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경쟁과 집착을 초월하는 장자의 사상

 

또 다른 이야기를 보자. 혜시가 양나라에서 재상으로 있던 시절이다. 하루는 마침 여유가 생겨 양나라에 들르겠다는 장자의 편지를 받았다. 혜시는 오랜 친구가 자신을 보러 온다는 소식에 무척 기뻤다. 게다가 지금 재상 자리에 있으니 친구에게 체면도 서고 나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혜시의 주변 사람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자의 능력이 혜시보다 뛰어나니 장자가 와서 혜시의 재상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다며 걱정했다. 귀가 얇은 혜시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장자의 얼굴이 그려진 방을 전국에 붙여 장자를 수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장자가 이런 모욕을 당할 인물인가? 장자는 일국의 평범한 백성이고 벼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벗이라는 자가 지금 방을 붙여 자신을 잡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천지에 이렇게 친구를 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결국 장자는 제 발로 혜시를 찾아가 혜시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놓고 말했다.
“남쪽에 아주 특이한 새가 있는데 원추鵷雏라고 하지. 북쪽으로만 날아가는 새인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도 않고 감로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고, 대나무에 열린 과실이 아니면 먹지도 않는다네. 원추가 날고 있는데 때마침 부엉이 한 마리가 아래쪽에 있었다네. 다 썩은 쥐새끼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원추를 보더니 자기가 잡은 쥐새끼에 눈독을 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부엉부엉’ 소리를 질러 경계했지.”
그러고는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지금 양나라를 가지고 나를 겁주려는 것인가?”
장자 눈에는 재상 노릇을 하고 있는 혜시가 그저 썩은 쥐새끼 한 마리를 물고 있는 부엉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즉 그걸 탐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한바탕 이야기를 들은 혜시는 비로소 장자가 재상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사건은 이제부터였다. 당시 위나라 즉, 양나라와 제나라가 조약을 맺었는데 제나라가 일방적으로 이를 깨뜨렸다. 화가 난 위왕은 자객을 보내 제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대장군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대왕, 일반 백성도 아닌 일국의 왕으로서 어떻게 상대국의 왕을 자객을 보내 죽일 수가 있습니까? 신에게 20만 대군을 주십시오. 제가 제나라를 치겠습니다.”
이어서 다른 대신이 말했다.
“지난 7년을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싸움을 벌인다니 아무래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대신이 말했다.
“전쟁하자는 자나 전쟁을 하지 말자는 자 모두 혼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그들을 비판하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참 재미있는 대답이다. 원래 세상은 고요한데 사람이 공연히 일을 만든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조용한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켜 무엇한단 말인가. 이때 혜시가 등장해 왕에게 대진戴晉이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대진은 도착하자마자 위왕에게 말했다.
“어떤 달팽이가 있었는데, 뿔 두 개 중 한쪽에는 만蠻씨 부락이 살고 다른 한쪽에는 촉觸씨 부락이 살았습니다. 두 부락은 달팽이 뿔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자주 전쟁을 했습니다. 일단 싸움이 붙으면 열흘이 넘게 이어지고 몇 만 명씩 사람이 죽어나가기 일쑤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갈 것은 그들이 그렇게 갖고 싶어 다투는 것이 단지 달팽이 뿔이라는 사실입니다.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세상에 비한다면 일개 국가도 아주 하찮은 크기가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위왕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렇게 큰 세상에서 그런 작은 땅덩이 때문에 다툴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 시야만 넓게 가져도 싸울 일은 별로 없다. 시야를 넓게 가지고 마음을 열면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나 집착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 노장의 지혜 ‥‥‥


『장자』의 「추수편秋水篇」에는 넓은 시야에 대해 장자가 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하나가 실려 있다. 가을이 되면 공기 중에 수분이 많아져서 각 지역에 비가 내린다. 산 위의 많은 지류들이 모여 황하의 물이 불어났다. 이쪽 편에서 보면 건너편에 있는 것이 말인지 소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폭도 늘어났다. 강의 신 하백은 매우 의기양양해서 자신이 사는 황하가 천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다. 건너
편에 있는 것이 말인지 소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면 실로 대단하다. 물론 옛날 사람의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다. 옛날에는 일반 백성 중에 글을 배운 이가 적어서 모두 시력이 2.0은 족히 됐다. 그러니 그 당시 아무리 뚫어져라 봐도 말과 소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거리라면 상당히 멀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현재 우리는 안경을 쓰고도 시력이 0.2밖에 나오지 않으니 뭘 봐도 흐릿할 수밖에 없다 .
아무튼 하백은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자신이라 자부했다. 강물은 동쪽으로 흘러 북해로 들어갔다. 물론 북해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저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상의 지명일 뿐이다. 동쪽으로 흘러 북해로 들어가 보니 바다의 거대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고 이쪽저쪽 방향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백은 바다의 신에게 말했다.
“바다의 신이여,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바다의 신이 말했다.
“당신은 작은 존재에 불과하오. 하지만 천하에 비하면 나 또한 별것 아니오.”
이어 이렇게 말했다.
“세계 안에 있는 중국은 창고 안에 있는 작은 쌀 한 톨에 불과하오.”
생각해 보자. 중국을 쌀 한 톨에 비유했다면 지구는 탁구공보다도 작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멀리서 봐야 그렇게 보일까? 학창시절 스승 팡둥메이[方東美] 선생님은 장자가 우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우주에서 봐야만 지구가 매우 작다는 것을, 중국이 쌀 한 톨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을 더 쉽게 달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비유법은 서양 문학의 각 영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도 그의 작품 『월든Walden』에서 장자의 이런 시각을 표현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나온 수재였지만 도시를 버리고 호숫가에 정착해 살았다. 가끔 근처 농가에 가서 호미를 비롯한 공구를 구해 왔는데 농부들이 그를 아주 의아하게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을 나온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최고의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루는 농
부가 물었다.
“혼자서 호숫가에 사는데 외롭지 않으세요?”
그러자 소로가 대답했다.
“네.”
그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글로 적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렇게 글로써 되물었다.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는 검은 점에 불과하니 그 작은 검은 점 위에서 우리가 떨어져 산다면 얼마나 멀리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이것이 장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런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경쟁과 무경쟁을 생각할 때 “인일시풍평랑정忍一時風平浪靜, 퇴일보해활천공退一步海闊天空” 즉 잠시만 참으면 세상이 평화롭고, 한 걸음만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는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은 모든 일을 다 참고 양보하라는 뜻이 아니다. 늘 신중하게 저울질을 해보고 결정하라는 뜻이다. 내가 여기에서 남에게 조금 양보하면 남이 저기에서 나에게 그보다 많이 양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을 다 이기려고만
한다면 당신의 삶은 상당히 피곤해질 것이다.

인간은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다. 그리고 인생은 짧다. 시야를 넓게 가지고 마음을 열면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나 집착은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는 경쟁이 있다. 장자도 인류사회가 경쟁을 통해 발전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사실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경쟁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좀 더 쉽게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노장의 비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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