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영구성 버리기
붓다는 우리에게 생각을 버리고 사물들의 실제 모습들을 보라고 독려했다. 특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왜곡시키는 두 가지의 생각, 즉 영구성과 자아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영구성을 버리기
붓다가 살던 때는 독일의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1949)에서 ‘축의 시대’라고 부르던 시대였다. 그때는 변화와 혼란의 시대였으며 사람들이 새로운 답을 구하던 시대였다. 고대 이스라엘의 히브리 선지자들은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내면이 바뀔 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포했다.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적어도 스스로를 돌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공자는 다리 아래 흐르는 물줄기를 보고 “이처럼 밤낮으로 흐르는구나!” 하고 소리쳤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모든 것이 흘러간다!”고 같은 의견을 말했다. 두 사람 각각 자신의 방식으로 실재의 변화무쌍함과 비영구성을 말한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살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각각 같은 통찰에 도달했다.
축의 시대는 인도에서도 격심한 변혁기였다. 기마민족이던 아리아인이 갠지스 평원을 침략했다. 사람들은 고대 종교 베다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 베다교의 의식은 더 이상 도움을 주거나 보호해줄 힘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를 대신할 급진적인 종교가 새로이 생겨났다. 이 종교의 교리는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Upanishads』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우파니샤드는 산스크리트어로 ‘나란히 앉음’을 의미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전수했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는 아트만atman(자아)이 곧 브라만Brahman(‘영감을 받은 자’ 혹은 ‘두 번 태어난 자’란 뜻)이라고 가르쳤다. 즉 우리 내면의 ‘자아’가 곧 ‘신’이라는 뜻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내재하는 신은 초월적인 신을 의미한다.
공자, 헤라클레이토스와 마찬가지로 붓다도 만물의 비영구적 본질에 관해 말했다. 만물은 비영구적이며 존속하는 것이라고는 없다. 만물은 항상 변화한다. 매번 같은 것이라고는 없다. 이는 찬물이 끓는다거나 사람이 죽을 때처럼 눈에 보이는 변화뿐만 아니라, 매초 수백만 혈액세포가 죽는 동안에 또 다른 수백만 혈액세포가 태어나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도 포함된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서는 순간뿐만 아니라 매 순간 생명과 죽음이 동시에 발생하며, 느낌과 생각이 매 순간 바뀐다. 생겨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동시에 소멸 과정의 시작이 된다. 인간이나 나무처럼 정지되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실제로는 스스로 변화한다. 영구성은 단지 하나의 생각
일 뿐 실재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비영구성은 하나의 생각 그 이상이다. 그것은 통찰, 즉 실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이다. 슬픔에서 우리를 해방할 수 있는 힘을 지닌 통찰이다. 모호하고 추상적이나마 만물이 비영구적이며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붓다는 이 통찰에서 삶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다.
비영구성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어느 누구의 말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 비영구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영구성은 비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관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그냥 비영구성일 뿐이다. 비영구성에는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영원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또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정권이 언젠가는 종식됨을 뜻하기도 한다. 비영구성 때문에 무지가 지식으로 바뀔 수 있고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오렌지 꽃이 맛난 과일로 변할 수 있다.
생명 자체가 비영구성으로 가능해진다. 우리가 영원하다면 우리는 온기가 있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갑고 죽어 있는 조각상과 같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도 다시는 나무에 싹이 트지 않을 것이며, 햇빛은 결코 지구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비영구성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아니다. 비영구성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본질이 비영구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실과 다투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에 대항해 다툴 때마다 진실이 항상 우리를 이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만물에 저항하는 일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어렵다. 우리는 변화와 상실에 고통받는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거나 혹은 그런 일이 적어도 내게 일어날 줄 몰랐다고 말하며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만물에 비영구성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런 다툼을 멈추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바로 비영구성의 방식이며, 이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경이로운 생성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고요하고 열린 마음으로 만물의 본질이 비영구성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물은 항상 흘러가며 변화한다.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우주는 창조와 파괴의 위대한 소용돌이치는 춤이다. 그 춤에 동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