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종교

 

 

 

 

 

 

 

몇몇 서방인들은 이슬람교라면 으레 “칼의 종교” 를 떠올린다. 이같이 왜곡된 시각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도 그렇지만,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인 사이프울이슬람의 이름이 “이슬람교의 칼” 이란 뜻이라서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지하드운동 연구에 영향을 미치는 오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에 귀감을 얻은 폭력이 역사적으로 이슬람교의 중심이라는 신세계 무질서 사상은 현대 지하드운동과 전통 지하드의 융합을 부추겼다. 그런데 교황도 그 차이를 잘 모르는 것 같다. 2006년 9월, 교황 베네딕트는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종교, 이성, 대학-기억과 반성”을 주제로, 1392년 이슬람교가 포교의 일환으로 폭력을 허용한 점을 비판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마누엘 2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슬람교와 서방세계의 논의를 위해 폭력을 제기했다. 현역 정치인과는 달리 베네딕트는 원고 집필자를 고용하지 않고, 마치 자문을 구하지 않는 학자인 양 강연 원고를 몸소 작성한 탓에 가끔 말썽을 일으켰다. 강연에서 교황이 마누엘의 『어느 페르시아인과의 대화Dialogue Held with a Certain Persian』에서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가 벌인 짓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가 설파한 종교를 칼로 퍼뜨리라는 명령을 비롯하여 온통 악하고 비인간적인 만행뿐일 것이요.” 종교재판과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를 대변하는 사람이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을 문제 삼으려는 의도가 다분해 분명 어설픈 면이 있다. 그러나 그에 깔린 메시지는 수긍할 만하다. 즉 교황은 포교의 일환으로 폭력이 정당한가를 두고 이슬람세계를 논의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요구 자체라기보다는 그렇게 한 방식에 있었기에 이를 지켜본 이슬람주의자와 전 세계의 무슬림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물론 교황의 의도가 불순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에게 이슬람혐오증이 있다기보다는, 폭력이 법으로 금지된 문명사회가 나누는 진솔한 대화에 무슬림을 참여시키고 싶어 그랬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폭력을 동원한 개종활동과 종교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잘못일까? 이에 무슬림이 이슬람혐오증을 운운하며 열을 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줄의 인용문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종교적 폭력이라는 원대한 쟁점에 열통이 터진 것일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슬람주의자와 무슬림 여론주동자들은 이를 계기로 열린 대화에 거리를 두었다. 무슬림은 대부분 이슬람교가 지하드 덕분에 확산되었다고 믿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근거란 없다.
물론 그들에게는 평화적인 노력으로 비쳐지며 전쟁과는 관계가 없다. 무슬림은 스스로 평화적 종교의 민족이라 자부하지만 이는 교화(다와)가 성전과 관계가 깊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대립된다. 그럼에도 무슬림은 지하드가 평화를 지향한다고 믿기에 개종을 폭력과 결부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지하드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수련이다. 교세를 확장하는 데 폭력을 사용할지도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신자들” 이 포교에 걸림돌이 될 때에 자기방어 차원에서 그럴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1453년 이슬람의 정복, 즉 성전이 있기 수년 전에 자행한 군사 공격으로 비잔틴 제국이 몰락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마누엘 2세의 아들은 죽임을 당했고, 이스탄불로 변모한 도시는 이슬람 제국의 마지막 수도가 되었다. 그 전의 스페인도 평화적 교화나 “자기방어” 와는 거리가 먼 정복 전쟁을 벌였다. 지하드는 자기수련이란 뜻이지만 물리적인 투쟁이란 의미도 있다. 그래도 고전 지하드는 전쟁이지 테러리즘은 아니다.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교황이 강연한 의도는, 그 후 무슬림에 공식적으로 사과할 때에도 재차 언급했지만, “문화와 종교의 순수한 대화가… 오늘날 절실히 필요하다” 는 점을 일깨워주려는 것이었다. 필자라면 그와 더불어 대화가 솔직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양측은 폭력과 종교의 관계를 진솔하게 논의해야 한다. 2001년 미국과, 2004~06년간 유럽에서 벌어진 테러 공격은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지하드 외에 다른 명분은 없었다. 이 사건으로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다.
유럽에서 부상하는 무슬림 이민자들도 화두가 되었다. 이를테면, 소수집단 신세계 무질서의 통합성이 부족한 탓에 “포위된 이슬람교”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지하드운동의 도입이 정당하다는 여론까지 일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우리는 양측의 자기기만으로 점철된 궁지를 이슬람교 안에 둔 셈이다. 일반 무슬림은 과거의 폭력적 지하드를 외면하는 반면, 지하디스트들은 뻔뻔스레 다양한 폭력으로 고대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어 할 것이다. 지하드운동과 지하드는 양측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차이가 미묘하다. 전
통 지하드에는 폭력도 해당되나 테러가 아닌 정규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지하드운동은 정치적 이슬람교에 근거한 현대 사상이다. 이 장을 쓰는 목적은 이슬람교의 폭력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자행하는 현대 지하드운동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으로, 학술적 연구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 것이 국내외 정책에도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주의가 지하드를 테러의 수단으로 변조한 경위를 이해하려면 우선 지하드의 독트린과 그 역사를 둘러싼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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