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글로벌 인류 공동체, 행복한 세상의 비결, 평등한 인류

 

글로벌 인류 공동체
우리가 개인적으로 행복하다면 전 인류 공동체의 전반적인 발전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에 대한 동일한 욕구를 지녔기에, 어떠한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든 형제, 자매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평등한 인류
아무리 얼굴이 다르고, 신체가 다르고, 행동이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우리와 타인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외적인 차이에 신경을 쓰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같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하나입니다

궁극적으로 인류는 하나이며 이 작은 행성은 우리의 유일한 집입니다. 우리가 집을 보호해야 한다면 각자 보편적인 이타심을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타심이야말로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못할 짓을 하고 기만하게 만드는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고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자연스럽게 자존감과 자신감이 생겨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행복한 세상의 비결
가족, 부족, 국가, 세계 등 사회의 모든 단계에서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세상을 위한 비결은 연민의 마음을 키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종교적이 될 필요도 없고 이념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가 좋은 품성을 개발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누구를 만나든 오랜 친구를 대하듯 합니다. 이것이 저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 때입니다.

14대 법왕 달라이 라마의 공식 웹사이트에 게재된 ‘연민과 개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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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유용과 무용 사이에 있기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유용지재有用之才’는 예로부터 사회의 요구이자 개인의 바람이었다. 실생활 속에서 어떤 사람은 쓸모 있는 인간으로 평가받고 어떤 사람은 쓸모 없는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그런데 노장사상에서는 “무용취시유용無用就是有用, 대무용취시대유작위大無用就是大有作爲” 즉 쓸모 없는 것이 곧 쓸모 있는 것이 되고, 쓸모가 없을수록 더 큰 용도로 쓰이게 된다는 독창적인 견해를 주장했다. 그렇다면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용無用’에는 과거와 현재를 꿰뚫는 어떤 큰 가르침이 숨어 있는 걸까? 치열한 현대사회의 경쟁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용’을 택할 수 있을까?
누구나 유용한 인재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유용하다는 말을 할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세상 만물은 모두 나름의 쓰임새가 있으며 단지 그 효용성을 인정받을 적당한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무용하다는 말을 들을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과 1달러짜리 동전 한 개가 있다고 해보자. 보통은 100달러짜리 지폐가 훨씬 유용하다. 하지만 무인도라면 1달러짜리 동전이 더 쓸모 있다. 동전을 갈아 도구로 사용한다면 당장 눈앞에 닥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육체적 한계에 도달했다. 이 사람에게 물 한 잔과 다이아몬드 중에서 무엇이 더 유용할까? 사막에서라면 당연히 물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가치 있다.
영화 <내일 모레The Day After Tomorrow>에서는 지구에 큰 재난이 닥쳐 대부분 지역에 빙하기가 찾아온다. 이때 어떤 사람들이 뉴욕의 한 도서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들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불을 지피더니 두꺼운 원서와 고서, 가치를 따지기조차 어려운 희귀본들을 한 권 한 권 땔감 삼아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과연 이때 책을 유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책은 고작 땔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책은 지혜의 보고로, 아주 유용한 물건이다. 그래서 영화의 그 장면에서 니체 등 몇몇 철학자의 책을 특별히 거론할 때 인상적이었던 동시에 안타까웠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 몰린 사람들이 한가하게 책의 유용성이나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다. 우선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앞서 거론한 몇 가지 짤막한 일화에서 모든 물건이 다 유용하며 당신이 적절한 순간에 적정한 용도로 쓰느냐가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노자는 세상 만물을 이렇게 대했다.
“나는 만물이 스스로 발전하도록 돕고자 할 뿐 조종하려 들지 않겠다.”
사실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의 눈으로 보면 좀 더 유용한 것과 상대적으로 유용하지 못한 것이 있다. 때때로 전에 폐품이나 쓰레기 취급을 받던 것들이 지금은 재활용되거나 모습을 바꿔 중요한 자원으로 쓰이기도 한다. 전에는 필요 없다고 버려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노자는 이 세상에는 쓸모 없는 인간도, 쓸모 없는 물건도 없다고 말했다. 모든 물건은 다 그 쓰임새가 있다. 도가 만물을 낳고, 만물이 도 안에 있는데 쓸모 없는 물건이 있을 리가 없다. 서양에서는 자연계에 쓸모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대자연 속의 모든 사물은 설령 그것이 풀 한 포기일지라도 모두 유용하다. 당신이 그것을 하찮게 여겨서 뽑아버린다면 반드시 그곳에 빈틈이 생겨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노자는 대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했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인간과 자연이 교류하는 원칙으로 보아 대자연에 맞추고 적응하라는 뜻으로 풀이하는데, 사실 그런 뜻이 아니다. 원문에는 도법자연 앞에 몇 글자가 더 있다. 원문 전체는 다음과 같다.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
인법지人法地는 당신이 살고 있는 지리적 환경에 맞춰서 생활을 꾸려야 한다는 뜻이다. 산 옆에 사는 사람이 바다에서 나는 자원만 탐낸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지법천地法天이다. 보통 천天은 천시天時, 즉 춘하추동을 말한다. 여기에서 하늘은 어디에 사막을 만들고, 어디에 바다를 배치할지를 정한다. 이 말은 곧 지리환경을 결정하는 것이 하늘이라는 뜻이다. 당신이 추구해야 하는 최종 목표는 천법도다. 천법도天法道는 무슨 뜻일까? 인간에게 하늘은 크기만 한데, 하늘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도는 세상 모든 것을 배치했고 당신으로 하여금 생태의 평형을 지키게 한다. 그러므로 도법자연은 자연계를 흉내 내라는 뜻이 아니라 사물의 본래 상태를 따르라는 말이다. 본래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 안에 바로 도가 존재한다.
도가 학설의 창시자인 노자는 세상 만물이 모두 유용하다고 했다. 관
건은 적절한 때 적정한 곳에 쓰이느냐이다.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장자는 유용과 무용의 사상을 어떻게 발전시켰을까?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유용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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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종교와 영성

물론 종교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성에는 경험이 중요하다. 영적 의미를 탐색하고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탐색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신의 현현顯現을 경험하고 나서야 만족되는 하나의 갈망이다. 어떤 면에서는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갈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영적 경험보다 그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는 종종 문화적 정체성에 매몰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나는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야”라든가 “나는 뉴욕의 유대인이야” 혹은 “나는 유럽의 기독교인이야”라는 표현을 종종 듣는다. 당신의 믿음과 문화적 정체성은 더 큰 일체감의 일부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두 가지 정체성 모두가 우리의 가슴속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 모든 존재와의 합일을 경험하고 나면 그때부터 우리는 진정한 영적 본성을 깨우치게 되고, 사랑과 격려를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그리하여 영원한 평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눈을 뜨게 되고, 이 깨달음을 삶에 실천함으로써 다른 이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갈망하게 된다.
종교는 일체감의 힘을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갈망의 결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과 영적 믿음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지와 이야기와 제의적 행사를 이용해 종교를 만들어냈다. 개인적인 믿음은 우리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 경향이 있고, 종교적인 예식은 영적 존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우리의 영성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에 대해서는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신성성이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되었는지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종교는 신성함과 치유의 힘을 지닌 연결고리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은 너무나 오랫동안 균형을 잃어왔다. 교회나 다른 종교 공동체에 본래의 의미를 되찾을 것을 요구하자. 그래서 이들이 조화를 되찾을 수 있게 돕자. 그곳을 영성과 공동체적 삶의 중심이 되게 하자. 영성이 배양되는 장소,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자. 그 속에서 우리는 세계의 치유를 위해 우리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지나치게 종교적 아집에 빠져 자신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을 받아들이라고 이웃에게 강요하지도 말자. 대신 일체감을 실현하여 신의 은총을 세상에 널리 알리자.
종교적 편견에서 벗어나 의식을 전환해보라. 그리고 잠시나마 영적 환희와 마음의 조화 그리고 기쁨을 누려보라. 명상과 기도를 통해 신과 소통할 때, 차분히 일체감을 성찰할 때,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할 때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신성한 영적 존재는 당신을 부드럽게 감싸안아 안심시켜줄 것이다. 자애롭게 당신의 영혼을 보듬어줄 것이다. 당신을 완전한 평화로 이끌 것이다.
눈부시게 햇살이 빛나는 날에 행복한 기운을 들이마시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있는가? 겨울날 흰 눈이 지붕에 내려앉는 광경을 바라보며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따뜻함을 느낀 적이 있는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반려 동물과 장난칠 때 혹은 친구와 수다를 떨며 웃을 때, 우리는 삶에서 충만함을 느낀다. 이러한 순간은 짧지만 우리에게 일체감의 일면을 일깨워준다. 분열과 소외는 보이는 세계에서 경험하는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충만함을 느끼는 그 짧은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존재의 완전함을 경험하는 찰나다.
현실의 지루함 속으로 돌아오기 전의 이러한 황홀 상태에 우리는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다. 걸음을 늦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타인과의 소통을 그리고 자연의 질서정연한 움직임을 받아들여보라. 사랑을 표현하고, 분노를 피하고, 참을성을 가지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우주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자신과 다른 모든 존재를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라. 지구를 소중한 집이라 생각하고 대하라. 무엇보다 신성한 연결고리를 믿고 직접 경험하라. 당신의 취미 활동들, 축복받은 삶의 환경들, 당신을 아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 그러고 나서 신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간단하게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라. 작은 일에서도 생명의 완전함을 깨닫도록 항상 자신을 열어두라. 그러면 몸의 내부에서 진동이 전해지면서 뭔가 다른 느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감이다. 스스로를 ‘비종교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엄격한 종교적 독단이나 이론에 함몰되지 않을 뿐이다. 이들은 또한 전통적인 종교 단체나 조직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일체감으로의 위대한 합일과 전통적 의미의 신이나 종교는 서로 다르다. 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이들은 두렵기 때문에 더 큰 세상과 연결된 일체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영적 탐험가들(신학보다 사랑과 자비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수는 특정 종교에 깊이 파고드는 사람 수보다 아직 적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종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정신적 균형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개인이 영적인 여행을 지향해감에 따라, 교회도 전통적 가르침과 기존 지도자들에게 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서히 일체감을 받아들일 것이다. 당신의 영적 탐험에 도움이 될 조직을 찾고 있다면 연합교회Unity Church나 종교과학교회Church of Religious Science 혹은 유니테리언 보편구제설 교회Unitarian Universalist Church처럼 새로운 생각에 기초를 둔 교회에 몸담아보는 것도 좋다. 작은 조직 안에서의 경험을 마다하고 더 큰 공동체에서의 영적 도움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어른이 된 지금, 유년 시절에 다니던 교회를 찾아가 보라. 그러면 그때의 가르침이 어떤 깊은 의미를 지녔는지 깨닫고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일체감을 받아들이면, 언어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볼 수 있게 되어 친숙한 기도조차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한 가지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 사랑의 근원과 연결되는 기쁨을 갈망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점점 균형을 찾아갈수록, 과학과 종교의 불화는 점점 사라지고 우리 모두는 영성이라는 한자리에 모이게 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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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차이

 

가톨릭과 개신교는 기본 신앙은 비슷하지만 교리를 살펴보면 내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첫째, 경전에서 차이가 난다. 모두 『성경』에 근거하지만 가톨릭은 『성경』과 『성전』을 믿고 개신교는 『성경』만을 믿는다. 가톨릭교회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통제시스템을 강조한다. 평신도를 가르쳐 이끄는 권위의 상징인 ‘교도권’은 주교의 것이다. 이 교도권이 없으면 신도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해석하거나 왜곡하여 모순이나 대립이 생긴다고 여기기 때문에 성직자가 교도권에 근거한 해석으로 『성경』을 강론해야 한다. 반면 개신교는 각 교회나 개인이 직접 성령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영생을 얻는 방법에서 차이가 난다. 가톨릭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덕목이 영생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임을 강조하고 믿음에 따른 상벌과 천당, 지옥, 연옥이 있다고 주장한다.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강조한다. 즉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에 따른 상벌과 천당, 지옥은 있지만 연옥은 없다고 주장한다.
셋째, 성현을 받드는 데에서 차이가 난다. 가톨릭교회는 성모, 천사, 성인, 성녀, 인류 역사의 성현과 선조 등을 존경하고 받들지만 개신교는 우상숭배를 금한다. 하늘과 땅에서 우리의 보호자는 예수이기에 인류 역사의 성현과 선조를 받들지 않는다.
넷째, 성사와 기도에서 차이가 난다. 가톨릭교회는 일곱 가지 성사를 집행하고 세계적으로 통일된 기도문과 지방 교회가 자체적으로 편집한 기도문을 사용한다. 반면 개신교는 각 종파별로 세례 방식이 다르고 미사와 다른 성사는 없다. 성찬은 예수의 최후 만찬을 기리는 성찬식만 있다. 예배를 드릴 때 성경 낭독과 설교에 중점을 두고 성가대의 찬송과 대표기도도 한다.
다섯째, 선교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가톨릭교회는 수도회의 남녀 수사가 세계 각지로 가서 가톨릭 교리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 중점을 둔다. 반면 개신교의 개별 교회 성직자는 선교보다 목회에 치중해서 활동한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교인과 각 개별 교회가 주체였다. 선교 역시 교인이 직접 주변 지역에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고 교회를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현지 문화를 무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여섯째, 행정 조직에서 차이가 난다. 가톨릭교회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관리하는 중앙집권 체제로 추기경단이 교회를 다스리고 교구 주교가 해당 교회를 다스린다. 반면 개신교는 교인과 개별 교회가 주체가 되고 교인들이 선출한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린다.
일곱째, 예배당에서 차이가 난다. 가톨릭교회는 예배당 꼭대기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는 각양각색이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붉은색의 십자가가 예배당 꼭대기에 걸려 있다. 가톨릭교회 예배당 중앙에는 십자가 위에 예수상이 있고 양측에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 성녀, 성상 등이 있다. 벽면 좌우에 교인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도록 안내하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다. 반면 개신교 예배당 안은 일반적으로 붉은 십자가 하나만 걸려 있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예배당 중앙에는 미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대라고 하는 큰 탁자가 놓여 있고 개신교는 설교를 위한 작은 강단이 있다. 가톨릭교회 교인은 예배당에 들어갈 때나 기도 전후에 이마와 가슴에 성호를 그림으로써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표시한다. 그러나 개신교 교인은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 교인은 기도할 때 한마음 한뜻으로 곡조에 맞춰 통일된 기도문을 읊고 개신교 교인은 자신의 언어로 자유롭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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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온五蘊

 

붓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지만 자아를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그가 발견한 건 그가 오온skandhas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오온이란 상호의존적인 요소들이 가득 쌓여, 점증적으로 자아처럼 보이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 색온色蘊 form
• 수온受蘊 feeling
• 상온想蘊 perception
• 행온行蘊 mental formation
• 식온識蘊 consciousness

오온의 각 요소는 끊임없이 흐르며 변화하는 냇물과도 같다. 오온의 가르침은 실재를 엄밀하고 정확하게 서로 중복되지 않는 조각들로 분석하는 방법이 아니라 수행의 한 방법이다. 오온의 각 요소를 명상의 주제로 삼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중 어떤 것도 견고하고 지속적인 자아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색온色蘊
색온에 모든 생리적, 육체적 현상이 포함된다. 수행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색온이 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음챙김으로 몸을 돌보는 것이 마음챙김의 기초가 된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우리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긴장이 되는가? 그 긴장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답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질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 자신의 몸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색온에 대한 마음챙김을 수행하는 것이다.

수온受蘊
수온은 느낌에 관한 것으로 유쾌, 불쾌 또는 그 어느 쪽도 아닌 중립적 감각을 의식하는 것이다. 발가락을 어딘가에 부딪쳤다면 우리 모두 불쾌한 감각을 느낀다. 그러나 호흡처럼 미묘한 감각을 늘 의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흡을 의식하고자 하면 처음에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루하거나 불쾌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챙겨 호흡에 집중하면 숨을 들이마실 때 무더운 날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는 것 같은 유쾌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또 숨을 내쉴 때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정화되고 진정되는 듯한 기분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숨쉬기에 집중하면 무감정했던 경험이 유쾌한 경험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을 유쾌, 불쾌 또는 무감정으로 판단하는 것을 불교 심리학에서는 자아의식manas이라고 한다. ‘나’ 또는 자아, 즉 자아라는 감각이 생기기 시작하는 곳이 바로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을 통해서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각을 경험할 때 우리는 단순히 감각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개입시킨다. ‘여기에 불쾌한 감정이 있다’라고 하거나 ‘여기에 유쾌한 감정이 있다’라고 하는 대신, ‘난 유쾌한 기분이야, 이게 내가 원하는 거야’라고 하거나 ‘난 불쾌한 기분이야, 이 기분이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감정은 그 감정에 대한 판단에 따라 생겨난 것일 뿐이다.
감정은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판단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어떤 감정이 불쾌하다는 느낌이 있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고 추측한다. 그래서 실체가 있는 대상, 즉 ‘나’, 자아, 자신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는 정지된 사진을 빠르게 돌리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감정과 그 감정에 대한 판단이 빠르게 흘러가며 자아라는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정에 대한 판단에 따라 감정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상온想蘊
모든 상온에는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지각이 포함된다. 우리는 구름을 보면 그것이 구름이라는 것을 알고 나무를 보면 그것이 나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잘못되었다. 먼저 실제 나무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나무에 대한 생각과는 다르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내용을 예로 들면 해질녘 땅 위에 있는 밧줄을 보고 그것이 뱀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 두려움은 불완전한 지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리학 입문서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알겠지만, 우리의 지각은 놀라울 정도로 오류투성이다. 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곡선의 양 끝이 서로 완벽하게 만나지 않는다. 또 우리는 연속해서 보이는 일련의 빛을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 왜곡된 지각은 특히 중요하다.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 우리의 아주 기본적인 부분을 오해해서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는가? 이런 일이 빈번히 일어나지만, 우리는 종종 이를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또한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늘 바꾸게 할 수도 없다. 스스로 인식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인식이 부정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복하여 자기 자신에게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걸까?” 하고 자문해봄으로써 우리는 점차 더 깊고 정확한 시각에 이를 수 있다.

행온行蘊
모든 행온은 다양한 심리 상태들을 다룬다. 우리는 사랑, 평화, 행복, 기쁨뿐만 아니라 질투, 시기, 분노, 증오, 슬픔과 같은 심적 형성도 가지고 있다. 이중 어떤 건 유익한 것이어서 우리를 일깨우고 자유롭도록 도와준다. 또 어떤 건 유해한 것으로 우리를 구속하고 고통의 길로 이끈다. 행온이 유익한지 유해한지는 단순히 우리가 유쾌하게 느끼느냐 불쾌하게 느끼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죄책감을 느낀다고 가정해보자. 그 죄책감이 신경증적 자기 회의가 아니라 실재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우리에게 유익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 감정은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유익하고 타당하다. 그 감정에 시달릴 필요
가 없다. 그래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 교훈을 얻고 변하면 된다.

식온識蘊
다섯 번째 오온인 식온은 수온, 상온, 행온을 담는 그릇이다. 식온은 유지, 인식, 비교, 저장, 기억하는 기능이 있다. 우리는 식온을 그 자체로 알기보다는 주로 그 내용을 통해서 알게 된다.

명색名色: 더욱 단순한 접근
오온이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 붓다는 더욱 단순한 명색Nāmarūpa이란 용어로 압축해서 설명했다. 나마nāma는 ‘마음’을, 루파rūpa는 ‘몸’을 의미하므로 합쳐서 마음과 몸이다. 오온이나 명색 모두 수행에 관한 설명으로 명상의 주제가 된다. 우리 자신을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으로 살펴보거나 아니면 단순히 명색으로 살펴보면 된다. 명색으로 살펴본다는 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지, 몸이 무엇인지, 이런 경험의 흐름 속에 안정되고 실체가 있는 나라는 무엇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이는 마음챙김의 중요한 수행이다.
붓다는 우리의 실체를 보는 유일하고 바른 개념적 도식으로 오온이나 명색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요점은 우리의 실체에 대한 경험을 이런 식으로 분류해서 살펴볼 때, 이런 요소들 사이에 자아가 없음을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온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자아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환상을 깨뜨릴 수 있다. 각각의 요소는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아가 아니라 유동적이며 역동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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