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호를 만족하게 해주는 견해는 쾌락주의를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벤담은 행복을 단순히 쾌락이라는 느낌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쾌락이란 느낌을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느낌 자체는 경험적 세계의 일부임이 틀림없다. 쾌락과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개략적인 지식쯤은 이미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나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알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의 총량을 최대화하는 행위의 대안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다. 벤담은 여러 기준들을 한데 묶어 일종의 쾌락 계산법을 내놓고, 이것으로 전반적인 쾌락의 최댓값을 산출하려 했다. 그러나 벤담은 이에 대한 비평에 부딪혀 계량화할 수 있는 행복의 개념을 내놓아야만 하는 처지로 몰렸다. 그 비평에 따르면, 행복을 계량화할 수 있다면 행복이 왜 도덕적으로 중요한지, 아니면 행복만이 왜 도덕적으로 중요한지를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밀은 이런 비평에 답하려고 쾌락을 ‘더 고상한’ 것과 ‘더 비천한’ 것으로 구분하는 유명한 논리를 발전시켰다. 벤담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여 행복을 측정하려다가 고작 ‘돼지들에게나 들어맞을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평을 사고 만다. 벤담식의 공리주의가 통하려면 사람들이 돼지에 훨씬 더 가까운 존재가 되어, 이상을 추구하기보다는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시를 읽을 것이 아니라, 단추를 누르며 즐거워하는 어린이 게임에 빠져드는 식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하나의 이상향이 아니라 헉슬리의『멋진 신세계』16에서처럼, 하나의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쾌락을 측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좋은 삶에서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또 그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또한 아니다. 이 대목에서 밀은 양쪽의 주장에 다 같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행복이 곧 쾌락이라는 벤담의 말은 옳다. 하지만 어떤 삶의 방식이 다른 삶의 방식에 비해 더 ‘고상하다’는 비평 역시 옳다는 것이다.
밀은 쾌락에 관한 한 하나의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은 다른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비평에 동의한다. 어떤 삶의 방식은 비단 더 많은 쾌락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종류의 쾌락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 나은 종류의 쾌락이란 말은 다시금 평가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한 평가적 판단이 어떻게 실질적인 단 하나의 경험적 판단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언제나 경험적 판단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오늘의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이 쾌락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더는 내놓지 않으려 한다.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행복의 개념은 선호에 대한 만족이다. 달리 말하자면, 바라는 것을 더 많이 얻을수록(다시 말해서, 선호를 충족할수록) 더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선호는 다른 것에 비해 더 강력할 수 있어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 그만큼 더 이바지할 것이다. 선호를 만족하게 해주는 견해는 쾌락주의를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이 견해는 인간이 비단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다른 것들도 (그리고 비단 그것들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만이 아닌 다른 것들도) 함께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참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선호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행위를 관찰하거나 아니면(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선호를 충족하려 하며 그 우선순위를 자신들의 행위로 나타낸다는 가정 아래) 사람들에게 무엇을 선호하는지 직접 물어보는 방
법으로 가능하다. 그런데도 바라는 것을 얻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해지는지 또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허용하는 것만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일인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람들은 더러 어떤 것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얻으려 하며 그것을 얻게 되면 실제보다 더 좋을 것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더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더러는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을 추구하면서 정작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에게서 멀어지는 경우 또한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실상은 가치 없는 것들인데, 그것을 마련한다고 세상이 더 좋아질까? 그러므로 선호를 만족하게 해주는 일만이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며, 논쟁의 여지없이 분명한 방법도 아니다. 그렇지만 행복이란 것을 경험적으로 파악하지 않는 한, 때때로 공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내놓는 반직관적인 결론들을 변호하기 위해 자연주의에 의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