌 헬레네는 가족이 참석하는 교령회交靈會[séances: 산 사람이 망자의 혼령과 교류를 시도하는 모임]에서 영매를 맡았다. 그녀는 최면상태에 빠져 만다라에 대해 설명했고 융은 이를 그림으로 그렸다.

 

나는 이상하고 의심스러워 보였던 심령론자들을 관찰하면서 객관적인 심령현상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 나는 그것이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나의 삶에는 새로운 차원이 추가되었으며, 세상에는 깊이와 배경이 생겼다.

 

 

주변의 친구들은 그 같은 새로운 관심사로 생긴 그의 변화를 감지했다. “융은 훌륭한 이야기꾼이 되겠군”이라고 한 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융은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보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말에 화가 났고 심지어 모욕감을 느꼈다.
융은 영적 세계에 관한 문학을 연구하고 그 분야에서 상당한 실험을 거치면서 추가적인 심리학 연구로 이론이 수정되지 않는 한 자신의 확신을 지키고자 했는데, 나는 그가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의 용기를 힘겹게 시험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주술적occult 현상의 존재를 연구하고 규명하는 대신 그것을 철저하게 부정했던 당시의 공식적인 과학에 반기를 들었다.
융이 그의 사촌 헬레네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준비한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소위 주술적 현상의 심리학과 병리학On the Psychology and Pathology of So-Called Occult”이었다. 영매로서의 그녀의 능력은 초기에 무의식을 탐구하던 융에게 나침반이 되었다. 융은 당시 그의 흥미를 끌었던 두 가지 힘에 대해 자서전에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과학의 구체적인 사실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비교종교학에서 철학이 포함된 영적인 문제들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나는 과학에서는 의미의 요소가 부족하고, 종교에서는 경험주의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과학은 제1인격의 요구사항을 매우 광범위하게 충족시켰으며 인문이나 역사 연구는 제2인격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었다.
나는 이 두 축 사이에서 망설이느라 오랫동안 어느 쪽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무엇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다양한 관심사를 주 연구 분야 하나로 수렴할 수 있을까? 융은 크라프트-에빙의 저서 첫 몇 페이지를 통해 당시 경시되던 정신의학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서 크게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유일하게 가능한 목표가 정신의학이라는 사실이 번뜩이는 깨달음을 통해 분명해지자 강한 흥분을 느꼈다. 내가 관심을 갖던 두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 강바닥을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모든 곳을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생물학과 영적인 사실들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경험주의가 정신의학에는 있었다. 여기가 바로 자연과 영혼의 마주침이 현실이 되는 곳이었다.

 

 


융의 선택에 교수들과 동료 학생들은 “놀라움과 실망”을 보였다. 이에 그는 다시 소외감을 느끼면서 “오랜 상처가 … 다시 도지기” 시작했지만 여러 해의 연구 끝에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한다”라는 충분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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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문명의 풍요의 여신을 데비와 엮으려는 시도가 억지 주장은 아니다

 

 

 

 

 

 

사실 인더스 문명에서 발견된 이러한 종교 관련 유물들은 다른 인도-유럽어족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여신 헤라를 숭배했다. 에게 해에 정착하면서부터 숭배되기 시작한 이 토착 여신은 그리스의 최고신 제우스의 아내이다. ‘헤라Hera’라는 이름은 계절과 관련이 있으며 이름 자체에서 결혼 적령기를 맞은 여성들의 풍성한 원숙미가 연상된다. 고대 그리스인은 매년 봄 헤라가 신성한 샘에서 목욕재계하면서 처녀성을 되찾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혈적인 성격만은 그대로였나 보다. 그녀는 외도를 일삼는 남편 제우스를 달달볶았고, 아들을 낳은 혼외자들을 핍박하는 데 열을 올렸다. 특히 헤라클레스에게는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이 영웅은 요람에서조차 괴력을 선보여야 했다. 헤라가 보낸 뱀 두 마리가 요람으로 기어들어왔으니 자신을 보호하자면 힘으로 뱀의 목을 졸라 죽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뱀은 땅의 여신 헤라가 아끼는 피조물이었다.
인더스 문명의 풍요의 여신을 데비와 엮어보려는 시도가 억지 주장인 것은 아니다. 아리아인 침략자들의 가장 오래된 브라만교 경전인 『리그 베다Rig Veda』에는 시바 신의 아내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시바의 아내로 받들고 있는 자비의 여신 파르바티와 이 인더스 문명의 풍요의 여신 사이에 공통점이 있
는지 여부를 『리그 베다』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 데비는 이름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사티・파르바티・두루가・칼리가 모두 데비 여신의 이름이다. 파르바티Parvati는 ‘산에 사는 여자’란 뜻이다. 이것은 파르바티가 아리안의 침략이 있기 전부터 이곳에서 숭배되었던 신이라는 걸 의미한다. 산과 같이 도시와 유리된 곳을 선호하는 여신은 시바에게 적합한 짝이었을 것이다. 인더스 계곡에서 시작된 풍요의 여신에 대한 숭배는 아리아인의 침략 이후까지 인도 아대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리아인의 침략으로 최하층계급인 노예신분이 된 인도 아대륙 토착민들은 『리그 베다』를 접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민족의 종교는 상호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힌두교의 최고신 시바가 그 증거이다. 이 ‘신성한 요가 수행자’를 통해서 우리는 아리아 정복자들이 믿던 신들에 남겨진 인더스 계곡 사람들의 희미한 종교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인더스 인장에는 요가 자세를 취한 뿔이 달린 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인장에 새겨진 신은 앉은 자세에서 다리를 굽혀 발바닥을 서로 맞댄 자세를 취한 채 앉아 있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어떠한 추론을 해본들 인더스 문자를 해독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언제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바의 모습에서 아주 오래된 신앙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 모습만큼은 인더스 문명에서 영향받은 것이 분명해보이니 말이다.
인더스 계곡의 상인들은 사치품뿐만 아니라 원자재도 거래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에도 항구가 있었다. 하지만 보존이 가장 잘 된 항구는 로톨Lothol에 있던 선창이었다. 이 항구 유적은 1954년에 현재 구자라트Gujarat 지역의 아마다바드Ahmadabad에서 8km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가로 580m, 세로 365m 면적의 담으로 에워싸인 항
구 터에는 널찍한 부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물길이 다 말라버렸지만 예전에는 부두로 흘러드는 푸른 강물의 세찬 물살이 파고들었을 좁은 수로도 남아 있다. 항구 외벽과 진흙과 진흙벽돌로 마감한 바닥 설계는 침입자들로부터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홍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로톨에는 성문이 없다. 그저 항구도시를 꽁꽁 둘러싼 외벽 사이에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서쪽으로 나 있을 뿐이다. 가로 215m, 세로 36m에 이르는 이 인공부두는 구운 벽돌, 석고 모르타르, 역청을 사용하여 건설한 것이다. 배가 드나들고 짐을 하역하기에 충분한 물을 부두에 가둘 수 있었던 건 방수기술 덕분이었다. 이 놀라운 기술에 힘입어 조류의 세기와 상관없이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게 하는 제어 메커니즘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수해를 전혀 입지 않았던 건 아니다. 잦은 홍수피해와 보수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로톨은 무역의 요충지였고, 이 항구를 출입하는 정기 운행선이 20km 떨어진 강어귀에 정박한 대형선으로부터 화물을 항구로 실어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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