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진정한 연민, 만인에 대한 평등, 자신의 이기심 점검하기

 

진정한 연민

진정한 연민은 단순히 정서적인 반응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한 확고한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진정한 연민의 태도는 그들이 부정적인 행동을 할지라도 변치 않습니다. 모든 존재가 행복을 열망하고 행복을 얻을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걸
인식한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과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보편적인 이타심을 키워나가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또한 생겨납니다. 그들이 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와주고 싶은 바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바람은 대상에 따라 선별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만인에 대한 평등

그들이 여러분과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사람을 차별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관심을 놓아버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연민이 우리의 힘, 인내심, 시간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의 자기중심주의, 자립적이고 자존적인 ‘나’에 대한 집착이 기본적으로 연민을 방해합니다. 실제로 진정한 연민은 이러한 종류의 자기 욕심이 제거되었을 때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작해서 발전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는 연민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방해물은 분노와 증오입니다. 잘 알다시피 이러한 감정은 너무 강력해서 우리 마음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들은 통제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을 경우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쉽사리 우리를 괴롭히고, 사랑하는 마음이 주는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적이 우리를 해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그들의 파괴적인 행위로 자신들만 다치게 될 뿐이라는 점을.

 

자신의 이기심 점검하기

보복하고 싶은 우리의 이기적 충동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연민을 실천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상기하고, 타인이 자기 행위의 결과로 고통받지 않게 도우려는 책임감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행동을 냉정하게 선택하게 되어 더욱 효과적이고, 정확하며, 강력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분노에 눈이 먼 보복은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좀처럼 없습니다.

 

적은 나의 친구

연민과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관용의 실천은 기본입니다. 이런 이유로 적의 존재는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고요한 마음을 키우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적이거나 공적인 생활 모두에서
상황이 바뀜에 따라 적이 친구가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친구를 원한다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종종 농담으로 정말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매우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그들의 안녕에 신경을 쓰며, 돕고, 봉사하며,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고, 더 많이 웃어야 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다른 이들의 행복을 등한시할 경우 장기적으로 볼 때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애정만이 진정한 친구를 만듭니다. 물질적인 현대 사회에서는 돈이나 권력이 있을 때 많은 친구들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돈과 권력의 친구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와 영향력을 잃으면 그들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우리는 혼자서 잘 꾸려간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어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처지와 건강이 악화되면 그동안의 실수를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기 위해 이타심을 키워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허정虛靜의 경지에 다다르는 법

 

『노자』에 나오는 말 중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 있다. 바로 “도대道大, 천대天大, 지대地大, 인역대人亦大”이다. 도가 크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도가에서 도는 만물의 시작이자 귀착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도가 크지 않다면 무엇이 크겠는가. 하늘이 모든 세상을 덮고 땅이 세상 모든 것을 받치니 하늘과 땅이 크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크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의 신체는 앞서 말한 다른 것들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작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은 형체가 있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도는 만물의 근원이라서 무엇보다도 크다. 이에 비하면 사람의 몸은 매우 작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의 육체가 아닌 정신이다.
장자는 「소요유편」의 시작 부분에서 물고기 이야기를 했다. 아주 거대한 물고기가 새로 변했는데, 그 새는 등이 어찌나 넓은지 몇 천 리나 된다고 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사실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상상력을 동원해 지어낸 이야기나 각종 신선과 요괴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장자가 곤鯤이나 붕鵬을 묘사하면서 특히 크기를 강조한 진짜 이유는 노자가 인간도 크다고[人亦大] 말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도 크게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한 수련을 거쳐야만 커진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진정으로 도를 이해하고 하늘과 땅을 이해할 때 곤이나 붕처럼 커질 수 있다. 컵의 크기를 재고 싶다면 컵에 물을 담아보자. 보통 물이 많이 담길수록 큰 컵이다. 아주 작은데도 물을 많이 담을 수 있는 컵이 있을까?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육지가 넓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바다가 육지보다 더 넓다. 그리고 하늘은 바다보다도 더 넓다. 그런데 그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과연 이 말은 무슨 뜻일까? 하늘보다도 더 넓다는 것은 물리적인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 크기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크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마음을 넓혀 가면 끝내 만물을 포용하고 최고의 경지인 도를 깨우칠 수 있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누구에게나 이런 잠재력이 있으며 문제는 수련을 거쳐 그 잠재력이 발휘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다고 말한다. 이렇게 된다면 당신 눈앞에는 드넓은
세상이 펼쳐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다. 당신의 삶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어 경쟁이나 이해득실에 연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행여 남과 어쩔 수 없이 경쟁하게 됐다 해도 그 결과를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인생에는 또 다른 길이 있고 그 길은 내면에서 발견해 나가야 하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장에서 경쟁에 관해 알아봤다. 장자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에서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이나 객관적인 판단을 얻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거기에 여러 가지 설명을 곁들여 경쟁의 결과가 만족스럽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경쟁은 때로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이러한 도가적 관점은 분명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일체감, 과학 그리고 종교

 

과학과 종교적 신념을 통해 일체감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과학자들은 생명의 다양성을 인식함과 동시에, 서로 분리된 듯 보이는 개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깨달았다. 과학자들은 초끈 이론string theory으로 대표되는 합일성에 관한 이론, 즉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을 증명하려 애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에는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내적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향으로 접근하든 합일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저버릴 수는 없다. 신성과의 연결고리를 깊이 이해할 필요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성이 우리의 치유를 도와주며 사랑과 안정감을 준다고 믿는 마음이다.
진화론에서조차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 설명된다.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 이전에 탄생한 존재들에서 진화했으며, 그 근원은 수십억 년 전부터 존재해온 단세포생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와 95%의 DNA가 일치하는 침팬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유전자는 인간과 다른 동물이 공통된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물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인간과 새는 서로 다른 모습이고 새와 곤충도 그러하지만, 진화 과정을 추적해보면 우리 모두 하나의 공통된 근원, 공통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서로 피부색이나 머리색이 다르다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의 DNA가 서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슷하다는 사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유명한 과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우주를 움직이는 힘으로 지적이고 위대한 존재를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호킹은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이란 그저 우연에 불과하며, 수학과 가능성 그리고 확률로써 모든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계적 관점은 일체감 이론과 완전히 상반된다. 그런 관점에서도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힘을 인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관점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창조의 완벽성을 깨닫지도 못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접할 때 느끼는 신성한 연결고리도 간과하게 된다. 또한 삶의 목적성을 부정하고 자연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를 지휘하는 고귀하고 조화로운 의식의 존재를 거부하게 된다. 내가 여기
서 독자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과 존재의 의미를 성찰해보고 이렇게 한계가 뚜렷한 관점들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라는 것이다.
계속 연구를 진행해가다 보면 과학자들조차 종교적인 신비와 마주치기도 한다. 이들은 마음과 몸, 영혼의 연결고리라는 개념이 사실은 영적 전통의 한 부분으로서 유효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양자역학이나 양자물리학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낡은 인과관계와 수학 공식으로는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원래 하나였던 입자가 서로 떨어져 어느 한쪽이 변화하게 되면, 나머지 입자도 즉각 그에 영향을 받아 반응을 보인다. 과학자들은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에서는 이것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현실이라는 조직의 한 부분이다. 과학자들과 수학자들은 아직도 이 법칙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지만 말이다. 직관력 있는 사람들조차 정보가 어떻게 순간적으로 보이지 않게 이동하면서 복잡성을 낳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학교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사는 자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자식이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는 내재된 연결고리에 의해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 우리는 전화 통화 도중에,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친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형이상학은 과학의 개념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었던) 고대의 지혜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종합한다. 게다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내재적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복잡하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으로 우주를 형상화한다. 과학자들은 양자물리학 이론 덕분에 의술사들과 영적 지도자들이 수천 년 동안 전하려 한 가르침을 쉽게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보이는 세계와 소통하는 영적 존재를 실제로 보여주는 장치도 언젠가는 발명되리라 믿는다. 세상을 떠난 이들과 소통하는 기계가 발명될지도 모른다.
사실과 논리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객관적 지식을 확장해 인간의 경험에 대한 다른 이해 영역과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과학은 진실로 가득 찬 이 세상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여러 종교들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신성한 글귀들에는 조상들이 일체감에 대한 개념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는 실마리가 숨어 있다. 아울러 고대의 문헌들에는 어떻게 전 인류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 하나의 역사를
공유해왔는지에 대한 지혜가 담겨 있다. 그것들에는 인간이 어떻게 신과의 관계, 이 지구와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체적인 창조의 일부로 통합되었는지가 드러나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혼과 신이 하나가 되었음을 계시해준다.
불행히도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 인간은 고대의 가르침을 너무 곧이곧대로 해석한 나머지,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성한 가르침과 영감으로 가득 찬 원래의 의미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렸다. 예를 들어 성경이 과학을 부정하고 있다고, 지구가 6000년 전에 창조된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아주 제한된 사고방식일 뿐이다. 다른 여러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심오한 철학을 전달하기 위해 은유적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 표현들을 어설프게 해석하여 불완전하게 만들어버린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권력 지향적이거나 자의식에 가득 찬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걸러진 내용이 많다. 특정한 문장을 추가하거나 삭제하고, 두려움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제임스 1세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신이 선택한 인간이라 믿게 하려고, 성경을 번역하는 학자들에게 성경 속의 지도자를 미화하도록 지시했다. 잃어버린 성경이라고 일컬어지는 외경外經은 사실 잃어버렸다기보다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금지된 것에 가깝다. 성경이 손에서 손으로 필사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실수로 경전을 빠뜨리거나 끼워 넣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한두 절을 첨가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경전은 여러 사람들의 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종종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한 단어의 의미가 변화되어왔다. 경전이 최초로 쓰인 문화에서 파생된 이야기도 오해의 소지가 많다. 그러므로 경전을 읽을 때는 말 그 자체에 얽매이지 말고 가르침의 핵심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여러 종교 사이의 연관성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모든 종교는 일체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차이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전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신구약을 포함하는 『성경』 외에 『성전』과 『니케아신경』을 경전으로 삼는 반면,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성전』만을 경전으로 삼는다. 동방정교회는 성령이 단지 성부에게서만 왔다고 주장하고 가톨릭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왔다고 주장한다. 동방정교회는 교황이 교리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교황 무류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주교의 옷차림이 다르다. 동방정교회 주교는 원통형 모자를 쓰고 은백색이나 검은색 가운을 입는다. 그리고 가슴에 성상을 달고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반면 가톨릭교회 주교는 타원형 모자나 사각 모자를 쓰고 황금색 긴 가운을 입는다. 또한 십자가를 걸고 권위를 나타내는 반지를 낀다.
셋째, 기도문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그리스어 외에 현지 민족의 언어도 사용하지만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만을 사용한다.
넷째, 세례의식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교인을 물에 담그고 가톨릭교회는 물을 뿌린다. 동방정교회는 태아가 세례를 받은 후 견진성사를 거행하지만 가톨릭교회는 7~8세 때에 거행한다.
다섯째, 성찬식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교인 모두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지만 가톨릭교회는 성직자에게만 빵과 포도주를 주고 일반 교인에게는 빵만을 준다.
여섯째, 성직자의 결혼제도가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주교를 제외하고
모든 성직자가 결혼이나 이혼, 재혼을 할 수 있지만 가톨릭교회는 성직자가 결혼할 수 없고 독신과 금욕생활을 강조한다.
일곱째, 절기의 명칭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주님 성탄절, 주님 신현 축일, 주님 입당 축일, 주님의 예루살렘입성 주일, 주님 승천 축일, 삼위일체 주일, 주님 변모 축일, 성모 안식 축일, 성모 입당 축일로 부른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예수 탄생 대축일, 주님 세례 축일, 주님 봉헌 축일, 종려 주일, 예수 승천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 예수 거룩한 변모 축일,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헌당 대축일로 부른다. 동방정교회는 산 조르디 축
일(4월 23일), 니콜라스 축일, 베드로 축일, 순교 주일 등 지역마다 민속과 풍습이 달라서 작은 절기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
여덟째, 신품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정교회만의 교구제를 실시하고 신품에는 흑백 두 종류가 있다. 흑색 신품은 수사, 수사보제, 수사대보제, 수사사제, 수사대사제, 주교, 대주교, 총대주교로 모두 주교이자 교구장이다. 백색 신품에는 강경사, 부보제, 보제, 대보제, 사제, 대사제, 사제장 등이다. 가톨릭교회는 1품은 수문품, 2품은 강경품, 3품은 구마품, 4품은 시종품, 5품은 차부제품, 6품은 부제품, 7품은 사제품 혹은 신품으로 모두 7품으로 나뉜다. 1~4품은 낮은 신품으로 소품이라 하며5 ~7품은 높은 신품으로 대품이라 한다. 교황청이 발전하면서 주교의 품위가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 일반 주교로 나뉘었다.
아홉째, 교회력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양력의 전신인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가톨릭교회는 줄곧 양력을 사용했다.
열째, 예배당 양식이 다르다. 동방정교회의 예배당 건축 양식은 대부분 바티칸 혹은 슬라브 양식이지만 가톨릭 예배당은 대부분 로마나 고딕 양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왜 우리는 무아에 저항하는가

 

자아로 존재하는 느낌이 우리 마음속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은 매우 그럴듯하고 집요한 환상이어서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우리는 일찍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환상은 환상일 뿐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이론물리학자들은 시간을 환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이가 아인슈타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겉으로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척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시간이 환영이라면 우리는 무엇이며, 자아란 또 무엇일까?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느낌 때문에 지속적인 자아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시간 자체가 실재가 아니라면 우리라는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아라는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조금 두려워질 수도 있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자아라는 의식에 매달려 붓다의 통찰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붓다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무아를 이해해서 손해 볼 건 없다. 실재하지 않는 것은 잃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무아란 개념이 아니라 반反개념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구별과 집착에서 해방시켜 주는 붓다의 처방 중 하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마음을 열고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갈 수 있으며, 폐쇄적이고 강박적이며 방어적인 경험들을 덜어낼 수 있다. 붓다는 무아를 절대 진리로 제시한 적이 없다. 다만 하나의 ‘능숙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이것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개념에 집착하면 위험하다. 또한 붓다는 무아에 대한 집착이 자아에 대한 집착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경고했다.
자아를 버리는 두려움이 우리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두려움에 맞서 자아를 버리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지금 주먹 속에 쥐고 있는 무엇인가를 놓치면 모든 것을 잃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더욱 꽉 움켜쥐는 것처럼 말이다. 인내심을 갖고 조심스럽게 손을 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칠 필요는 없다. 그저 손을 펴기만 하면 받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