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특별한 메시지!

『법왕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14대 법왕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의 많은 저술과 강연, 좌담, 시에서 보여주고 들려준 이야기를 엮은 것으로, 위대한 달라이 라마의 인류에 대한 가르침과 보편적 메시지를 간략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친절과 사랑, 연민과 이타심 등의 불교의 가르침과 함께 티베트, 세계평화, 환경, 과학, 여성, 교육 등의 깊이 있고 중대성 있으며, 위트와 문학성, 그리고 저자의 모든 메시지가 담긴 25가지의 가르침을 4개의 주제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우리는 이생의 행복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물질로는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으며 마음을 정화시킬수록 점점 더 행복해진다는 것,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 등 다양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인과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진정한 친구, 연민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건 못하건 우리 경험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커다란 질문이 자리합니다.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저는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인간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단순히 자족감을 갈망합니다. 우리가 지구에 살면서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갈 임무를 띤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최고 수준의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발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1. 행복의 연금술
사랑과 연민의 욕구
궁극적으로 사랑과 연민이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무엇보다도 사랑과 연민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욕구는 인간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깊이 상호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생의 절정기에 아무리 활기차고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라도 병이 들거나,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기계가 만든 물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단지 기계적 독립체에 불과하다면, 기계가 알아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덜어주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물질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행복을 외적 발전에서만 기대하는 건 잘못입니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의 기원과 본성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저는 사랑의 욕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란 없다고 믿습니다. 이를 추구하는 현대의 학파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로만 규정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귀중한 물건이라도, 그것을 보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깊은 정체성과 진정한 특질이 주관적인 마음의 본성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대화를 할 때도 누군가와 인간적으로 대화를 하면 기분이 좋아져 그에 따라 반응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주제일지라도 전체 대화가 흥미로워집니다. 반면 어떤 상대방이 냉정하고 거칠게 말하면 우리는 불편을 느끼고 대화를 속히 끝내고 싶어 합니다. 매우 사소한 일에서 중대한 일에 이르기까지 타인에 대한 애정과 존중은 우리의 행복에 필수적 요소입니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연민의 의미를 명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 형태의 동정심이 욕망, 집착과 뒤섞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은 종종 자신의 정서적 욕구와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따라서 그런 사랑은 완전한 연민이 아닙니다. 결혼한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상대방의 성격을 깊이 알지 못하는 신혼 초에는 순수한 사랑보다는 집착에 더 의존합니다. 욕망이 너무 강하면 집착의 대상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매우 부정적인 성격인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작은 장점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태도가 바뀌면 종종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태도 역시 바꿉니다. 이는 사랑이 다른 사람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아닌 개인적인 욕구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자 : 달라이 라마
저자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1935년 티베트 동북부 암도AMDO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 때 13대 달라이 라마, 툽텐 갸초THUBTEN GYATSO의 환생으로 인정받아, 절차에 따라 티베트의 국가 원수이자 종교 지도자인 법왕 14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해 점령한 후 10년이 지난 1959년, 망명길에 오른 달라이 라마는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DHARAMSALA에서 반세기 넘게 살고 있다. 망명생활 동안 그는 지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정진해왔다. 세계평화와 보편적 이해의 대변인으로서 60여 개 국 이상의 나라를 방문하고 많은 국가 원수들을 만났다. 70권 이상의 책을 썼으며,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 가운데 하나지만, 자신을 언제나 대단치 않은 일개 승려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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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구성 버리기

 

붓다는 우리에게 생각을 버리고 사물들의 실제 모습들을 보라고 독려했다. 특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왜곡시키는 두 가지의 생각, 즉 영구성과 자아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영구성을 버리기
붓다가 살던 때는 독일의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1949)에서 ‘축의 시대’라고 부르던 시대였다. 그때는 변화와 혼란의 시대였으며 사람들이 새로운 답을 구하던 시대였다. 고대 이스라엘의 히브리 선지자들은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내면이 바뀔 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포했다.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적어도 스스로를 돌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공자는 다리 아래 흐르는 물줄기를 보고 “이처럼 밤낮으로 흐르는구나!” 하고 소리쳤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모든 것이 흘러간다!”고 같은 의견을 말했다. 두 사람 각각 자신의 방식으로 실재의 변화무쌍함과 비영구성을 말한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살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각각 같은 통찰에 도달했다.
축의 시대는 인도에서도 격심한 변혁기였다. 기마민족이던 아리아인이 갠지스 평원을 침략했다. 사람들은 고대 종교 베다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 베다교의 의식은 더 이상 도움을 주거나 보호해줄 힘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를 대신할 급진적인 종교가 새로이 생겨났다. 이 종교의 교리는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Upanishads』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우파니샤드는 산스크리트어로 ‘나란히 앉음’을 의미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전수했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는 아트만atman(자아)이 곧 브라만Brahman(‘영감을 받은 자’ 혹은 ‘두 번 태어난 자’란 뜻)이라고 가르쳤다. 즉 우리 내면의 ‘자아’가 곧 ‘신’이라는 뜻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내재하는 신은 초월적인 신을 의미한다.
공자, 헤라클레이토스와 마찬가지로 붓다도 만물의 비영구적 본질에 관해 말했다. 만물은 비영구적이며 존속하는 것이라고는 없다. 만물은 항상 변화한다. 매번 같은 것이라고는 없다. 이는 찬물이 끓는다거나 사람이 죽을 때처럼 눈에 보이는 변화뿐만 아니라, 매초 수백만 혈액세포가 죽는 동안에 또 다른 수백만 혈액세포가 태어나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도 포함된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서는 순간뿐만 아니라 매 순간 생명과 죽음이 동시에 발생하며, 느낌과 생각이 매 순간 바뀐다. 생겨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동시에 소멸 과정의 시작이 된다. 인간이나 나무처럼 정지되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실제로는 스스로 변화한다. 영구성은 단지 하나의 생각
일 뿐 실재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비영구성은 하나의 생각 그 이상이다. 그것은 통찰, 즉 실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이다. 슬픔에서 우리를 해방할 수 있는 힘을 지닌 통찰이다. 모호하고 추상적이나마 만물이 비영구적이며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붓다는 이 통찰에서 삶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다.
비영구성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어느 누구의 말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 비영구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영구성은 비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관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그냥 비영구성일 뿐이다. 비영구성에는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영원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또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정권이 언젠가는 종식됨을 뜻하기도 한다. 비영구성 때문에 무지가 지식으로 바뀔 수 있고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오렌지 꽃이 맛난 과일로 변할 수 있다.
생명 자체가 비영구성으로 가능해진다. 우리가 영원하다면 우리는 온기가 있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갑고 죽어 있는 조각상과 같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도 다시는 나무에 싹이 트지 않을 것이며, 햇빛은 결코 지구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비영구성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아니다. 비영구성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본질이 비영구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실과 다투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에 대항해 다툴 때마다 진실이 항상 우리를 이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만물에 저항하는 일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어렵다. 우리는 변화와 상실에 고통받는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거나 혹은 그런 일이 적어도 내게 일어날 줄 몰랐다고 말하며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만물에 비영구성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런 다툼을 멈추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바로 비영구성의 방식이며, 이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경이로운 생성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고요하고 열린 마음으로 만물의 본질이 비영구성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물은 항상 흘러가며 변화한다.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우주는 창조와 파괴의 위대한 소용돌이치는 춤이다. 그 춤에 동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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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

 

달라이 라마가 서양에 막 진출했을 무렵 그는 미국의 명상 교사들을 만났다. 그는 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처음엔 통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명상 교사들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티베트어에는 낮은 자존심을 의미하는 용어조차 없다. 마침내 그 뜻을 이해하고 나서 달라이 라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서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심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에덴에서 죄를 지어 쫓겨났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한 종교의 유산 때문인지, 부모의 교육이 문제인지 알 수 없다. 이런 사고방식은 의식적으로 거부하려고 해도 서양 문화 곳곳에 스며 있다. 한편 자존심이란 개념 자체도 문제다. 자존심이 높다는 말은 낮은 자존심도 있음을 의미한다. 자존심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면 자존심이란 우리에게 없을 수도 있고 또 자존심을 키웠더라도 다시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눈에 띄게 우리 자신과 우리 개개인의 행복에 집중하는 까닭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을 궁극적으로 보상받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를 어떻게든 확인하게 해주는 시련과 곤경을 겪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존심이 낮은 사람은 물론 높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이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붓다의 통찰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붓다가 인생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방법을 이해해야 이미 존재하고 있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통찰은 비교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 존재에 대한 잘못된 시각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한다는 걸 보여준다.

 

 


내가 행복할 수 없는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마을로 순회하던 티베트 승려 몇 분이 주최한 번영 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강연자인 승려가 티베트어로 말하면 다른 승려가 영어로 통역했다. 강연자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말했고 통역사는 강연자의 말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하지만 강연자가 아무리 길게 말해도 통역사의 요약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의도이다. 티베트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아와 자애를 강조한다. 이는 대승불교의 훌륭한 전통이다. 대승불교에서 자신만을 위해 깨우침을 구하는 것은 작은 목표에 불과하다. 다른 존재를 도우려는 의도로 수행해야 모든 것이 변한다. 자애와 자비는 불교의 핵심 수행 과제다. 하지만 나는 강연 중에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느껴서는 안 되는 까닭이 세상 사람들이 불의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내 강의의 주제는 마음을 챙기며 사는 삶 또는 마음챙김 요법이지 사회 정의나 평화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불편해하고 염려한다. 이는 그림 수업을 들으면서 조각에 대해서는 왜 말해주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쩐 일인지 내부의 평화와 외부의 평화가 서로 상극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부의 평화는 곧 외부의 평화, 즉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탄탄한 토대가 된다. 스스로 평화롭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충실하기가 어렵고, 말과 행동도 서투를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피해를 줄 것이고, 그들을 설득하는 대신 적대시하게 되며, 열린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서로의 입장만 고수하여 역효과를 낼 뿐이다. 내부와 외부의 평화는 불가분의 관계다. 물론 평화와 정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거부한다면, 먼 나라의 아이들은 굶고 있으니 음식을 남기지 말고 먹으라는 식의 죄책감을 조장하는 일이 생겨난다. 때때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행복을 거부하는 태도의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때까지 행복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동시에 우리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으면 매일 말과 행동으로 세상의 불행을 가중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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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기독교의 여섯 가지 기본 교리

 

기독교의 모든 종파가 공동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기본 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삼위일체설이다. 기독교에서는 세계와 우주에 초자연적이며 사회를 뛰어넘는 힘이 존재하는데 이 힘을 하느님이라고 믿는다. 하느님은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하며 유무형의 만물을 창조한 신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타난다. 성부는 하늘에 있어 천부라 하며 가장 높은 위치에 있고 모든 것을 주재한다. 삼위일체 중에서 가장 먼저인 존재이다. 성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삼위일체 중에서 두 번째이다. 그는 십
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림으로써 인류를 구원했다. 성령은 삼위일체 중에서 세 번째로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개 역할자이다. 사람들이 지혜와 신앙을 깨닫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도록 돕는다. 삼위는 각자 독립된 신이 아니고 모두 모여 하느님이라는 일체가 된다.
둘째, 창조설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인류를 포함한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구약』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닷새 동안 자연계의 만물을 창조하고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했으며 일곱째 날에 안식한 것으로 적혀 있다. 창조설은 기독교사상의 핵심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기에 마땅히 하느님이 가장 높고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분이라고 믿는다. 즉 기독교에서 하느님은 우주의 최고 주재자이다.
셋째, 원죄설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고 에덴동산에서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살도록 했다. 그러나 이브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었고 이에 격노한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했다. 이후 인류의 시조는 거친 땅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며 살아야 했다. 또한 그들의 죄는 고스란히 후세에 전해졌고 인류 고
난의 근원인 원죄가 되었다. 그래서 막 태어난 아기라도 원죄를 안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이 된다.
넷째, 구속설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지닌 원죄 때문에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느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세상으로 보냈으며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 그리스도의 피로서 인류의 원죄를 구속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죄를 용서받고 영생할 수 있다.
다섯째, 천국과 지옥설이다. 예수는 최후의 날에 재림하여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심판하여 인류를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눌 것이다. 산 자,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서 영생을 얻지만 죽은 자,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벌을 받는다. 기독교는 천국을 극락세계로 묘사한다. 바닥은 황금이 깔려 있고 집에는 온갖 보석이 가득 차 있으며 아름다운 풍광, 좋은 소리, 맛난 음식 등 인간의 오감을 만족시
킬 수 있는 모든 것이 채워져 있다. 반면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뱀과 전갈이 사방을 기어 다니는 아주 무서운 곳이다.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 있다고 말한다. 죄가 있지만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잠시 연옥에서 고통을 받으며 속죄할 경우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 인내와 순종설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묵묵히 참고 순종하라고 권한다. 「마태복음」에는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마태복음」5:40-42)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에는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른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로마서」 13:1-2)라고 적혀 있다. 또한 「베드로전서」에는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주인에게 진정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뿐만 아니라 고약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베드로 전서」 2:18)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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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경쟁과 집착을 초월하는 장자의 사상

 

또 다른 이야기를 보자. 혜시가 양나라에서 재상으로 있던 시절이다. 하루는 마침 여유가 생겨 양나라에 들르겠다는 장자의 편지를 받았다. 혜시는 오랜 친구가 자신을 보러 온다는 소식에 무척 기뻤다. 게다가 지금 재상 자리에 있으니 친구에게 체면도 서고 나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혜시의 주변 사람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자의 능력이 혜시보다 뛰어나니 장자가 와서 혜시의 재상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다며 걱정했다. 귀가 얇은 혜시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장자의 얼굴이 그려진 방을 전국에 붙여 장자를 수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장자가 이런 모욕을 당할 인물인가? 장자는 일국의 평범한 백성이고 벼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벗이라는 자가 지금 방을 붙여 자신을 잡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천지에 이렇게 친구를 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결국 장자는 제 발로 혜시를 찾아가 혜시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놓고 말했다.
“남쪽에 아주 특이한 새가 있는데 원추鵷雏라고 하지. 북쪽으로만 날아가는 새인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도 않고 감로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고, 대나무에 열린 과실이 아니면 먹지도 않는다네. 원추가 날고 있는데 때마침 부엉이 한 마리가 아래쪽에 있었다네. 다 썩은 쥐새끼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원추를 보더니 자기가 잡은 쥐새끼에 눈독을 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부엉부엉’ 소리를 질러 경계했지.”
그러고는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지금 양나라를 가지고 나를 겁주려는 것인가?”
장자 눈에는 재상 노릇을 하고 있는 혜시가 그저 썩은 쥐새끼 한 마리를 물고 있는 부엉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즉 그걸 탐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한바탕 이야기를 들은 혜시는 비로소 장자가 재상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사건은 이제부터였다. 당시 위나라 즉, 양나라와 제나라가 조약을 맺었는데 제나라가 일방적으로 이를 깨뜨렸다. 화가 난 위왕은 자객을 보내 제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대장군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대왕, 일반 백성도 아닌 일국의 왕으로서 어떻게 상대국의 왕을 자객을 보내 죽일 수가 있습니까? 신에게 20만 대군을 주십시오. 제가 제나라를 치겠습니다.”
이어서 다른 대신이 말했다.
“지난 7년을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싸움을 벌인다니 아무래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대신이 말했다.
“전쟁하자는 자나 전쟁을 하지 말자는 자 모두 혼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그들을 비판하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참 재미있는 대답이다. 원래 세상은 고요한데 사람이 공연히 일을 만든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조용한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켜 무엇한단 말인가. 이때 혜시가 등장해 왕에게 대진戴晉이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대진은 도착하자마자 위왕에게 말했다.
“어떤 달팽이가 있었는데, 뿔 두 개 중 한쪽에는 만蠻씨 부락이 살고 다른 한쪽에는 촉觸씨 부락이 살았습니다. 두 부락은 달팽이 뿔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자주 전쟁을 했습니다. 일단 싸움이 붙으면 열흘이 넘게 이어지고 몇 만 명씩 사람이 죽어나가기 일쑤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갈 것은 그들이 그렇게 갖고 싶어 다투는 것이 단지 달팽이 뿔이라는 사실입니다.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세상에 비한다면 일개 국가도 아주 하찮은 크기가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위왕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렇게 큰 세상에서 그런 작은 땅덩이 때문에 다툴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 시야만 넓게 가져도 싸울 일은 별로 없다. 시야를 넓게 가지고 마음을 열면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나 집착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 노장의 지혜 ‥‥‥


『장자』의 「추수편秋水篇」에는 넓은 시야에 대해 장자가 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하나가 실려 있다. 가을이 되면 공기 중에 수분이 많아져서 각 지역에 비가 내린다. 산 위의 많은 지류들이 모여 황하의 물이 불어났다. 이쪽 편에서 보면 건너편에 있는 것이 말인지 소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폭도 늘어났다. 강의 신 하백은 매우 의기양양해서 자신이 사는 황하가 천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다. 건너
편에 있는 것이 말인지 소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면 실로 대단하다. 물론 옛날 사람의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다. 옛날에는 일반 백성 중에 글을 배운 이가 적어서 모두 시력이 2.0은 족히 됐다. 그러니 그 당시 아무리 뚫어져라 봐도 말과 소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거리라면 상당히 멀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현재 우리는 안경을 쓰고도 시력이 0.2밖에 나오지 않으니 뭘 봐도 흐릿할 수밖에 없다 .
아무튼 하백은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자신이라 자부했다. 강물은 동쪽으로 흘러 북해로 들어갔다. 물론 북해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저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상의 지명일 뿐이다. 동쪽으로 흘러 북해로 들어가 보니 바다의 거대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고 이쪽저쪽 방향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백은 바다의 신에게 말했다.
“바다의 신이여,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바다의 신이 말했다.
“당신은 작은 존재에 불과하오. 하지만 천하에 비하면 나 또한 별것 아니오.”
이어 이렇게 말했다.
“세계 안에 있는 중국은 창고 안에 있는 작은 쌀 한 톨에 불과하오.”
생각해 보자. 중국을 쌀 한 톨에 비유했다면 지구는 탁구공보다도 작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멀리서 봐야 그렇게 보일까? 학창시절 스승 팡둥메이[方東美] 선생님은 장자가 우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우주에서 봐야만 지구가 매우 작다는 것을, 중국이 쌀 한 톨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을 더 쉽게 달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비유법은 서양 문학의 각 영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도 그의 작품 『월든Walden』에서 장자의 이런 시각을 표현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나온 수재였지만 도시를 버리고 호숫가에 정착해 살았다. 가끔 근처 농가에 가서 호미를 비롯한 공구를 구해 왔는데 농부들이 그를 아주 의아하게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을 나온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최고의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루는 농
부가 물었다.
“혼자서 호숫가에 사는데 외롭지 않으세요?”
그러자 소로가 대답했다.
“네.”
그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글로 적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렇게 글로써 되물었다.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는 검은 점에 불과하니 그 작은 검은 점 위에서 우리가 떨어져 산다면 얼마나 멀리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이것이 장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런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경쟁과 무경쟁을 생각할 때 “인일시풍평랑정忍一時風平浪靜, 퇴일보해활천공退一步海闊天空” 즉 잠시만 참으면 세상이 평화롭고, 한 걸음만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는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은 모든 일을 다 참고 양보하라는 뜻이 아니다. 늘 신중하게 저울질을 해보고 결정하라는 뜻이다. 내가 여기에서 남에게 조금 양보하면 남이 저기에서 나에게 그보다 많이 양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을 다 이기려고만
한다면 당신의 삶은 상당히 피곤해질 것이다.

인간은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다. 그리고 인생은 짧다. 시야를 넓게 가지고 마음을 열면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나 집착은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는 경쟁이 있다. 장자도 인류사회가 경쟁을 통해 발전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사실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경쟁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좀 더 쉽게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노장의 비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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