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순리를 따르면 고통이 기쁨으로 변한다
『장자』에는 재미있는 묘사가 많은데 아주 비참하게 그려진 인물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지리소支離疏라는 사람은 이름만 들어도 신체에 큰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리소는 몸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장자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심각한 곱사등이로 머리는 넓적다리 사이에 있고 등은 완전히 굽었다. 게다가 오장은 모두 등에 몰려 있어 사람의 형상이라고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는 재봉일과 빨래를 하며 먹고 살았는데 키질을 해 겨를 골라내는 일까지 한다면 열 사람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는 관에서 징병할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징병소 앞을 거닐었다. 장애가 있는 자신은 절대로 징병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에서 장성을 축조하거나 수로를 건설해야 해서 부역이 필요할 때도 그는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지만 구제품을 나눠줄 때는 제일 먼저 달려가 줄을 섰다. 그렇게 해서 장작과 쌀을 약간씩이나마 배급받을 수 있었다. 장자가 이 이야기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지리소처럼 심각한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도 자기 나름의 생존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리소의 삶이 너무 비참하고 고통스럽다고 말할지 몰라도 지리소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지리소는 온몸이 다 뒤틀린 심각한 신체적 장애가 있었다. 그런데 만약 하늘이 그의 왼쪽 어깨를 닭으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그 어깨로 날이 밝았음을 알렸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구슬로 만들었다면 그는 새를 잡아 구워먹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이렇듯 몸이 어떻게 변하든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적절한 생존법을 찾아낼 수 있다. 본래 세상일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렇기에 지리소는 아무리 남들이 고생스럽다고 생각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조물자造物者를 서양철학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조물주이자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하느님과 혼동하는데 사실은 같지 않다. 조물자라는 말은 『장자』에 3, 4번 이상 나온다.
『장자』의 「천하편天下篇」에서 장자는 자신이 바라는 경지를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위에서는 조물자와 함께 놀고 아래에서는 생사를 초월한 자를 벗으로 삼는다.”
하늘에 올라가서는 조물주와 함께 노닌다는 것으로, 여기서 조물자는 바로 도다. 왜 도를 조물자로 표현했을까? 바로 도가 만물을 낳았기 때문이다. 조물자라는 말 중 자者 자는 중국어에서 인격을 가진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조물자는 사람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물자는 인간의 역할을 하여 당신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장자는 남들이 보기에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가졌거
나 다리 한쪽만 남아서 고통스러워 보일지라도 자신이 그것을 고역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했다.
만족할 줄 알면 늘 즐겁다.
‥‥‥ 노장의 지혜 ‥‥‥
보통 인생의 행복과 기쁨은 부귀영화나 명예 등 남보다 우월한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월한 조건을 많이 가졌다고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보다 근심이 많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많았으면 하고 오직 그 바람 하나만을 품지만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위나 권력도 마찬가지다.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가지면 가질수
록 고민도 늘어난다. 국가 전체 혹은 사회 전체를 고려해야 하고 어디든 문제가 생기면 밤낮없이 고민해 가장 빨리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명성을 지키고자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장자』에 명성을 위해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만 결국 건강이나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또한 타인의 눈에 비참해 보이는 심각한 장애를 가진 인물이 자유롭게 살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인물이 늘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부나 명예에 집착하며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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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만족할 줄 알면 늘 즐겁다고 했다. 만족하는 지혜를 발휘해 늘 즐거워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족할 줄 안다는 말이 이상의 추구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이 말은 무한한 욕구와 유한한 자원 사이에서 평형점을 찾는다는 뜻이다. 이 역시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기쁨은 많고 고통이 적은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의 이야기는 이에 관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