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지하드에서 지하드운동까지

 

 

 

 

 

 

 

 

 

전통 지하드는 이슬람 제국을 비롯하여, 모든 무슬림 지도자의 권위로 칼리프가 상징적으로 이끌던 전쟁이었다. 칼리프는 국가의 수장이었고 그가 이끄는 성전은 전술과 정당한 목표에16 따른 규정에 종속되었다. 지하드운동은 전통 지하드를 재해석한 것으로 이슬람주의가 이슬람교를 정치적으로 변조한 것과 이치가 같다. 이는 약탈을 일삼는 독불장군의 테러가 아니라 다양한 “비정규전” 을 일컫는다.17 이처럼 이례적인 양상의 성전은 예전에 수용된 규정이나 목표의 제약에 아랑곳하지 않는 비국가 주동세력이 감행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를 둘러싼 이슬람교의 분열 또한 지하드운동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같은 신개념 전쟁에 관한 연구는 마르틴 반 크레벨트의 「저강도전쟁low intensitywar」과 「제3의 전쟁war of the third kind」에서 입증한 칼레비 홀스티의 이론을 참고하도록 하겠다. 지하드운동의 전쟁은 박해자에 맞선 피박해자의 정당한 전쟁의 성격을 띤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도 이슬람주의자들의 이념의 전쟁(하릅 알아프카르)과 흡사한 방법으로 폭력을 선전에 이용했다.
지하드운동 전쟁은, 헤들리 불이 한때 “서방세계에 대한 반란” 이라고 말한 점을 분명하게 역설한다. 즉 서방세계의 패권에 대항할 뿐 아니라 문화적 차원도 감안하여 국제 시스템에 의존하는 베스트팔렌식 세속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가치관”도 배격한다는 것이다. 1648년 두 번 체결된 베스트팔렌 평화협정은 국가의 주권을 인정하고 (크리스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며 다른 국가의 종교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의한 것인데, 이를 세속주의라는 점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강력히 거부한다. 그들은 신앙과 문화적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정치화된 이데올로기로서 종교를 세계정치에 다시 주입하려고 했다.
이 같은 반란은 비국가 주동세력의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자들은 범죄자가 아니라 자칭 전사들이며, 폭력을 지향하는 점을 두고는 마크 위르겐스마이어가 지하드운동 관련 서적에 붙인 제목처럼 “종교와 테러”라고 간주한다. 이슬람주의는 종교화된 정치인 반면, 지하드운동은 종교화된 전쟁을 일컫는다. 전통적인 “종교 전쟁”이나 종교를 둘러싼 유럽식 전쟁의 의미가 아니라 종교의 귀환이라는 의미, 즉 종교적 맥락에서 보는 전쟁의 선포와 정당성에서 이를 뜻하는 것이다. 지하드운동은 “글로벌 지하드” 를 가리키는 거룩한 전쟁으로 폭력은 하나의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예컨대, 헤즈볼라는 2006년 7, 8월에 치른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거룩한 승리” 로 규정했는데 헤즈볼라의 지하디스트는 저명한 전쟁학자가 주요 국제안보회의에서 지적한 바와는 달리, “범죄자”가 아니라 죄의 세상과 서양의 악습을 정화함으로써 의무태만을 준행하는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폭력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규정을 존중하지 않는 성향—예컨대, 헤즈볼라는 레바논 남부 사람들을 방패로 삼아 숱한 민간인이 사망하고 말았다— 은 신성한 전쟁의 위상에서 태동한 것이다. 이처럼 중차대한 상황에 국제회의가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또 다른 아젠다에는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에 충성하는 군인을 징집하기 위해 젊은 무슬림에게 독트린을 심어주고 급진주의로 세뇌시키는 것도 있는데, 이는 전체주의 조직의 공통적 특징이다. 이슬람 제국의 정의로운 전쟁(푸투하트)에 대한 집단기억과 지하드를 방어로 보는 전통적인 입장은 이슬람주의 조직이 “포위된 이슬람교” 라는 명목으로 재현해냈다. 때문에 방어의 일환으로 벌이는 비정규전은 세계 어디에서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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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지하드

 

 

 

 

 

 

지하드의 역사는 610년 이슬람 혁명의 발단이 되는 메카가 아니라, 622년 메디나에 확립된 새로운 이슬람 조직체— 현대 이슬람주의자들은 꾸며낸 전통에서 이 조직을 “이슬람국가” 로 승화시켰다— 에서 출발한다. 이슬람 절기상, 무함마드가 이주한 헤지라(무함마드가 메카로 이주함)가 원년이다. 622년과 632년— 무함마드 타계의 여파로— 이후 평화적인 포교활동과 무역 및 성전이 결합된 신흥 종교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중동에 본거지를 둔 여러 이슬람 제국들이 북아프리카와 인도 아대륙, 이베리아 반도 및 발칸반도를 장악하자 무슬림은 지하드에 굴복한 이교도에 비해 자신이 우월하다
는 확신을 느끼게 되었다. 이처럼 제국은 성전을 통해 7~17세기까지 확산되었다.
중세의 이슬람 율법사들(파키)이 비무슬림을 상대하는 경우는 비무슬림의 문화가 위협이 될 것으로 여겨질 때뿐이었다.15 예컨대 개종하거나 유일신을 믿는 소수집단(딤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의 집” 으로 규정되었다. 율법사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종교적 권위를 겸비한 지식인이기도 했으므로 이슬람교에서 유력한 여론 주도자로 추앙받았다. 권위를 인정받은 율법사들은 이슬람교가 쇠퇴할 경우에만 대립을 잠시 중단했다. 신도들에게 이슬람교는 대개 전 인류를 위한 종교적 사명으로 비쳐졌다.즉 무슬림은 종교적으로 이슬람교 신앙을 세계에 전파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코란 34장 38절에도 “우리는 너희를 모든 민족에게 파송했다” 는 대목이 나온다. 무슬림은 이슬람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을 물리적 투쟁이 아니라 코란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으로 믿는다. 폭력은 이를 저항하는 자를 굴복시킬 때에만 사용하나, 이 또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원수에 대한 방어로 간주한다. 비무슬림이 순순히 복종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불신자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해야 하며, 비무슬림이 개종이나 복종을 통해 교화(다와)의 부름에 순응한다면, 어디까지나 이교도의 잘못으로 비롯된 폭력은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니까 평화롭게 살려면 비무슬림이 유일신을 믿는 소수집단을 인정하여 세금을 바쳐야만 한다는 말이다. 결국, 교화의 최종 단계인 세계평화는 전 인류가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그에 복종해야 실현될 수 있으므로 교화의 사전적 뜻을 “초대” 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지하드를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야만 초대에 불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슬람교 신앙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데 의존하는 것은 전쟁harb(하릅)— 비무슬림이 무력을 쓸 때에만 언급되는 용어— 이 아니라 지하드다. 즉 이슬람교의 정복 전쟁은 하릅이 아니라 개방이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세계에 이슬람교의 입구를 개방한 것이며, 지하드는 개방을 넓히려는 수단인 셈이다. 독트린과 역사를 감안해볼 때, 평화의 집(다르 알이슬람)과 전쟁의 집(다르 알하릅)의 관계는 전시상황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슬림은 종교적 의무이자 이슬람교의 사명에 저항하는 세력을 끊는 방어 전쟁으로 지하드를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수긍할 수 없는 데다 비논리적인 신념을 개혁하려는 용기를 가진 무슬림은 여태 본 적이 없다. 비무슬림에 평화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슬람교의 독트린과 더불어 불신자에게는 일시적인 평화hudna(후드나)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도 일러둔다. 일시적인 평화는 전쟁과 평화의 중간 상태로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를 일컫는 조건이기도 하다. 즉 무슬림과 비무슬림 열강의 조약은 “일시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일시적인 평화에 대한 이슬람 율법사들의 시간 개념은 우리와는 좀 다르다. 권위자의 논평에 따르면, 일시적인 평화의 기간은 평균 10년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슬람세계를 연구하는 유대인들은 1979년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체결된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이 만료되는 시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유럽의 정당한 전쟁과 그렇지 않은 전쟁(이슬람의 법률학 독트린과는 동떨어진 개념)의 차이를 이슬람교의 전통에 적용하자면, 무슬림이 이슬람교의 전파를 위해 감행하는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 되고, 비무슬림이 무슬림을 공격하거나 지하드에 저항한다면 이는 부정한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전쟁 개념을 지하드에 적용하는 것은 무슬림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서방세계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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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호를 만족하게 해주는 견해는 쾌락주의를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벤담은 행복을 단순히 쾌락이라는 느낌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쾌락이란 느낌을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느낌 자체는 경험적 세계의 일부임이 틀림없다. 쾌락과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개략적인 지식쯤은 이미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나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알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의 총량을 최대화하는 행위의 대안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다. 벤담은 여러 기준들을 한데 묶어 일종의 쾌락 계산법을 내놓고, 이것으로 전반적인 쾌락의 최댓값을 산출하려 했다. 그러나 벤담은 이에 대한 비평에 부딪혀 계량화할 수 있는 행복의 개념을 내놓아야만 하는 처지로 몰렸다. 그 비평에 따르면, 행복을 계량화할 수 있다면 행복이 왜 도덕적으로 중요한지, 아니면 행복만이 왜 도덕적으로 중요한지를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밀은 이런 비평에 답하려고 쾌락을 ‘더 고상한’ 것과 ‘더 비천한’ 것으로 구분하는 유명한 논리를 발전시켰다. 벤담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여 행복을 측정하려다가 고작 ‘돼지들에게나 들어맞을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평을 사고 만다. 벤담식의 공리주의가 통하려면 사람들이 돼지에 훨씬 더 가까운 존재가 되어, 이상을 추구하기보다는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시를 읽을 것이 아니라, 단추를 누르며 즐거워하는 어린이 게임에 빠져드는 식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하나의 이상향이 아니라 헉슬리의『멋진 신세계』16에서처럼, 하나의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쾌락을 측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좋은 삶에서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또 그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또한 아니다. 이 대목에서 밀은 양쪽의 주장에 다 같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행복이 곧 쾌락이라는 벤담의 말은 옳다. 하지만 어떤 삶의 방식이 다른 삶의 방식에 비해 더 ‘고상하다’는 비평 역시 옳다는 것이다.
밀은 쾌락에 관한 한 하나의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은 다른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비평에 동의한다. 어떤 삶의 방식은 비단 더 많은 쾌락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종류의 쾌락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 나은 종류의 쾌락이란 말은 다시금 평가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한 평가적 판단이 어떻게 실질적인 단 하나의 경험적 판단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언제나 경험적 판단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오늘의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이 쾌락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더는 내놓지 않으려 한다.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행복의 개념은 선호에 대한 만족이다. 달리 말하자면, 바라는 것을 더 많이 얻을수록(다시 말해서, 선호를 충족할수록) 더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선호는 다른 것에 비해 더 강력할 수 있어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 그만큼 더 이바지할 것이다. 선호를 만족하게 해주는 견해는 쾌락주의를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이 견해는 인간이 비단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다른 것들도 (그리고 비단 그것들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만이 아닌 다른 것들도) 함께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참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선호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행위를 관찰하거나 아니면(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선호를 충족하려 하며 그 우선순위를 자신들의 행위로 나타낸다는 가정 아래) 사람들에게 무엇을 선호하는지 직접 물어보는 방
법으로 가능하다. 그런데도 바라는 것을 얻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해지는지 또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허용하는 것만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일인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람들은 더러 어떤 것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얻으려 하며 그것을 얻게 되면 실제보다 더 좋을 것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더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더러는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을 추구하면서 정작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에게서 멀어지는 경우 또한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실상은 가치 없는 것들인데, 그것을 마련한다고 세상이 더 좋아질까? 그러므로 선호를 만족하게 해주는 일만이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며, 논쟁의 여지없이 분명한 방법도 아니다. 그렇지만 행복이란 것을 경험적으로 파악하지 않는 한, 때때로 공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내놓는 반직관적인 결론들을 변호하기 위해 자연주의에 의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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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대서사시: 아리아인의 침략

 

 

 

 

 

 

 

아리아인은 머리카락 한 오라기까지 불태워버리는 잔인한 파괴자였다. 비록 그들이 세정의식・요가・모신 숭배사상 같은 인더스 문명의 여러 요소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들의 정복상이 얼마나 모골이 송연했는지는 『리그 베다』에서 불의 신 아그니를 찬미하는 대목에 나타나 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자신들이 가진 것을 모두 뒤로한 채 도망치기 바빴다. 바이슈바나라Vaisvanara
(아그니의 다른 명칭)가 모든 것을 불태워 파괴된 도시 가운데서 밝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아인이 인더스 계곡을 침략한 건 기원전 1750~1500년경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리그 베다』라 불리는 브라만교의 찬가 경전이 집대성된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다. 그동안 민족 간의 관계 변화가 이 경전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스유스Dasyus는 아리아인의 침략 이전에 원래 인도 북서부에 살던 드라비다인Dravidian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리그 베다』에서는 이 다스유스란 단어가 인드라 신과 끝나지 않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아수라Asuras 일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아리아인은 다스유스를 ‘노예’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했다. 이런 용어의 변천은 아리아인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부터 인더스 계곡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언어학자들의 연구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영국의 인도 통치 시대인 1786년 영국인 판사였던 윌리엄 존스 경은 그리스어・라틴어・산스크리트어・독일어・켈트어 간의 유사성을 밝혀냈다. 그는 캘커타에서 벵골 아시아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1785년에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한 직원이 『마하바라타』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했다. 『마하바라타』는 『리그 베다』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부족 바라타족의 전쟁에 관한 대서사시로 세계적으로 손꼽힐 정도의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이 대서사시는 아리아인이 인더스 계곡에서 갠지스 강유역까지 뻗어나간 전쟁사를 찬미하고 있다. 윌리엄 존스 경의 연구덕에 초원지대 언저리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인도어-유럽어 사용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인과 페르시아인, 그리고 인도 북서부를 침략한 아리아인 침략자의 선조가 어떤 식으로 중국 북부에서부터 헝가리 평원의 언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에 대한 조직적인 연구가 가능해졌다. 당시 러시아 남부는 인도어-유럽어 확산에 가장 적합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러시아 남부의 유목민은 경작하는 땅에 발이 묶여 있었던 서아시아・남아시아・동아시아의 여러 농경민과는 달랐다. 말 위에서 생활하는 데 익숙한 그들은 엄청난 기동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엔 이 기운찬 가축에 마구를 채워 짐마차나 전투용 마차를 끌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갈이라는 획기적인 기구의 발명으로 기수가 말을 자신의 의도대로 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등자가 발명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그때까지 재블린javelin(촉과 자루, 끈으로 감은 손잡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가벼운 창)을 사용하는 창병이나 궁수는 여전히 충돌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에 올라야 했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청동재갈’이 발명되어 전차부대가 기갑부대로 대체되는 변화도 일어났다. 그러나 거대한 장창을 쓰는 창기병이 등장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이를 위해서는 등자와 안장이 말에 장착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시아에서 발명된 등자와 안장 덕분에 말에 오르내리는 것과 말을 모는 것이 한층 수월해져서, 말을 안정적으로 탈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이 효과적인 안장 덕에 날개 달린 창winged spear과 여러 보호 장구들을 이미 사용하고 있던 게르만 중에서도 서게르만에 속하는 다양한 부족들의 연합인 프랑크족의 기마병들은 중무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유럽을 호령한 기사들의 탄생이 목전으로 다가온 것이다. 십자군원정 당시 중무장한 프랑크족 기마병들로 구성된 기갑부대가 중세 서아시아 민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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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족이 인더스 문명과 교류한 증거라 할 수 있

 

 

 

 

 

 

각양각색의 물품이 로톨 항구를 거쳐 갔다. 목재・금・준보석, 심지어 상아까지 수출되었고, 채색도자기는 수입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가는 인기품목이었다. 이 도자기들은 인더스 계곡 상인들의 군락이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지역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기원전 2200년경에 새겨진 한 비문에는 멜루하Meluhha라는 도시로부터 오는 무역선에 투자한 한 메소포타미아인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셈족이 인더스 문명과 교류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아카드 몰락 이후 수메르 문명이 짧은 기간에 다시 한 번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해상교역로의 종착 도시가 인더스 강 하구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시기가 바로 인더스 계곡 사람들이 멜루하와 교역하던 시기이며, 이 교역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은 우르에 거주하는 수메르인 상인들이었다. 강 하구에서 가장 각광받은 수출입항은 바레인Bahrain이었을 것이다. 비록 바레인에 인더스 계곡의 상인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바레인 섬에는 당시 딜민이라는 독립 무역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더스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의 교역을 가능하게 했던 해상교역로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강의 흐름이 바뀐 탓일 수도 있고, 교역의 중심축이었던 도시가 엄청난 홍수에 빈번하게 피해를 입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인더스 강의 다른 지류들처럼 강물이다 말라버리고 강줄기가 다른 곳으로 아예 이동해버린 것 때문일 수도 있다. 모헨조다로에서도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소불위의 자연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흔적, 즉 찬란한 문명을 펼친 이 도시의 인구가 점차로 줄어들었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자연에 과도하게 손을 댄 것이 화를 불렀을 수도 있다. 나무를 과도하게 벌채하고 도시를 잔디로 덮어버린 탓에 홍수에 대응할 수 없게 된 인재였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대 아시아에서 가장 평등한 사회를 구가했던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750년경에 돌연 붕괴했다. 인더스 문명의 붕괴는 북부 펀자브 지역의 하라파와 남쪽 신드 지역의 모헨조다로에 각기 다른 영향을 미쳤다. 하라파의 도시 잔해에는 새로운 공동체가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건물 잔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도시유적의 바로 다음 지층에서 재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도시 또한 극적인 최후를 맞았음이 틀림없다.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거리에 널려 있는 유골들도 의미심장하긴 마찬가지다.
이 한 많은 영혼들을 해한 것으로 보이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아리아인이다. 펀자브 지역에 있던 하라파Harappa(하리유피야Hariyupipya라고도 함)에서 이미 도시를 불태우고 압승을 거둔 전적이 있는 아리아인은 이 모헨조다로를 침략했을 것이다. 『리그 베다』에는 아리안 침략자들이 펀자브 지역을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신드 지역에서 인더스 문명이 좀 더 오래 그 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펀자브 지역에 머무르며 남쪽의 상황도 훤히 꿰뚫게 된 아리아인은 모헨조다로를 불시에 급습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아리아인의 출현으로 고대 남아시아에서는 무려 1000년 동안이나 도시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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