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세계의 종교로 발전한 기독교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6 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통일된 신조와 교회법을 제정하기 위해 325년에 3백 명의 주교들이 참여한 니케아 공의회7 를 소집했다.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모든 크리스천은 반드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을 믿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원시 기독교는 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과 이론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다시금 341년과 346년에 두 차례 칙령을 반포하여 이교 숭배를 금하고 이교도 사원을 강제로 폐쇄했다. 또한 375년에 제국 내의 사원에서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금하고 황제는 더 이상 사원의 최고 제사장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의 위상이 우뚝 선 것이다. 제국을 재통일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2년에 기독교가 유일한 합법 종교라고 규정하는 법을 공표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수백 년 동안 받아온 박해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로마제국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나아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의 종교로 발전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후 기독교 경전은 유럽문화에서 최고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법정에서도 법률적 의의를 갖추게 되었다. 기독교 경전의 최고 권위는 중세에도 지속되었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기독교 경전의 최고 권위는 경전에서 나온다는 모토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이성으로 역사의 발전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후부터 기독교 경전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와 부르노 바우어를 들 수 있다.
슈트라우스는 1835년에 『예수전』을 출판하여 『신약성경』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세한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역사학과 언어학의 관점에서 『신약성경』을 부정했다. 인류와 관련된 모든 것이 역사 발전의 산물이며 종교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 일관된 논점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근거로 기독교가 일종의 역사적 현상이며 예수는 신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했다. 또한 예수가 갖가지 초자연적 기적을 행했다는 서술에는 역사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고 사람들이 선택해서 편집한 신화일 따름이며 원시 기독교 집단의 무의식적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슈트라우스를 필두로 한 문예부흥 이후,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기독교 비판은 더 이상 주관적 추론에 머무르지 않고 상세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실증적 결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바우어 역시 기독교를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신의 존재에 회의를 품고 『신약성경』의 역사적 신뢰성과 예수의 존재를 대놓고 부정했다. “복음서의 모든 내용이 역사적 절대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라고 말했으며 또한 “기독교 교의는 유대문화와 그리스문화 그리고 로마문화가 섞여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기독교와 세 문화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로 발전한 맥락을 가장 먼저 연구하여 “필로학파와 그리스 로마의 통속철학인 플라톤학파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기독교 교리를 구성한 주요 요소였으며, 국교가 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기독교는 특히 이들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경전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세계 종교가 되었다. 세계 종교가 발생하려면 사회적, 정치적으로 충분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상응하는 사상과 문화 그리고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때부터 유대인이 하느님의 선민이며 로마 시민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특권주의가 사라지게 되었다. 로마제국 내의 모든 민족이 처음으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모든 민족을 차별 없이 대하는 정신은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가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기독교는 고대 동양인이 믿었던 다신숭배사상을 버리고 유대인의 일신론을 계승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계승하지 못했으므로 삼위일체론에 다신론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류에 대한 구속을 이루었고, 이로써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던 고대의 미신적 요소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또한 주술적 행위 대신 내적 기도를 강조했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규범화하여 모든 사람이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그 후 기독교는 그리스철학에 힘입어 더욱 체계적인 교리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철학은 서양사상의 뿌리였고 교양 있는 로마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그 영향 아래에 있었다. 특히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로마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원시 기독교가 형성될 때 이미 대중 속에 만연하고 있었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와 신비주의가 철학의 종교화 추세를 가속시켰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한 원리로 해석되었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10 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해방을 돕는 하느님의 아들로 해석되었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했다’, ‘그리스도’ 등의 기독교 교의가 로고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금욕주의는 훗날 기독교의 도덕 원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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