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문화 교류를 통해 발전한 유학

 

공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그의 가계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고 그가 일으킨 사상의 계통을 연구해야 한다. 유학의 발전사를 볼 때 유학은 문화 교류를 거치면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원시 유학에는 유술독존儒術獨尊, 유도호보儒道互補, 삼교합일三敎合一, 사교회통四敎會通, 다원융합多元融合이 있다. 의아해하겠지만 유술독존 역시 다른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공자가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그 나라들의 사상과 문화를 접목하여 만든 문화 교류의 산물이다. 맹자와 순자 또한 제나라에서 백가들의 사상과 접촉하여 그들 사상의 핵심을 흡수했다. 이러한 이유로 진정한 유술독존 유형은 존재할 수 없다.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유학은 다른 사상을 흡수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을 개선, 보충하고 발전시켰다. 유학은 인간과 하늘(자연)과의 관계, 인
간과 인간(사회)과의 관계, 육체와 정신(영혼)과의 관계 등 세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변화시켰다.
지셴린은 최근 몇 년 동안에 있었던 문화 교류가 인류 사회를 발전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했음을 누차 강조했다. 따라서 유학의 발전 또한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유학은 형성된 그날부터 2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것은 유학이 다른 사상들과 끊임없이 교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학은 현재 세계 사상과 세계 문화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 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유학의 전망에 대해 묻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태평천국1 에서부터 의화단운동2 과 5·4운동3 그리고 가장 격렬했던 문화대혁명4 까지 근대 이후 유학을 철저히 넘어뜨리려고 했던 잔혹한 사건들을 떠올리며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학을 연구하려는 현상이 급속도로 퍼지고 유학을 회복시키려는 조짐과 유학을 새로이 종교화하려는 움직임이 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유학이 처했던 역사적 운명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문화 교류의 관점으로 유학의 발전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래야 유학의 전망을 바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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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용이 어린 양에게 길들여진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겨우 몇백 구절로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말씀보다 적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천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논어』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출판 부수는 그 밖의 베스트셀러들을 모두 합한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다. 서양으로 뻗어나간 기독교는 현대화와 민주화를 이룬 유럽과 북미에서 크게 발전했다. 크리스천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은 일단 받아들이면 생명이 된다. 그렇다면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일단 소통하게 되면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온 마음을 다해 진정으로 신을 경배하는 것이고, 신과 동행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에 광범위하게 전파된 건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일부 중국인은 “용이 어린 양에게 길들여진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용은 중국이고 어린 양은 예수다. 기독교의 빠른 전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국의 유학이 당면한 과제다. 우선 중국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 겪은 실패와 성공의 과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교와 애카임교가 중국에서 실패한 것이 오히려 서양 교회의 전도에 불을 지폈다. 서양 교회는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중국과 기독교 사이에 해빙 무드를 조성하고자 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사비에르는 1506년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프랑스 파리 대학 성바바라 단과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같은 고향 사람 이냐시오 데 로욜라11 와 친구가 되었다. 로욜라는 늘 사비에르에게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26) 등의 『신약성경』 구절을 들려주었다. 사비에르는 예수회의 명을 받들어 인도 등 동양으로 간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사비에르는 1541년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동양 선교를 시작하고 인도의 중심 지역인 고아주와 연이어 일본 규슈 가고시마 현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들 지방에서 「통회기도」, 「고백기도」, 「십계명」, 「주님의 기도」, 「성모송」, 「성모찬송」 등의 기도문을 낭독했다. 사비에르가 가고시마 현에서 선교할 때 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인이 물었다.

“당신들의 종교가 진리라면 모든 지혜의 근원이 되는 중국인은 왜 그
것을 들어보지 못했을까요?”

사비에르는 이때부터 먼저 중국인을 크리스천으로 귀의시켜 유학문화권 전체에 영향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중국 선교를 결심하고 1552년 8월 말 광동의 상천도에 상륙했을 때는 명나라가 외국 배의 정박을 금지시키는 해금 조치를 내린 상황이었다. 그는 중국의 큰 벽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묘책을 궁리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밀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도와주겠다던 중국인 상인은 망설이면서 끝내 오지 않았고, 사비에르는 심신이 지쳐 그해 말 열병으로 급사했다. 죽기 전 그는 중국을 향해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딱딱하게 굳은 돌덩이야, 돌덩이야, 언제쯤 틈을 내어주겠느냐!”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비에르가 급사한 그해에 이탈리아에서 마테오 리치가 태어났다. 리치는 30년 후 중국에 가톨릭을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중국 의상을 착용하고 중국 모자를 쓰고 별다른 고생 없이 딱딱하게 굳은 돌덩이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서양인이 고난이라고 부르는 선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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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이해와 선택

 

어떤 사람이 장자에게 벼슬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자 장자는 소를 제물로 바치는 우화로 답을 대신했다.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떠나는 소를 본 적이 있는가? 평소에는 화려한 자수가 놓인 천을 두르고 부드러운 풀과 콩을 마음껏 먹지만 막상 제사를 지낼 때가 되어 사당으로 끌려갈 때면 그저 한 마리 평범한 송아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네.”

 

장자는 이 같은 비유를 들어 만약 누가 좋은 음식과 옷을 주며 온갖 이점을 제공하겠다고 하면 의심해보라고 했다. 혹시 그의 목적이 당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장자는 벼슬을 하는 것에 남다른 이해를 보였다. 장자에게는 한때 양梁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던 혜시惠施라는 친구가 있었다. 한 번은 장자가 학생 몇 명을 데리고 장례 행렬을 따라가다가 혜시의 무덤 앞을 지나게 됐다. 장자는 걸음을 멈추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초楚나라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콧등에 파리 날개만큼이나 얇게 석회를 묻히고 목수에게 도끼로 그 석회를 깎으라고 했네. 그 목수는 놀라운 솜씨로 코에는 전혀 상처를 내지 않고 콧등의 석회만 날려버렸지. 그리고 콧등에 석회를 발랐던 사람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어. 그는 아주 침착했지. 목수가 절대로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야.”

후에 송宋 원군元君이 그 목수를 불러 말했다.

“자네에게는 코에 상처를 안 내고 사람 콧등 위의 석회만 깎아내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디 지금 한 번 보여주게나.”

 

그러자 목수가 말했다.

“제게 분명 그런 재주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미동도하지 않았던 그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저와 한 팀을 이뤄 그 재주를 보여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나 불러다 놓고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제가 도끼를 들기도 전에 분명 겁을 먹고 기절해 버릴 겁니다.”

바로 혜시는 목수의 친구처럼 장자의 재능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도우미였다. 하지만 혜시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장자는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혜시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아직도 대화할 상대를 찾지 못했네.”

여기서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모셔다 벼슬자리에 앉히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학문과 재능뿐만 아니라 재빠른 임기응변과 뛰어난 말솜씨까지 어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자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기에 양나라의 재상이었던 혜시를 그저 자신을 도와줄 도우미에 비유했을까? 아주 익숙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다. 장자가 푸수이濮水 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초왕이 신하 두 명을 보내 국가의 대사를 그에게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장자가 말했다.

“당신네 초나라에는 신령한 거북이 있다고 들었소. 죽은 지 3천 년이 됐다지. 그런데도 초왕은 그 거북의 뼈를 대나무 상자에 넣고 다시 비단 손해를 피하고 이득만 취하는 방법으로 덮어서 사당에 모셨다고 들었소. 당신들 생각에 그 거북은 진흙탕에서라도 뒹굴며 살고 싶었을 것 같소, 아니면 죽어서 사당에 바쳐지기를 바랐을 것 같소?”

두 신하는 입을 모아 말했다.

“그야 당연히 진흙탕에서라도 살기를 원했겠죠.”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 진흙탕 속의 거북처럼 자유롭게 몇 년이라도 더 사는 거요.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오. 부귀영화를 좇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오. 그러니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평범한 삶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거라오.”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평범한 삶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 노장의 지혜 ‥‥‥

“군자지교담약수君子之交淡若水, 소인지교감여예小人之交甘如醴” 군자 사이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지만, 소인배 사이의 사귐은 그 맛이 단술과 같다는 뜻이다.『 장자』에 나오는 이 말에는 심오한 인생철학이 담겨 있다. 진정한 우정은 흐르는 물처럼 담담해 오래 유지되지만, 이익을 바탕으로 이룬 관계는 향기로운 술처럼 달콤해도 이해가 상충하면 바로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장자는 사람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까? 어떤 우화로 사람들 사이의 이해득실을 설명할까?

 

 

저자소개: 푸페이룽 傅佩榮
1950년에 태어난 푸페이룽은 타이완대학 철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학 철학박사이다. 타이완대학 철학과 학과장 및 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벨기에대학, 네덜란드 레이던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현재는 타이완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푸페이룽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말솜씨를 가진 교수로, 타이완 『민생보民生報』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교수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 교육부에서 수여하는 우수 교육자상, 『성공한 인생成功人生』으로 타이완 문화예술 분야 국가문예상, 『천론에 대한 유가와 도가의 해석儒道天論發微』으로 중정中正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타이완에서 백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는 등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특히 전통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역경』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으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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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세계의 종교로 발전한 기독교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6 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통일된 신조와 교회법을 제정하기 위해 325년에 3백 명의 주교들이 참여한 니케아 공의회7 를 소집했다.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모든 크리스천은 반드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을 믿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원시 기독교는 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과 이론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다시금 341년과 346년에 두 차례 칙령을 반포하여 이교 숭배를 금하고 이교도 사원을 강제로 폐쇄했다. 또한 375년에 제국 내의 사원에서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금하고 황제는 더 이상 사원의 최고 제사장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의 위상이 우뚝 선 것이다. 제국을 재통일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2년에 기독교가 유일한 합법 종교라고 규정하는 법을 공표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수백 년 동안 받아온 박해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로마제국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나아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의 종교로 발전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후 기독교 경전은 유럽문화에서 최고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법정에서도 법률적 의의를 갖추게 되었다. 기독교 경전의 최고 권위는 중세에도 지속되었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기독교 경전의 최고 권위는 경전에서 나온다는 모토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이성으로 역사의 발전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후부터 기독교 경전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와 부르노 바우어를 들 수 있다.
슈트라우스는 1835년에 『예수전』을 출판하여 『신약성경』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세한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역사학과 언어학의 관점에서 『신약성경』을 부정했다. 인류와 관련된 모든 것이 역사 발전의 산물이며 종교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 일관된 논점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근거로 기독교가 일종의 역사적 현상이며 예수는 신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했다. 또한 예수가 갖가지 초자연적 기적을 행했다는 서술에는 역사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고 사람들이 선택해서 편집한 신화일 따름이며 원시 기독교 집단의 무의식적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슈트라우스를 필두로 한 문예부흥 이후,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기독교 비판은 더 이상 주관적 추론에 머무르지 않고 상세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실증적 결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바우어 역시 기독교를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신의 존재에 회의를 품고 『신약성경』의 역사적 신뢰성과 예수의 존재를 대놓고 부정했다. “복음서의 모든 내용이 역사적 절대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라고 말했으며 또한 “기독교 교의는 유대문화와 그리스문화 그리고 로마문화가 섞여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기독교와 세 문화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로 발전한 맥락을 가장 먼저 연구하여 “필로학파와 그리스 로마의 통속철학인 플라톤학파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기독교 교리를 구성한 주요 요소였으며, 국교가 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기독교는 특히 이들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경전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세계 종교가 되었다. 세계 종교가 발생하려면 사회적, 정치적으로 충분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상응하는 사상과 문화 그리고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때부터 유대인이 하느님의 선민이며 로마 시민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특권주의가 사라지게 되었다. 로마제국 내의 모든 민족이 처음으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모든 민족을 차별 없이 대하는 정신은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가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기독교는 고대 동양인이 믿었던 다신숭배사상을 버리고 유대인의 일신론을 계승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계승하지 못했으므로 삼위일체론에 다신론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류에 대한 구속을 이루었고, 이로써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던 고대의 미신적 요소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또한 주술적 행위 대신 내적 기도를 강조했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규범화하여 모든 사람이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그 후 기독교는 그리스철학에 힘입어 더욱 체계적인 교리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철학은 서양사상의 뿌리였고 교양 있는 로마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그 영향 아래에 있었다. 특히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로마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원시 기독교가 형성될 때 이미 대중 속에 만연하고 있었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와 신비주의가 철학의 종교화 추세를 가속시켰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한 원리로 해석되었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10 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해방을 돕는 하느님의 아들로 해석되었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했다’, ‘그리스도’ 등의 기독교 교의가 로고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금욕주의는 훗날 기독교의 도덕 원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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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눈앞의 이익을 탐하지 마라

 

이득과 손해의 관계를 성어 하나로 간단히 표현하면 ‘당랑포선螳螂捕蟬, 황작재후黄雀在後’ 즉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니 그 뒤에 참새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제격이다. 사실 『장자』에는 황작黃雀이 아니라 이작異雀이라고 쓰여 있다. 이異는 이상하다는 뜻이고, 작雀은 보통 참새를 말한다. 장자가 이렇게 쓴 데에는 실제 그의 경험과 관계가 있다.
장자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벼슬을 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다. 이에 장자는 시비를 잘 가려 위험은 멀리하고 안전하게 자기 몸을 지키라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을 주장했다. 혼자일 때는 상관없지만 처자식이 생기면 그들도 건사해야 하지 않는가? 『장자』에는 낚시를 하러 가거나 새총을 들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한 번은 밤나무밭 근처를 거닐고 있었는데 기이하게 생긴 참새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왔다. 날개를 펼치니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고 눈은 지름이 3센티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새의 날개는 장자의 이마를 스쳐 지나 밤나무 아래에 머물렀다. 이를 본 장자가 의아한 마음이 들어 옷을 걷어 들고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손은 언제든 새총을 당길 준비를 한 채 도대체 무슨 일인지 조용히 지켜보았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 위에
매미 한 마리가 있었다. 매미는 나무 그늘에 앉아 여유롭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사마귀 한 마리가 나뭇잎 그늘에 숨어 호시탐탐 매미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공중에서 이상한 참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고 이 참새는 사마귀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바로 이 참새가 날아가는 도중 날개로 장자의 이마를 쳐서 장자까지 이 기묘한 상황에 휘말리게 한 것이다.
장자는 생각했다. ‘매미 뒤에 있는 사마귀, 사마귀 뒤에 있는 이상한 참새, 이상한 참새 뒤에 있는 사냥꾼인 나, 그럼 내 뒤에도 누가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신이 남의 밤나무밭에 무단으로 침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미처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관리인이 “도둑 잡아라!” 하고 고함치며 쫓아 들어왔다. 이 일은 장자의 생애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장자는 집으로 돌아간 지 사흘이 지나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장자는 왜 그랬던 것일까? 앞서 우리는 망각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아무거나 모두 잊으면 안 된다는 망각의 치명적인 문제점도 함께 거론했다. 그런데 장자는 기이하게 생긴 그 참새에 홀려서 자신의 처지를 잠시 망각했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모든 일은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당신이 어떤 이익을 좇으면 분명히 그 뒤에 더 강력한 누군가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장자는 이익만 보고 덤비다가 머잖아 치르게 될 대가를 예상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다. 장자는 여러 가지 우화로 이와 유사한 경우를 설명했다. 다음 이야기를 보자. 한 제관이 돼지에게 말했다.

 

“너를 석 달 동안 정성껏 키웠다. 지금은 내가 열흘 동안 재계하는 중이다. 열흘이 다 지나면 너를 데리러 오마. 우선 바닥에 띠를 깔고 그 위에 화려한 제사상을 놓은 뒤 너를 올려주마. 이 정도면 만족스럽지 않으냐?”

 

장자가 말했다.

“진정으로 돼지를 생각한다면 더러운 우리에서 지게미나 쌀겨를 먹게 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최소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돼지로서는 분명 소박한 생활을 하더라도 좀 더 오래 살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살아서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기 바라고, 죽을 때도 화려한 장례식을 원한다. 사람은 돼지가 거절하는 화려한 제사상을 오히려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돼지보다 못하다는 뜻인가? 장자의 이 비유는 매우 적절하면서도 날카롭다. 이 이야기로 장자는 눈앞의 이익만을 좇다가는 결국 생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눈앞의 이익을 탐하지 마라.
‥‥‥ 노장의 지혜 ‥‥‥

사마천은『 사기』에서 장자를 이렇게 묘사했다. ‘장자의 학문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말은 곧 장자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었고 각 학파의 사상에 통달했다는 뜻이다. 이렇듯 장자는 비범한 지혜의 소유자였으나 관직이라고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칠원漆園에서 말단 관리를 한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장자는 왜 가난에 시달릴망정 벼슬하기를 거부했을까?

 

 

저자소개: 푸페이룽 傅佩榮
1950년에 태어난 푸페이룽은 타이완대학 철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학 철학박사이다. 타이완대학 철학과 학과장 및 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벨기에대학, 네덜란드 레이던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현재는 타이완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푸페이룽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말솜씨를 가진 교수로, 타이완 『민생보民生報』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교수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 교육부에서 수여하는 우수 교육자상, 『성공한 인생成功人生』으로 타이완 문화예술 분야 국가문예상, 『천론에 대한 유가와 도가의 해석儒道天論發微』으로 중정中正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타이완에서 백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는 등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특히 전통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역경』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으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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