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교황과의 절교를 선언한 마틴 루터

 

루터는 개혁운동의 영도자로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는 독일 광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루터의 부모는 생각이 단순하고 교회의 의식에 구애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부모의 성품을 타고나서 강직하고 과감하며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또한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고 방탕하지 않았다.
루터가 스물한 살 때의 일이다.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다음 날 저녁, 집에서 법학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을 가르며 천둥 번개가 쳤다. 법학생이었던 그는 신에게 살려달라고 빌며, 살려준다면 수도회에 들어가서 신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맹세했다. 두 주 후, 그는 약속을 이행했다. 수도회에서 신학학사 학위를 받은 뒤 신학연구와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면서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어느 날 루터는 수도회를 대표하여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따라 ‘성스러운 계단’을 무릎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렇게 하면 죄 사함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대기에 다다르기 전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성경 말씀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고행을 하면 거룩해진다는
미신을 과감히 버리고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왔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독일 교회에 멋대로 세를 징수하고 성직자의 직분 임명권에 수시로 간여하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그래서 착취당하던 농민과 도시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루터는 교황청이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나무문 앞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고 교황청의 죄상을 폭로했다. 그는 반박문 제62조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이다”를 시발점으로 개혁을 일으켰다. 1520년에는 세 편의 논문을 써서 학술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논문들을 종교개혁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이에 교황은 루터를 교회에서 추방하라고 명했으나 루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사제들을 이끌고 교황의 지시문과 교회의 법전을 불태우며 교황과의 절교를 선언했다.
루터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그가 번역한 문장은 매끄러워 낭독하기에도 좋았다. 1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노력한 결과 『신약성경』을 완역했고, 일생 동안 35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교리를 설명한 책은 대중의 언어로 집필하여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교제로 삼았다. 그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성경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후대를 위해 기독교 복음신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졌다. 그는 독일 작센안할트 주에 있는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병으로 타계했다. 그러나 그가 이끈 종교개혁운동은 독일과 북유럽을 넘어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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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논쟁에 대한 장자의 가르침

 

『장자』에서도 노자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경쟁 구도는 논쟁이라고 했다. 장자에게 혜시라는 친구가 있었다. 혜시는 변론가이자 달변가다. 그래서 그와 논쟁이라도 벌이면 보통사람은 절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 번은 혜시가 달걀 안에 털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헛소리를 한 것일까? 혜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달걀 안에 털이 없다면 부화한 병아리에 왜 털이 있겠는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털 없는 병아리를 본 적이 없으니까. 병아리는 달걀에서 나왔고, 어쩌면 달걀에는 원래부터 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그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라는 요소를 간과했다. 잠재적인 요소가 현실화되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현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결과만을 비교한 것이다. 한마디로 궤변이다. 그러나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들린다. 이번에는 닭의 다리가 세 개라고 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혜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다리가 두 개뿐이라면 나무로 만든 닭이나 죽은 닭은 무슨 수로 걸어 다니지? 그래서 다리가 세 개란 말이지. 세 번째 다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신족神足으로 정신적인 의미의 다리라고 할 수 있지. 즉 닭이 걸을 수 있는 건 신족이 있어서라네.”

상당히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그런데 당신이 그에게 틀렸다고 말한다면 그는 또 다른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변호할 것이다. 분명 혜시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혜시도 장자와 함께 있으면 맥을 못 추었다. 『장자』에 등장하는 혜시는 주로 장자가 하는 이야기 속의 중요한 도구에 불과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장자와 혜시가 교외로 산책하러 갔다. 장자가 다리 위로 올라가 아래를 보니 강에 뱅어 몇 마리가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던 장자가 말했다.

“여기 물고기들은 즐거운 모양이군.”

혜시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변론에서는 늘 열세였는데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혜시가 말했다.


“잠깐! 자네가 물고기도 아닌데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어찌 아나?”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자네도 내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아나?”

혜시가 대답했다.

“그렇지. 난 자네가 아닐세. 그래서 물고기가 즐거운지 아닌지를 자네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네. 그럼 자네도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기분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물고기가 즐거운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는가? 자네는 지금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질문한 것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지 알았느냐고? 이곳에 서서 한 번 보게. 바로 알 수 있다네.”

변론에는 아주 간단한 법칙이 있다. 바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이 지는 것이다. 혜시가 대답을 하지 못했으니 승부는 결정됐다. 혜시가 졌다! 사실 장자가 졌다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장자』에 실렸겠는가. 아주 쉬운 이치가 아닌가. 그러나 이 이야기를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혜시는 왜 졌을까?

최초로 『장자』 주석본을 쓴 곽상郭象은 장자가 세상 만물을 모두 이해했기 때문에 이겼다고 했다. ‘나는 본래 사람이지만, 물속에서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나의 감정을 물고기에 이입시킨다. 내가 물고기였다면 분명 즐거웠을 것이다.’ 장자가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곽상의 논리다. 그 후 천여 년 동안 학자들은 장자가 마음이 넓어서 세상 만물을 이해했고, 그래서 혜시가 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마땅히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두 사람이 논쟁을 하는 가운데 한쪽이 자신은 그것을 이해한다며 논거로 삼으려 한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당신과 논쟁을 하는 가운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고 말하면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까? 그렇지 않다. 그러니 혜시처럼 뛰어난 말솜씨의 소유자를 항복하게 만들려면 그의 말이 모순이라는 증거만 찾아서 보여주면 된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모순일까? 처음에 장자가 물고기가 지금 즐겁다고 했을 때 혜시는 장자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사실을 안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혜시는 나중에 다시 자신은 장자가 아니므로 자네가 물고기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고 했다. 앞에서는 안다고 했다가 뒤에서는 또 모른다고 했으니 서로 모순이다. 사실 논리적 관점에서 보면 혜시는 장자에게 속은 것에 불과하다. 즉 그는 장자와 나눈 두세 마디로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풀어 설명하고 나니 사실 이 문제는 매우 단순한 논리 문제일 뿐이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진다. 두 사람이 논쟁을 하는데 이해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오랫동안 학자들은 한 학설만을 굳게 믿어왔지만 아마도 내 분석을 거치면 새로운 해석도 가능해진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다를 때 흔히들 쉽게 서로 대화를 해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줄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장자는 「제물론편」에서 아주 생생하고 재미있게 이를 묘사했다. 만약 당신이 나와 논쟁을 하는데 당신이 이겼다고 해보자. 그럼 내 말은 틀렸을까?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이겼다고 해보자. 그럼 당신 의견은 틀린 것일까? 우리 모두 맞거나, 우리 모두 틀릴 수는 없을까? 이런 식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판을 찾도록하자. 심판은 공정해야 하므로 당신 의견에 찬성한다면 심판의 자격이 없다. 내 의견에 찬성해도 마찬가지다. 또한 심판이 우리 둘 모두의 의견에 찬성해도 실격이다. 둘의 의견에 다 찬성한다면 심판을 찾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반대로 둘의 의견에 다 반대했다면 이 역시도 자격 미달이다. 아무래도 당신 혹은 나 혹은 제삼자 그 누구도 누가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없나 보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말장난 같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결국 두 사람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을 때 어느 누구도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은 저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격투를 앞둔 무사 두 명이 방패 하나를 보고는 한 명은 그 방패가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다른 한 명은 은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방패는 두 가지 색을 지니고 있었다. 한쪽은 금색이고 다른 한쪽은 은색이었다. 결론적으로 둘 다 맞았다. 『장자』에 나오는 ‘양행兩行’이 바로 누가 맞고 누가 그른 것이 아니라 둘 다 맞다는 뜻이다. 사실 논쟁을 벌이다 보면 둘 다 맞는 경우도 있고, 둘 다 틀린 경우도 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이 사람이 옳았으나 다른 상황에서는 저 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논쟁을 벌일 때 이 점에 늘 유의해야 한다.


 

옳고 그름은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영원하지 않다.
‥‥‥ 노장의 지혜 ‥‥‥

 

경쟁하지 않고도 이기는 지혜

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은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며 절대 굽히지 않았다. 장자는 「제물론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 만물은 전부 달라 보이지만 근본을 따져 보면 사실 하나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비란 인간이 어느 한 각도에서 본 상대적인 결론이어서 영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논쟁을 벌여 시비를 가리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주장하는 ‘무경쟁[無爭]’사상의 기초다. 그 밖에 장자는 무경쟁과 더불어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불쟁이승不爭而勝’이라는 의외의 수확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일까?

 

 

저자소개: 푸페이룽 傅佩榮
1950년에 태어난 푸페이룽은 타이완대학 철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학 철학박사이다. 타이완대학 철학과 학과장 및 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벨기에대학, 네덜란드 레이던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현재는 타이완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푸페이룽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말솜씨를 가진 교수로, 타이완 『민생보民生報』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교수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 교육부에서 수여하는 우수 교육자상, 『성공한 인생成功人生』으로 타이완 문화예술 분야 국가문예상, 『천론에 대한 유가와 도가의 해석儒道天論發微』으로 중정中正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타이완에서 백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는 등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특히 전통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역경』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으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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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시간의 흐름과 공명하는 법

 

관찰

당신이 그린 미래의 삶은 부정적인가? 당신이 창조하고 기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몇 시간이나 상상하고 있는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거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이루고 나면 어떨지 상상해보라. 그때 뉴스에 뭐라고 나올지 생각해보라.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관찰해보라.

이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때 자신의 과거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전문 심리 상담을 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객관적인 관찰자에게 당신의 경험과 선택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그들은 당신이 부끄러움과 분노, 슬픔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용서하라. 그래야 지나간 일들에서 긍정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사람이나 장소에 대해 생각해보라. 소위 말하는 우연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삶의 패턴을 깨우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업과 직면하여 그것을 풀 수도 있다. (과거의 의미심장한 일들을 돌아보다가) 장래 희망을 생각해볼 기회가 있다면, 시간을 내어 일기장에 그것을 기록해보라.

 

기도

당신과 당신이 속한 단체의 과거의 업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하라. 자아의 저항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 오래전 당신의 조상들이나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저지른 일을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현재 당신의 모습은 그들이 행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직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일은 당신의 몫이기도 한 것이다. 당신의 조상들도 당신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이 저지른 나쁜 업을 풀 수 있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들과 신에게 길을 보여달라고 청하면, 전체를 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도하라. 모든 이들을 최선의 미래로 이끌어달라고 기도하라. 또한 상황이 어려울 때는 삶의 순리를 깨우치고 더 나은 날을 맞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당신의 안녕을 보장하는 신호와 함께 보다 나은 미래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라. 그리고 꿈이나 상황, 사람이나 사건들에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낀다면,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보라. 신은 당신이 경험해야 할 대상을 통해 상징적인 메시지나 뜻을 전달한다.

 

행동

꿈 게시판을 만들어보라. 게시판이나 액자 혹은 컴퓨터에다 그림이나 단어를 가지고 당신이 상상하는 미래를 시각적으로 구상해보라. 매일 약간의 시간을 들여 이미지와 글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미래를 그려보며, 열정과 희망, 만족과 그 밖의 긍정적 감정을 느껴보라.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당신 자신과 오래전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라. 자신의 가족과 종교 그리고 나라에 대해 공부하라. 역사책을 읽거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도 좋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나이 많은 친척들에게 그들의 성장기와 유년기에 대해 들어보라.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당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의 생각과 인식 그리고 느낌에 대해 고민해보라. 비록 부끄러움과 슬픔, 좌절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더라도 그 생각과 느낌들을 받아들이자. 자신의 지난 일들을 잘 되새겨서, 공포나 무지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해보자. 사랑과 용서의 태도로 과거를 대하다 보면, 현재의 삶이 평화와 활력으로 넘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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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개가 우리보다 행복한가

 

개가 노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개는 무엇이든 즐긴다. 먹이와 물을 주면 기뻐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귀 뒤를 긁어주면 행복해한다. ‘산책’이란 말만 들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개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행복한 것 같다. 반면 우리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의 뇌는 크기 때문에 사용하는 데 신진대사의 3분의 1이나 사용해야 한다. 뇌는 우리가 생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딱딱한 두개골에 싸여 있다. 우리는 이 큰 뇌로 숫자와 단어, 생각과 은유 같은 상징들을 만들어내며, 이런 상징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로 여기므로 때때로 놀라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지만 이런 상징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망각하면 피해가 그치지 않는다. 상징들을 실재로 간주하는 성향 때문에 누가 특정한 말을 하거나 특정한 행동을 취하면 우리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슬픔, 화, 부끄러움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이 일어나며, 때로는 너무 속상해서 그런 감정이 몇 시간 혹은 며칠간이나 지속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마음속으로 동일한 상징들로 되풀이되면서 지속된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다니. 그녀가 내게 그렇게 대하다니. 그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가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우리는 논리적인 반론과 응수를 생각해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런 시도는 상황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며 우리를 더 깊은 덫에 빠뜨린다. 우리가 상징과 실재를 혼동할 때 우리의 고통과 불행은 더 커질 것이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붓다의 면전에서 욕을 해댔다. 붓다가 가만히 있자 그 사람은 대꾸도 하지 않는다고 더욱 열을 내며 욕을 퍼부었다. 마침내 그 사람은 제풀에 지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훗날 제자들이 그런 지독한 모욕에도 어떻게 침착할 수 있었는지 붓다에게 물었다. 붓다는 “선물을 받지 않으면 그것을 준 사람이 도로 가져가야 한다” 하고 말했다. 붓다는 그 사람이 사용한 상징과 말에 화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욕설은 소리였을 뿐이다. 소리는 바람처럼 스쳐지나갈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상징들을 조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관해서 생각하게 된다.
과거나 미래에 관해서 생각하는 건 일종의 상징적 과정이다. 이는 물론 과거를 돌이켜보고 이해하거나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미래를 예측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과거나 미래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물을 움켜쥐려는 것과 같다. 삶 자체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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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깨우침을 얻게 된다면

 

불완전성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것은 주로 우리 자신, 즉 현재 우리와 우리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지고지순한 열망조차도 현재의 순간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된다. 우리는 마음을 다스려 흠 없이 완전하고 진실한 상태에 이르게 될 때에 모든 것이 좋아지고 정말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함에 대한 추구는 화를 잠재적으로 키우는 원인이 되어 언행에서 드러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만과 근심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깨우침이 이런 개념의 궁극적 형태가 된다. 하지만 깨우침을 포함하여 이런 모든 개념은 마음을 열고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이며 의식하고 살아 있는 우리의 능력을 떨어뜨리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붓다는 자신의 깨우침에 대해 심오한 말을 남겼다.


 

나는 월등하고 완전한 깨우침에서 아무것도 얻은 바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월등하고 완전한 깨우침’이라고 한다. (Watts 1957, 45)


 

대단히 놀라운 말이다. 붓다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의 뜻을 헤아려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붓다는 깨우침이란 하나의 아이디어나 개념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가 알기를 바랐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깨우침이란 아이디어는 단지 아이디어일 뿐 실재와는 거리가 멀다. 불교에서 깨우침을 얻은 사람의 경지를 열반이라고 하며 이는 ‘절멸’을 의미한다. 우리 존재의 절멸이 아니라 우리 고통의 절멸을 의미한다. 사물의 경이로운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개념과 생각의 절멸을 의미한다. 이것을 붓다는 ‘본질(진여眞如)’이라고 했다.
심리적인 완전함과 웰빙이란 개념도 우리에게 방해물이 될 수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슬픈 생각과 감정을 지워버리려다가 더 깊은 슬픔에 사로잡힌다. 슬픈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데 사로잡혀 슬픈 생각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슬픈 생각을 모두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이다. 이것은 실패했다는 감정을 부추겨 오히려 더 슬퍼지고 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깨우침에서 아무것도 얻은 바 없다는 붓다의 말은 깨우침이 다른 경험의 영역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산스크리트어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 스바하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는 『반야심경Heart Sutra』의 구절로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가자, 아 깨우침이여!”란 의미다.(틱낫한, 1988, 2) 이런 의식은 강 너머로 간다는 뜻으로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깨우침이란 개인의 목표나 꿈을 비롯한 우리의 조건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다. 우리의 목표와 꿈이 훌륭하고 건전하며 합리적일지라도, 이것들에는 현재의 순간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 깨우침, 행복 혹은 완전함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다른 세속적인 목표에 집중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더 좋지 않다.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선善이 더 위험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행복 사이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끼워 넣는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다그치면서 지나치게 무리하고 애쓴다. 찾는 것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무리한 노력은 평화에 반하고 그렇기 때문에 깨우침에도 반한다.
붓다는 깨우침을 다른 목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목표로 삼거나, 가장 정제된 개념조차도 하나의 개념임을 알지 못한 채 취한다면, 우리가 그 덫에 걸린다고 가르쳤다. 깨우침은 목표가 아니다. 깨우침은 불교에서 말하는 ‘목표 없음’ 또는 ‘목적 없음’(무원無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좀 더 현존하는 것이며, 욕망이나 혐오로 왜곡하지 않는 가운데 대상 그 자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다. 행복을 위해 마음챙김을 수행하지 마라. 붓다가 되려고 하지 마라.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와서 우리의 불성이 빛을 내도록 하라. 이미 와 있는 행복에 다가가라. 얻는 것이 아니다. 붓다는 완전한 깨우침에서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완전한 깨우침은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한 깨우침은 분명 깨우침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획득하는 일이 아니다. 열반은 얻고 잃음의 영역 밖에 있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도 아니다. 이력서에 써 넣을 수도 없다. 이런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순히 현재의 순간을 늘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염원하는 모습이 현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염원하는 순간 우리는 서서히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되고자 하는 모습이 그 순간에 이미 실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인본주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이를 잘 설명했다.


인간은 현재의 자신인 동시에 염원하는 미래의 자신이기도 하다.(Maslow 1968, 160)


 

불교에서는 이를 우리 안에 불성이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따라서 영적 수행이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며 우리 자신을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나아가면서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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