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손숙오孫叔敖 이야기

 

 

 

도가道家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춘추시대 5인의 패자覇者를 일컫는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하나로 꼽히는 장왕莊王(기원전 613~591 재위)을 도와 초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손숙오孫叔敖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통해 고통과 기쁨을 초월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손숙오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재상으로 재상의 자리에 세 차례나 올랐다가 물러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기史記골계열전滑稽列傳에는 우맹의관優孟衣冠이란 고사가 전해옵니다. '우맹이 의관을 차려 입다'라는 뜻의 우맹의관은 그럴 듯하게 꾸며서 진짜인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 또는 예술작품에서 남의 것을 모방하여 독창성과 예술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경우, 배우가 등장하여 어떤 일을 풍자하는 경우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됩니다. 우맹의관을 의관우맹衣冠優孟이라고도 하며 초나라의 재상 손숙오와 관련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악인樂人 우맹의 고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맹優孟이란 사람은 풍자하는 말로 사람들을 잘 웃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재상 손숙오는 우맹의 현명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잘 대해주었습니다. 손숙오는 병석에 누워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너는 틀림없지 빈곤해질 터이니, 우맹을 찾아가 '제가 손숙오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거라" 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의 아들은 과연 곤궁해져서 생계수단으로 땔감나무를 팔았습니다. 아들은 우맹을 찾아가 "저는 손숙오의 아들입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실 때 빈곤해지면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우맹은 손숙오처럼 의관을 갖추고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하여 1년쯤 지났을 때에는 손숙오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우맹은 장왕이 베푼 주연에 참석하여 만수무강을 축원했습니다. 장왕은 크게 놀라며 손숙오가 환생한 것으로 여기고 우맹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우맹은 아내와 상의한 뒤 사흘 뒤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사흘 뒤 우맹은 장왕을 알현하고 "아내가 초나라 재상은 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손숙오 같은 분은 충성을 다하고 청렴하게 생활하며 왕이 패자覇者가 될 수 있도록 보좌했지만, 그의 아들은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이 가난하게 살면서 땔감나무를 팔아 연명하고 있습니다. 손숙오처럼 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이 낫다고 생각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에 장왕은 잘못을 사과하며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침구寢丘 땅의 400호를 봉토로 주었다고 합니다.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청렴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 손숙오는 세 차례나 재상에 올랐지만, 재상의 자리에 오른다고 좋아하는 기색을 보인다든가, 물러난다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 기쁘지 않느냐는 질문에 손숙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재상이 됐다는 이유로 기뻐해야 하는가? 재상은 단지 관직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세. 순전히 나 때문에 기쁘다면 그것은 재상의 자리와 관계가 없네. 나의 고통과 기쁨은 바깥세상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네.” 이러한 손숙오의 의연함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인간의 욕구와 관심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인종, 종교, 성 혹은 정치적 지위에 상관없이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인간 그리고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평화와 자유 안에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우리는 특유의 지능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권 침해의 부작용
인권의 침해는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발전을 저해합니다. 그리하여 인권과 자유를 보호하는 일은 개인과 사회 전체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이 행복해진다거나 자신의 행복이 너무 중요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존재를 해침으로써 진정 이익을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
우리가 창조적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특질을 빼앗기는 셈입니다. 인권 학대의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은 종종 가장 재능 있고, 헌신적이며, 창조적인 인물들입니다.

 

사랑과 연민의 양성
더 살맛 나고 평화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비결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우리보다 불행한 환경에 처한 형제, 자매에 대한 관심을 키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민간단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존중할 필요성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인권 침해의 희생자들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전 지구적인 시각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국가의 행위가 국경을 넘어 멀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니까요.

 

인권과 자유에 따른 책임감
우리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인권과 자유를 요구한다면 책임감 또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평화와 행복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수용한다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근본적인 인권을 존중하는 일은 이상이 아닌 모든 인간 사회가 갖추어야 할 기본 토대입니다. 보편적인 구속력을 지닌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서약에 명시된 인권의 기준을 수용하는 것이 인권이 축소되는 이 시대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권 존중은 유럽이나 미국 대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만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합니다.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어떻든 모든 인간은 위협받거나 수감되거나 고문받을 때 고통을 느낍니다. 인권 문제는 근본적으로 매우 중요하므로 이 관점에 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인권 존중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이 권리의 정의에 대한 전 지구적인 합의를 강력히 주장해야만 합니다.

 

독재와 전체주의 체제
이러한 체제는 자국민을 장기적으로 더욱 이롭게 한다는 보편적인 원리를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급격한 변화에서 인권의 승리가 필연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폭력이라도 자유와 존엄에 대한 인간의 기본 욕망을 진압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귀중한 자유의 공기를 호흡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형제, 자매가 난폭한 대우를 받을 때 저항하는 것은 지구 인류가족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평등의 원리
평등의 원리, 즉 인권 개념의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 진지하다면, 오늘날의 경제적 격차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이가 존엄을 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행동으로 옮겨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자원을 더욱더 평등하게 분배할 방법을 모색할 책임이 있습니다. 현재 세계에서는 인권과 민주적 자유를 향상시키기 위한 대규모의 대중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더욱더 강력한 정신적인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압제적인 정부와 군대가 그 힘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국가, 국민, 개인이 인권과 자유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고, 탄압, 인종주의, 경제적 착취, 군사적 점령, 다양한 형태의 식민주의와 외국 통치에 저항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온당한 일입니다. 정부는 말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요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장자莊子가 이해한 요임금

 

 

 

고대 중국의 오제五帝 중 하나인 요임금은 전설의 임금입니다.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에 의하면 고대 중국은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고, 평화스러웠으며, 농사가 잘되어 백성이 임금의 존재를 모를 만큼 요임금이 선정을 베풀었고, 그 뒤 중국 역대 제왕들의 본보기가 될 만큼 성군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요임금과 다음의 순임금 시대는 태평성대로 중국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임금은 어질기가 하늘과 같고 지혜가 산과 같아서 사람들이 가까이 접할 경우 그의 성품이 인자하기가 태양을 우러러봄과 같았다고 합니다.

요임금은 평양부平陽府 산서성山西省에 도읍을 정하고 자신이 거주할 궁전 지붕을 띠로 덮으면서 그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고, 궁전의 층계를 흙을 만들었는데 세층밖에 되지 않았는데, 과거 천자들이 나무나 돌로 만들어 아홉층으로 한 것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모습입니다. 말이 궁전이지 허름한 초가와 같았으며 기둥과 서까래는 손수 산에서 잘라온 나무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나물국과 거친 밥을 먹었으며, 옷이라고 해야 허름한 삼베옷 하나였고, 추운 날에는 사슴 가죽을 걸쳤습니다. 임금이 이처럼 소박하게 살자 백성은 문지기 같은 말단 관리도 그보다 낫게 산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요임금은 총명하고 인정이 많았고 근검과 절약이 몸에 배었으며, 하늘의 뜻을 받들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정치를 행했으므로 백성 모두가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백성 중에 끼니를 잇지 못하는 자나 옷을 입지 못하는 자, 그리고 잘못을 범한 자가 있으면 그는 입버릇처럼 모두 내 탓이지,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하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요임금은 백성의 모든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기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1백 년 동안 한발과 홍수가 수없이 닥쳤어도 그를 원망하는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장자莊子에 요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그가 요임금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게 해줍니다. 한 번은 요임금이 지방에 시찰을 나갔고, 그가 화지역에 당도했을 때 그 지역 관리가 말했습니다.

성인이 오셨으니 제가 축원을 해드리고 싶습니다하고 말한 뒤 첫째로 장수를 축원하려 하자 요임금은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둘째로 부유해지기를 축원하려 하자 이것도 거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많이 낳기를 축원하려 하자 이마저도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 관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임금님께 보통사람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장수와 부, 그리고 많은 아들을 기원해준다는데, 왜 싫다고 하시는 겁니까?”

요임금이 말했습니다. “아들이 많으면 나중에 다 키워서 무슨 일을 시키겠는가?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근심도 는다네. 돈도 마찬가지라네. 어디서 듣고 자꾸 달라고 찾아올 터이니 많을수록 골치만 아프지. 장수 또한 마찬가지일세. 너무 오래 살면 고역이 아니겠는가.”

기분이 상한 관리가 말했습니다. “저는 임금님께서 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평범한 군자일 뿐이군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할 일을 정해준다고 하니 아들이 많다면 그냥 하늘이 정한 일을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려서부터 학문을 열심히 갈고 닦아 사회생활을 순조롭게 시작했는데 적합한 일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력만 한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분명 하늘이 모두에게 각자 알맞은 자리를 마련해줄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이 많으면 각자의 소질에 맞는 일을 찾게 하면 되지요. 또 돈이 많으면 모두와 나눠 쓰면 되지 않습니까?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장수는 왜 싫다는 겁니까? 태평성세에 오래 살면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으니 좋고, 혼란한 때는 은거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1천 년 정도 은거하다가 지겨워지면 비조를 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1천 년 정도 살면 행동의 제약도 없어지고 초탈한 상태일 터인데 무엇이 고역이란 말씀입니까?”

그러나 요임금의 생각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생명을 유지하는 노인으로 장수하는 건 분명 고역입니다. 장수와 부, 아들이 많은 건 하나같이 모두 번뇌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고통과 기쁨이 일념지간一念之間의 차이입니다. 일념지간은 본래 불교의 용어로 마음을 지칭합니다. 불교에서는 세상에 고통도 기쁨도 없다고 말합니다. 번뇌하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고통이고 평온한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고통도 기쁨도 없습니다. 새옹지마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통과 기쁨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장자는 보통사람을 상징한 관리와 요임금을 비교하여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고통과 기쁨이 도인인 요임금에게는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윤리를 상실한 정치, 도덕적 타락을 멈추려면

 

관광산업의 육성

 

개인 간 교류를 증진시키기 위해 저는 국제 관광산업이 더욱더 육성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대중매체는 인류의 궁극적인 일체성을 반영하는 인간미 넘치는 품목을 많이 보도함으로써 세계평화에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국제 조직, 특히 유엔이 인류에 최대의 혜택을 보장하고 더욱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국제적인 이해를 향상시키기를 바랍니다. 유엔은 작고 압제받는 나라의 유일한 희망이며 크게는 지구의 희망이므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아야 할 국제기구입니다. 저는 초국가적인 조직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경제발전과 지역 안정이 미흡한 지역에서 말입니다.

 

윤리를 상실한 정치
윤리를 상실한 정치는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도덕적인 삶은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종교와 윤리는 정치와 상관이 없으며, 종교적인 사람은 은둔자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통념에 저는 의문을 갖습니다. 종교에 대한 그러한 관점은 너무 단편적이어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생활 속의 종교의 역할에 대한 적절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윤리는 종교 수행자뿐만 아니라 정치가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가와 법이 도덕 원칙을 망각한다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도덕적 타락을 멈추려면
도덕적 타락을 멈추라고 떠들썩하게 요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뭔가 해야만 합니다. 이 시대의 정부들은 ‘종교적’ 책임을 짊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도주의와 종교 지도자들이 현존하는 시민,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조직들을 강화하여 인간과 종교 가치를 부활시켜야만 합니다. 필요하다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창설해야 합니다. 희망하건대 그래야만 세계평화를 위해 더욱더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동료 시민들의 고통을 나누세요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동료 시민들의 고통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적에게도 연민과 관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높은 진실성과 희생정신에 입각해 살아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궁극의 목적은 인류에게 봉사하고 인류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단지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목적이 아닌, 모든 존재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쓰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각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종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종교나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실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루며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목표이므로 공동체에서 도망치면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점검과 자기 수정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한편, 자기 자신 또한 주의 깊게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된 길로 빠진 걸 발견하면 즉시 수정해야만 합니다.

 

물질적 발전의 한계
사람이 우선한다는 전제하에 물질적 발전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진보를 영적 성장과 결합하고 조화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 역시 알아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형태를 띤 물질주의적 지식이 인간의 행복에 크게 기여해왔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어느 나라보다 기술이 발전한 미국에서도 아직 물질적 고통은 매우 큽니다. 이는 물질주의적 지식이 물리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행복만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주의적인 지식은 외적 요소와 구별되는 내적 발전에서 비롯된 행복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 회복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고 영구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의 인도주의적 유산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심 어린 호소
지금까지 쓴 내용은 제가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는 생각입니다. ‘외국인’을 만날 때면 저는 언제나 “인류가족 중의 한 사람을 만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런 태도를 지니면 모든 존재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더욱 깊어집니다. 이러한 자연스런 소망이 세계평화에 작게나마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행성에 사는 인류가족이 더욱더 다정하고,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고통을 싫어하고 영구적인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이들을 향한 저의 간절한 호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순리를 따르면 고통이 기쁨으로 변한다

 

『장자』에는 재미있는 묘사가 많은데 아주 비참하게 그려진 인물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지리소支離疏라는 사람은 이름만 들어도 신체에 큰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리소는 몸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장자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심각한 곱사등이로 머리는 넓적다리 사이에 있고 등은 완전히 굽었다. 게다가 오장은 모두 등에 몰려 있어 사람의 형상이라고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는 재봉일과 빨래를 하며 먹고 살았는데 키질을 해 겨를 골라내는 일까지 한다면 열 사람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는 관에서 징병할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징병소 앞을 거닐었다. 장애가 있는 자신은 절대로 징병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에서 장성을 축조하거나 수로를 건설해야 해서 부역이 필요할 때도 그는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지만 구제품을 나눠줄 때는 제일 먼저 달려가 줄을 섰다. 그렇게 해서 장작과 쌀을 약간씩이나마 배급받을 수 있었다. 장자가 이 이야기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지리소처럼 심각한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도 자기 나름의 생존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리소의 삶이 너무 비참하고 고통스럽다고 말할지 몰라도 지리소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지리소는 온몸이 다 뒤틀린 심각한 신체적 장애가 있었다. 그런데 만약 하늘이 그의 왼쪽 어깨를 닭으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그 어깨로 날이 밝았음을 알렸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구슬로 만들었다면 그는 새를 잡아 구워먹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이렇듯 몸이 어떻게 변하든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적절한 생존법을 찾아낼 수 있다. 본래 세상일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렇기에 지리소는 아무리 남들이 고생스럽다고 생각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조물자造物者를 서양철학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조물주이자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하느님과 혼동하는데 사실은 같지 않다. 조물자라는 말은 『장자』에 3, 4번 이상 나온다.
『장자』의 「천하편天下篇」에서 장자는 자신이 바라는 경지를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위에서는 조물자와 함께 놀고 아래에서는 생사를 초월한 자를 벗으로 삼는다.”
하늘에 올라가서는 조물주와 함께 노닌다는 것으로, 여기서 조물자는 바로 도다. 왜 도를 조물자로 표현했을까? 바로 도가 만물을 낳았기 때문이다. 조물자라는 말 중 자者 자는 중국어에서 인격을 가진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조물자는 사람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물자는 인간의 역할을 하여 당신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장자는 남들이 보기에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가졌거
나 다리 한쪽만 남아서 고통스러워 보일지라도 자신이 그것을 고역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했다.

 

만족할 줄 알면 늘 즐겁다.
‥‥‥ 노장의 지혜 ‥‥‥

 

보통 인생의 행복과 기쁨은 부귀영화나 명예 등 남보다 우월한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월한 조건을 많이 가졌다고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보다 근심이 많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많았으면 하고 오직 그 바람 하나만을 품지만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위나 권력도 마찬가지다.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가지면 가질수
록 고민도 늘어난다. 국가 전체 혹은 사회 전체를 고려해야 하고 어디든 문제가 생기면 밤낮없이 고민해 가장 빨리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명성을 지키고자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장자』에 명성을 위해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만 결국 건강이나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또한 타인의 눈에 비참해 보이는 심각한 장애를 가진 인물이 자유롭게 살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인물이 늘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부나 명예에 집착하며 살아야 할까?

노자는 만족할 줄 알면 늘 즐겁다고 했다. 만족하는 지혜를 발휘해 늘 즐거워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족할 줄 안다는 말이 이상의 추구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이 말은 무한한 욕구와 유한한 자원 사이에서 평형점을 찾는다는 뜻이다. 이 역시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기쁨은 많고 고통이 적은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의 이야기는 이에 관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