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 문명의 풍요의 여신을 데비와 엮으려는 시도가 억지 주장은 아니다

 

 

 

 

 

 

사실 인더스 문명에서 발견된 이러한 종교 관련 유물들은 다른 인도-유럽어족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여신 헤라를 숭배했다. 에게 해에 정착하면서부터 숭배되기 시작한 이 토착 여신은 그리스의 최고신 제우스의 아내이다. ‘헤라Hera’라는 이름은 계절과 관련이 있으며 이름 자체에서 결혼 적령기를 맞은 여성들의 풍성한 원숙미가 연상된다. 고대 그리스인은 매년 봄 헤라가 신성한 샘에서 목욕재계하면서 처녀성을 되찾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혈적인 성격만은 그대로였나 보다. 그녀는 외도를 일삼는 남편 제우스를 달달볶았고, 아들을 낳은 혼외자들을 핍박하는 데 열을 올렸다. 특히 헤라클레스에게는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이 영웅은 요람에서조차 괴력을 선보여야 했다. 헤라가 보낸 뱀 두 마리가 요람으로 기어들어왔으니 자신을 보호하자면 힘으로 뱀의 목을 졸라 죽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뱀은 땅의 여신 헤라가 아끼는 피조물이었다.
인더스 문명의 풍요의 여신을 데비와 엮어보려는 시도가 억지 주장인 것은 아니다. 아리아인 침략자들의 가장 오래된 브라만교 경전인 『리그 베다Rig Veda』에는 시바 신의 아내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시바의 아내로 받들고 있는 자비의 여신 파르바티와 이 인더스 문명의 풍요의 여신 사이에 공통점이 있
는지 여부를 『리그 베다』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 데비는 이름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사티・파르바티・두루가・칼리가 모두 데비 여신의 이름이다. 파르바티Parvati는 ‘산에 사는 여자’란 뜻이다. 이것은 파르바티가 아리안의 침략이 있기 전부터 이곳에서 숭배되었던 신이라는 걸 의미한다. 산과 같이 도시와 유리된 곳을 선호하는 여신은 시바에게 적합한 짝이었을 것이다. 인더스 계곡에서 시작된 풍요의 여신에 대한 숭배는 아리아인의 침략 이후까지 인도 아대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리아인의 침략으로 최하층계급인 노예신분이 된 인도 아대륙 토착민들은 『리그 베다』를 접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민족의 종교는 상호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힌두교의 최고신 시바가 그 증거이다. 이 ‘신성한 요가 수행자’를 통해서 우리는 아리아 정복자들이 믿던 신들에 남겨진 인더스 계곡 사람들의 희미한 종교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인더스 인장에는 요가 자세를 취한 뿔이 달린 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인장에 새겨진 신은 앉은 자세에서 다리를 굽혀 발바닥을 서로 맞댄 자세를 취한 채 앉아 있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어떠한 추론을 해본들 인더스 문자를 해독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언제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바의 모습에서 아주 오래된 신앙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 모습만큼은 인더스 문명에서 영향받은 것이 분명해보이니 말이다.
인더스 계곡의 상인들은 사치품뿐만 아니라 원자재도 거래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에도 항구가 있었다. 하지만 보존이 가장 잘 된 항구는 로톨Lothol에 있던 선창이었다. 이 항구 유적은 1954년에 현재 구자라트Gujarat 지역의 아마다바드Ahmadabad에서 8km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가로 580m, 세로 365m 면적의 담으로 에워싸인 항
구 터에는 널찍한 부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물길이 다 말라버렸지만 예전에는 부두로 흘러드는 푸른 강물의 세찬 물살이 파고들었을 좁은 수로도 남아 있다. 항구 외벽과 진흙과 진흙벽돌로 마감한 바닥 설계는 침입자들로부터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홍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로톨에는 성문이 없다. 그저 항구도시를 꽁꽁 둘러싼 외벽 사이에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서쪽으로 나 있을 뿐이다. 가로 215m, 세로 36m에 이르는 이 인공부두는 구운 벽돌, 석고 모르타르, 역청을 사용하여 건설한 것이다. 배가 드나들고 짐을 하역하기에 충분한 물을 부두에 가둘 수 있었던 건 방수기술 덕분이었다. 이 놀라운 기술에 힘입어 조류의 세기와 상관없이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게 하는 제어 메커니즘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수해를 전혀 입지 않았던 건 아니다. 잦은 홍수피해와 보수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로톨은 무역의 요충지였고, 이 항구를 출입하는 정기 운행선이 20km 떨어진 강어귀에 정박한 대형선으로부터 화물을 항구로 실어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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