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인류는 하나입니다

 

급격한 인구 증가와 함께 국민과 정부 간의 교류도 증가하면서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서로 간의 관계, 크게는 지구와의 관계와 관련하여 개인, 국민, 국가의 권리와 책임을 재평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인간의 욕구와 관심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인종, 종교, 성 혹은 정치적 지위에 상관없이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인간 그리고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평화와 자유 안에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우리는 특유의 지능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권 침해의 부작용
인권의 침해는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발전을 저해합니다. 그리하여 인권과 자유를 보호하는 일은 개인과 사회 전체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이 행복해진다거나 자신의 행복이 너무 중요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존재를 해침으로써 진정 이익을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
우리가 창조적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특질을 빼앗기는 셈입니다. 인권 학대의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은 종종 가장 재능 있고, 헌신적이며, 창조적인 인물들입니다.

 

사랑과 연민의 양성
더 살맛 나고 평화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비결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우리보다 불행한 환경에 처한 형제, 자매에 대한 관심을 키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민간단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존중할 필요성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인권 침해의 희생자들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전 지구적인 시각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국가의 행위가 국경을 넘어 멀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니까요.

 

인권과 자유에 따른 책임감
우리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인권과 자유를 요구한다면 책임감 또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평화와 행복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수용한다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근본적인 인권을 존중하는 일은 이상이 아닌 모든 인간 사회가 갖추어야 할 기본 토대입니다. 보편적인 구속력을 지닌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서약에 명시된 인권의 기준을 수용하는 것이 인권이 축소되는 이 시대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권 존중은 유럽이나 미국 대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만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합니다.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어떻든 모든 인간은 위협받거나 수감되거나 고문받을 때 고통을 느낍니다. 인권 문제는 근본적으로 매우 중요하므로 이 관점에 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인권 존중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이 권리의 정의에 대한 전 지구적인 합의를 강력히 주장해야만 합니다.

 

독재와 전체주의 체제
이러한 체제는 자국민을 장기적으로 더욱 이롭게 한다는 보편적인 원리를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급격한 변화에서 인권의 승리가 필연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폭력이라도 자유와 존엄에 대한 인간의 기본 욕망을 진압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귀중한 자유의 공기를 호흡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형제, 자매가 난폭한 대우를 받을 때 저항하는 것은 지구 인류가족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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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자유롭게 사는 방법

 

‘외화이내불화外化而內不化’란 겉모습은 다른 사람과 같아야 하고,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간섭이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장자가 말한 최상의 개념이다. 살아가는 동안 외부의 영향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장자는 수련할 때 주의할 점을 당부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도 나를 더 분발하게 하지는 못하며,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한다고 해도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지는 못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은커녕 한 반의 학생 50명 정도만 칭찬해줘도 우쭐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교사 본연의 자주적인 모습이 흔들리게 된다. 나는 미국 유학시절에 있었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 번은 교수님이 명강의를 해주셨다. 수업이 끝나자 백 명 정도 되던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일이 번거로워졌다. 왜일까? 그 후 교수님은 매번 수업
이 끝나면 가만히 서서 학생들이 박수치기를 기다리셨다. 때로 학생들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솔직했다. 그날 수업이 별로였다고 생각하면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럼 교수님은 기운이 빠진 채 강의실을 나가셨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외부의 영향에 너무 약하다. 저명한 대학의 명교수도 이렇듯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학생들이 박수를 치면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박수를 받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자처럼 세상 사람들의 행동에 신경 쓰거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어디인지, 자신의 삶, 자신의 일을 어떤 태도로 대면해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생명은 진정한 독립적 가치를 갖게 된다.
장자의 사상은 다음의 네 가지로 압축된다. 첫 번째로 자기와는 안安해야 하고, 두 번째로 남과는 화化해야 하며, 세 번째로 자연과는 락樂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도와는 유遊해야 한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이러하다. 자신을 대할 때는 무슨 일이 생기든 흔들리지 않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일단 무슨 일이 발생하면 막을 방법이 없으므로 그냥 편하게 그것이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특별히 우쭐댈 것도 불평할 것도 없이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는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 이는 사회에서 생존하고 성장하는 데 분명 중요한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자와 노자의 사상에서 교훈을 얻어 경쟁을 초월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노자는 “무위이무불위야無爲而無不爲也”라고 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애써 뭔가를 하려고 들지 말라는 뜻이다. 모든 일이 그냥 되어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두면 된다. 반대로 뭔가 일부러 하려고 들면 잊고 빠뜨리는 쪽이 더 많거나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일이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일은 저절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장자도 노자와 유사한 말을 했다. 장자는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저 자신의 삶을 평안하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그다음에 가야 할 길이 저절로 보인다고 했다. 사실 장자도 쓸모 있음과 없음에 대한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장자는 인간에 대한 투철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은 쓸모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사람은 언제나 어디가 안전하고 어디가 위험한지, 현재 전체적인 환경은 어떠한지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자는 후세에 매우 큰 교훈을 준다. 나중에 위진시대의 신도가는 추상적인 이론만 논하고 실제의 삶이나 사회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등 많은 비판을 들었다. 사실 이런 비판은 지나친 면이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쉽지 않았던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대개 선택은 어려운 일이고 유일한 기준은 존재하기 힘들다. 그 기준은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처세의 지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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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정을 다루는 두 가지 단계

 

감정을 다루는 데는 본질적으로 두 단계가 있다. 하나는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마음을 챙겨 인정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불필요한 고통은 대부분 이 두 단계 중 하나가 잘못되었거나 또는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에 생긴다.

 

스티브와 카린
스티브는 스포츠용품점 주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회복력이 있고 성공한 사람으로 여긴다.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면 그는 문제 해결 모드로 당당히 맞서고 자신의 감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이런 방식으로 사는 가운데 어떤 면에서는 모든 일이 잘 풀렸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해서 치료를 받으러 왔다. 사업에서는 잘 통하던 것이 인간관계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스티브는 가까운 친구나 배우자가 없었다. 친구나 배우자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인데 말이다.
카린은 스티브와 정반대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는 유명한 법률회사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거대한 조직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만 했다. 그러나 회사가 언제나 카린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맡은 업무에 대해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받지 못할 때마다 의기소침해진다. 이런 스트레스는 그녀의 직장 생활뿐만 아니라 사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친구와 동료가 그녀의 심한 감정 기복에 질려서 그녀를 떠나버리는 것이다.
스티브는 두 번째 단계, 즉 감정을 다루는 일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첫 번째 단계, 즉 마음을 챙겨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려운 상황을 수습하고 처리하느라 매우 바쁘게 시간을 보내지만, 문제의 정서적인 측면은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좀처럼 의식하지 못했다. 대처 능력이 뛰어난 것이 겉보기에는 스티브의 장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피한다. 자신의 감정에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의 대처 방법은 결국 헛다리만 짚는 것이다. 그는 나약한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인관계 능력이 떨어진다. 친해지는 데는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카린이 대처하는 방식은 스티브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 역시 첫 번째 단계에 문제가 있다. 강렬한 감정이 일어나는 걸 알지만 그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린다. 어느 정도는 그 사실을 알지만 마음을 챙겨 의식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감정을 의식하여 감싸 안지 못하고 그 감정에 함께 휩쓸려 가버린다.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감정에 너무 심하게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지어 “나 자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감정을 내가 어떻게 다뤄야 좋을까?” 하고 단 한 번도 자문해보지 않았다.
스티브와 카린은 매우 달라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 마음을 챙겨 자신들의 감정을 인정하는 첫 번째 단계에 문제가 있었다. 스티브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전혀 알려고 하지 않은 반면 카린은 자신의 감정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을 챙겨 감정을 의식했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심리치료사가 카린에게 감정을 의식해보라고 말하면 그녀는 웃을 것이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마음을 챙겨 자신의 감정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 감정에 묻혀 헤어나지 못한다. 마음챙김이란 한쪽에는 거부 그리고 다른 쪽에는 히스테리나 혼란이 있는 길에서 중도를 지키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생각과 감정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며, 생각과 감정은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 그리고 지속되지 않으며 우리가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는 것이다.
스티브와 카린은 어느 정도 자신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스티브는 자신을 강하고 현실적인 사업가로 생각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도대체 감정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에게 감정을 느끼는 것은 곧 나약함을 의미했다. 한편 카린은 자신을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매번 강렬한 감정이 일어나면 그녀는 그 감정을 자신이 나약한 증거로 치부했다. 자기감정에 사로잡혀 희생양이 된 것이다.
무상과 무아의 시각으로 보면 카린과 스티브가 자신들에 대해 품은 생각은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티브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 모두가 그렇듯 그도 자신의 나약함을 때때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감정은 그가 자신을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감정은 그를 약하게 혹은 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감정의 기복을 겪는다. 카린 역시 자신이 강하다는 감정과 더불어 약하다는 감정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이 약하다고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 때문에 강하고 유능하다는 감정이 거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약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했으므로 오히려 약한 감정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작은 감정의 물결이 거대한 지진해일로 둔갑해 그녀가 지닌 긍정적인 감정을 모조리 쓸어버린 것이다.
마음을 챙기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지킬 수 있다. 생각이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가장 심오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생각이란 결코 진실이 아니란 것도 안다. 생각은 모두 일방적이며 부분적이다. 약하고, 두렵고, 외롭거나 슬픈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며 우리가 누구라거나 세상이 어떻다는 식의 궁극적인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감정에 휩쓸려 웰빙과 행복까지 사라지게 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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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독제로서의 역할

 

마음챙김의 명료함과 고요함은 일반적으로 고통스러운 정서 상태를 치유할 수 있다. 마음챙김이 우리의 뒤흔드는 감정을 고요하게 해준다. 마음챙김으로 그 감정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길을 점차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에는 좀 더 구체적인 전략이 있다. 일반적인 치료법으로 이용하는 마음챙김과 더불어 더욱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해독제로서의 역할이다.
예를 들어 증오나 분노를 느낄 때, 사랑과 자비가 해독제 작용을 할 수 있다. 증오나 분노를 없애려면 우리를 화나게 한 사람도 우리처럼 고통을 피하고 행복해지려고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은 단지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그 행동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매우 왜곡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이 통찰의 이면에는 반드시 어떤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실을 충분히 생각하고 분명하게 알게 되면 우리의 화가 누그러질 것이다.
“적의 비사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한 슬픔과 고통을 보게 된다”고 미국의 시인 롱펠로(2000, 797)는 적었다. 살아 있다면 언제라도 경이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어려움을 잘 이용하면 자비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고통받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결국은 지혜롭지 못한 언행을 하거나 위험한 일을 하고 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이런 성향을 매우 명료하게 알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데 적용될 수 있다. 조금만 훈련하면 된다.
우리는 무상에 대한 가르침으로 화를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면 우리와 그 사람이 죽고 없을 미래를 상상해보라. 나처럼 그 사람도 결국 뼈나 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영원의 렌즈를 통해 화가 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사실을 분명하고 깊이 있게 인식한다면 우리의 화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슬픈 감정이 생긴다면 우리 삶의 좋은 것들을 상기하여 해독제를 준비하라. 현재 상황에서 좋은 것들을 마음에 떠올리고, 그것들에 집중하여 깊이 생각하라.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속에 다툼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내게는 슬픔을 느낄 자격이 없어. 왜냐면 다른 사람들이 가져본 적조차 없는 이렇게 좋은 것들 모두를 내가 누리고 있으니 말야” 하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 단지 슬픔에 주목하고, 마음을 챙겨 그 슬픔을 감싸 안고, 동시에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키우면 된다. 슬픔 그리고 고통과 더불어 행복이나 감사의 에너지를 키우고 그 행복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불행한 감정을 돌보도록 하면 된다.
우리가 아주 슬플 때 소외되고 분리되어 홀로 슬픔에 잠겨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내 고통과 내가 견디고 있는 상황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겪어보지 못했을 것처럼 느낀다. 그런 감정은 망상이지만 어떤 때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 그럴 때는 우리와 동일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생각하고 그들 모두에게 자애로움의 빛을 보낸다고 상상하라. 유산한 적이 있는 여인은 같은 일을 겪은 모든 여인에게 자애로운 빛을 보낼 수 있다. 이혼한 사람은 같은 이유로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애로운 빛을 보낼 수 있다. 심지어 특별한 이유 없이 슬픔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이유 없이 슬픔에 잠긴 모든 사람에게 자애로움의 빛을 보낼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곧바로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이제는 슬픔이 아직 남아 있더라도 그 슬픔의 성격은 이미 전과 다르다. 그 슬픔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는 대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투가 날 때는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필요할까? 우리의 친구가 더 좋은 차나 집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아니면 우리가 관리자인데 우리의 동료가 표창을 받거나 큰 액수의 보조금을 받았다고 해보자. 또는 우리가 작가인데 친구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도 사람이기에 “왜 내가 아니지? 왜 그런 좋은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 걸까?” 하는 감정이 들 것이다. 마음챙김은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이것은 부러움이다,” “부러움이란 감정이 여기 있다” 하고 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일단 부러움을 인식하고 나면, 이런 감정에 빠지는 것이 고통스러우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런 감정은 당연하고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런 생각은 저절로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이 사람의 좋은 일이 내게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지, 이 사람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깊이 생각해보자. 또한 이 사람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좋은 일이 이 사람에게 생겼다는 것은 정말로 반가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무아의 연습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기는 좋은 일이 내게 생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행복과 나의 행복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결국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내게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피를 당하거나 당황하게 될 때 최고의 나, 즉 우리의 좋은 성품과 우리가 이루어낸 성과를 떠올려라. 우리 내면의 불성을 떠올려라. 실망을 느낄 때는 우리 삶의 좋은 것들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이끌어내라. 고통스런 감정이 일어날 때는 그 감정과 다툴 필요가 없다. 대신 무엇이 해독제가 될지 찾아보고 지혜와 명료함으로 그 해독제를 불러와 그 해독제가 스스로 고통을 치료하도록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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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삼강육기와 화이지변

 

유학자들은 삼강육기와 화이지변에서 말하는 관계를 잘 세우면 대일통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삼강육기는 삼강오상三綱五常(삼강오륜이라고도 한다)을 기본으로 제기된 것으로 삼강은 공자와 맹자에게서 나왔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함을 강조했으며, 맹자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을 강조했다. 이로써 삼강사상의 기초를 다졌고 인, 의, 예, 지, 신 다섯 가지 덕 또한 공자와 맹자가 먼저 제창했다.
동한의 반고班固는 『백호통』에서 삼강육기의 아홉 가지 관계를 확립했다. 무엇을 삼강이라는 일컫는가? 군신, 부자, 부부를 말한다. 육기는 아버지, 형제, 친족, 사촌, 스승과 친구를 일컫는다. 그래서 임금은 신하의 강이 되고 아버지는 아들의 강이 되며 남편은 아내의 강이 된다. 또한 부모, 형제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육기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사촌 간에 의가 있어야 하고, 친족 간에 서열이 있어야 하며, 형제간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스승을 존경하고, 친구는 오랜 벗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강기라 하는가? 강綱은 장長이고 기記는 리理이다. 강이 대大가 되고 기가 소小가 된다. 그래서 위아래에 대한 인간의 도리를 바로 세울 것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이 다섯 가지 성정(五常只性)을 품고 친애의 마음을 갖는 건 기강을 세우는 것으로 그물에서 벼리로 그물코를 넓히는 것과 같다. 천인커는 “『백호통』이 주장하는 삼강육기설은 중국문화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의 의의는 추상적 이상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유사하다”면서 삼강육기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의 수제자 지셴린은 스승의 이 말에 처음에는 “삼강육기설이 어떻게 중국문화에 대한 정의란 말인가?” 하며 이해하지 못했지만, 훗날 여러 차례 고민한 끝에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삼강육기에는 애국정신이 들어 있다. 임금은 신하의 강이 된다(君爲臣綱)에서 인간인 임금이 어진가 하는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임금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것은 문화와 국가를 상징한다. 삼강육기는 실제로 국가와 국민, 부자, 부부, 부친의 형제, 자기의 형제, 친척, 모친의 형제, 스승, 친구 아홉 가지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 관계를 잘 세우면 국가는 자연스럽게 일치단결하게 되고 안정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대일통을 실현하려면 화이지변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이夷는 본래 고대 화하 가 이민족을 폄하해서 부른 명칭으로 동양의 민족에게 이 용어를 처음 적용하여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춘추시대 이후 중원中原(한족 본래의 생활 영역) 외의 민족을 각각 남만, 북적, 서융, 동이라 폄하해서 불렀고, 네 민족을 통칭하여 사이四夷라고 했다. 그러나 훗날 화와 이는 문명과 관련된 용어로 쓰였으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는 예의의 유무를 화와 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즉 이적夷狄(오랑캐)의 나라라도
예의를 지키면 화하민족처럼 동등하게 대우했다. 상대적으로 예의를 지키지 않는 화하민족은 신이적新夷狄으로 전락했고, 예의를 지키는 문명권은 모두 화하라는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중국의 고대사학자 양샹쿠이(양향규楊向奎)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하문명은 세계적인 위대한 문명으로 중국인을 응집하고 회귀시키는 힘이자 중국을 통일하는 구심력이다. 편협한 민족의식을 포함하지 않아서 모든 민족주의를 집어삼키지도 않는다. 화하문명은 민족의식의 승화이자 일종의 기준이다. 여기에 도달하면 중국 혹은 화하가 되고 낙후되면 이적 혹은 야만이 된다. 중국도 이적으로 퇴보할 수 있고 이적이 화하 혹은 중국으로 진보할 수도 있다. 이 화하와 이적은 특정 지역과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범주로 각 민족의 문화 수준을 평가해 대일통의 기준과 조건에 부합하는지를 보는 기준이다. 이러한 대일통이야말로 진정한 일통이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응집력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일통사상을 더욱더 확대 발전시켜야 하고 삼강육기
와 화이지변이 지닌 의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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