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논쟁에 대한 장자의 가르침
『장자』에서도 노자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경쟁 구도는 논쟁이라고 했다. 장자에게 혜시라는 친구가 있었다. 혜시는 변론가이자 달변가다. 그래서 그와 논쟁이라도 벌이면 보통사람은 절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 번은 혜시가 달걀 안에 털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헛소리를 한 것일까? 혜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달걀 안에 털이 없다면 부화한 병아리에 왜 털이 있겠는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털 없는 병아리를 본 적이 없으니까. 병아리는 달걀에서 나왔고, 어쩌면 달걀에는 원래부터 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그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라는 요소를 간과했다. 잠재적인 요소가 현실화되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현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결과만을 비교한 것이다. 한마디로 궤변이다. 그러나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들린다. 이번에는 닭의 다리가 세 개라고 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혜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다리가 두 개뿐이라면 나무로 만든 닭이나 죽은 닭은 무슨 수로 걸어 다니지? 그래서 다리가 세 개란 말이지. 세 번째 다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신족神足으로 정신적인 의미의 다리라고 할 수 있지. 즉 닭이 걸을 수 있는 건 신족이 있어서라네.”
상당히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그런데 당신이 그에게 틀렸다고 말한다면 그는 또 다른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변호할 것이다. 분명 혜시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혜시도 장자와 함께 있으면 맥을 못 추었다. 『장자』에 등장하는 혜시는 주로 장자가 하는 이야기 속의 중요한 도구에 불과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장자와 혜시가 교외로 산책하러 갔다. 장자가 다리 위로 올라가 아래를 보니 강에 뱅어 몇 마리가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던 장자가 말했다.
“여기 물고기들은 즐거운 모양이군.”
혜시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변론에서는 늘 열세였는데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혜시가 말했다.
“잠깐! 자네가 물고기도 아닌데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어찌 아나?”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자네도 내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아나?”
혜시가 대답했다.
“그렇지. 난 자네가 아닐세. 그래서 물고기가 즐거운지 아닌지를 자네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네. 그럼 자네도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기분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물고기가 즐거운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는가? 자네는 지금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질문한 것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지 알았느냐고? 이곳에 서서 한 번 보게. 바로 알 수 있다네.”
변론에는 아주 간단한 법칙이 있다. 바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이 지는 것이다. 혜시가 대답을 하지 못했으니 승부는 결정됐다. 혜시가 졌다! 사실 장자가 졌다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장자』에 실렸겠는가. 아주 쉬운 이치가 아닌가. 그러나 이 이야기를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혜시는 왜 졌을까?
최초로 『장자』 주석본을 쓴 곽상郭象은 장자가 세상 만물을 모두 이해했기 때문에 이겼다고 했다. ‘나는 본래 사람이지만, 물속에서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나의 감정을 물고기에 이입시킨다. 내가 물고기였다면 분명 즐거웠을 것이다.’ 장자가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곽상의 논리다. 그 후 천여 년 동안 학자들은 장자가 마음이 넓어서 세상 만물을 이해했고, 그래서 혜시가 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마땅히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두 사람이 논쟁을 하는 가운데 한쪽이 자신은 그것을 이해한다며 논거로 삼으려 한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당신과 논쟁을 하는 가운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고 말하면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까? 그렇지 않다. 그러니 혜시처럼 뛰어난 말솜씨의 소유자를 항복하게 만들려면 그의 말이 모순이라는 증거만 찾아서 보여주면 된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모순일까? 처음에 장자가 물고기가 지금 즐겁다고 했을 때 혜시는 장자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사실을 안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혜시는 나중에 다시 자신은 장자가 아니므로 자네가 물고기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고 했다. 앞에서는 안다고 했다가 뒤에서는 또 모른다고 했으니 서로 모순이다. 사실 논리적 관점에서 보면 혜시는 장자에게 속은 것에 불과하다. 즉 그는 장자와 나눈 두세 마디로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풀어 설명하고 나니 사실 이 문제는 매우 단순한 논리 문제일 뿐이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진다. 두 사람이 논쟁을 하는데 이해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오랫동안 학자들은 한 학설만을 굳게 믿어왔지만 아마도 내 분석을 거치면 새로운 해석도 가능해진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다를 때 흔히들 쉽게 서로 대화를 해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줄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장자는 「제물론편」에서 아주 생생하고 재미있게 이를 묘사했다. 만약 당신이 나와 논쟁을 하는데 당신이 이겼다고 해보자. 그럼 내 말은 틀렸을까?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이겼다고 해보자. 그럼 당신 의견은 틀린 것일까? 우리 모두 맞거나, 우리 모두 틀릴 수는 없을까? 이런 식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판을 찾도록하자. 심판은 공정해야 하므로 당신 의견에 찬성한다면 심판의 자격이 없다. 내 의견에 찬성해도 마찬가지다. 또한 심판이 우리 둘 모두의 의견에 찬성해도 실격이다. 둘의 의견에 다 찬성한다면 심판을 찾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반대로 둘의 의견에 다 반대했다면 이 역시도 자격 미달이다. 아무래도 당신 혹은 나 혹은 제삼자 그 누구도 누가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없나 보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말장난 같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결국 두 사람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을 때 어느 누구도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은 저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격투를 앞둔 무사 두 명이 방패 하나를 보고는 한 명은 그 방패가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다른 한 명은 은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방패는 두 가지 색을 지니고 있었다. 한쪽은 금색이고 다른 한쪽은 은색이었다. 결론적으로 둘 다 맞았다. 『장자』에 나오는 ‘양행兩行’이 바로 누가 맞고 누가 그른 것이 아니라 둘 다 맞다는 뜻이다. 사실 논쟁을 벌이다 보면 둘 다 맞는 경우도 있고, 둘 다 틀린 경우도 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이 사람이 옳았으나 다른 상황에서는 저 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논쟁을 벌일 때 이 점에 늘 유의해야 한다.
옳고 그름은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영원하지 않다.
‥‥‥ 노장의 지혜 ‥‥‥
경쟁하지 않고도 이기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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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은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며 절대 굽히지 않았다. 장자는 「제물론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 만물은 전부 달라 보이지만 근본을 따져 보면 사실 하나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비란 인간이 어느 한 각도에서 본 상대적인 결론이어서 영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논쟁을 벌여 시비를 가리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주장하는 ‘무경쟁[無爭]’사상의 기초다. 그 밖에 장자는 무경쟁과 더불어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불쟁이승不爭而勝’이라는 의외의 수확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일까?
저자소개: 푸페이룽 傅佩榮
1950년에 태어난 푸페이룽은 타이완대학 철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학 철학박사이다. 타이완대학 철학과 학과장 및 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벨기에대학, 네덜란드 레이던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현재는 타이완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푸페이룽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말솜씨를 가진 교수로, 타이완 『민생보民生報』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교수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 교육부에서 수여하는 우수 교육자상, 『성공한 인생成功人生』으로 타이완 문화예술 분야 국가문예상, 『천론에 대한 유가와 도가의 해석儒道天論發微』으로 중정中正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타이완에서 백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는 등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특히 전통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역경』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으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