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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정신적인 독립체l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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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10-12 17:08

https://blog.aladin.co.kr/797865117/5904899

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정신적인 독립체
정신적인 독립체가 되기에 적합한 어떤 것을 마음의 중대한 원인이라고 부릅니다. 육체는 단지 마음을 조금 확장하거나 수축하는 협력 조건의 역할을 합니다. 육체는 마음의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아닌 것이 마음이 되거나 마음이 마음이 아닌 것이 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형체 없는 마음의 변화
형체 없는 마음의 변화는 물리적인 변화와는 다릅니다. 감정이 없는 물질은 형체 없는 지각력과 의식이 될 수 없습니다. 일례로 지식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지성적인 부모가 바보 같은 자식을 갖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생에서 비롯된 마음
부모의 몸이나 마음의 인자가 이생에서 자식의 마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전생에서 비롯된 마음이 현생의 마음의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현재 부모의 정액과 피는 몸의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과거 생의 성향
현재 생의 성향은 전생에서 음식을 먹고, 욕망하며, 미워했던 습관의 힘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과거의 습기濕氣(육음六淫의 하나, 육음이란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燥, 화火 여섯 가지 병사病邪를 종합하여 이르는 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스승 마트르체타Matrcheta가 쓴 『탄생의 화환 이야기Garland of Birth Stories』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갓 태어난 사람은 마음에 기운이 없고

감각이 무디며 빨아댈 엄마의 젖과
먹을 음식을 찾느니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른 생에서도 분명 이러한 일에 익숙하나니.

 

자식과 부모의 관게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전생의 업보karma에 의해 설정됩니다. 결과적으로 갓난아기, 송아지 등은 배우지 않아도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젖을 빱니다.

 

지식의 대상
전생과 내생이 지식을 갖는다는 생각 또한 타당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대상은 관습적인 진리와 궁극적인 진리 두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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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자아, 무아, 그리고 타인l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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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10-12 17:01

https://blog.aladin.co.kr/797865117/5904884

 

 

 

자아, 무아, 그리고 타인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는 순간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붓다

 

 

우리 문화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다. 모두가 자기만족에만 몰두하고, 자신을 아끼며 저마다 앞다투어 자신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직업과 인간관계만을 원한다. 좋은 옷과 잘 꾸며놓은 집, 최상급 원두커피, 고급 승용차, 환상적인 여행을 원하고 거의 쓰는 일이 없더라도 최고급 장비를 구비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욕망의 영역으로 불교의 세계관에서 맨 아래에 있는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인 욕계欲界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층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자애로우며, 진정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데는 매우 서투르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과도하게 표출하여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자기혐오를 가까스로 숨기고 있는 것이다. 심리치료사라면 누구나 자기애 결핍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해보았을 것이다. 마시가 좋은 사례다.
마시는 천성적으로 타인을 돌보는 성격이다. 헌신적인 간호사이자 헌신적인 아내이며, 또한 딸이고 엄마다. 남편은 변호사로 권위적인 사람이다. 집안 모든 일은 남편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녀는 직장 일에다 아이를 돌보고 까다로운 남편 비위까지 맞추느라 지치고 고통스럽다.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고 자신을 돌보는 일은 거의 없어서 그녀는 타인에게 도움이나 조언을 구하는 일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마시가 어린 시절 겪었던 마음 아픈 기억에서 자기애 결핍이 생기게 된 깊은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다섯 살 때, 그녀의 아버지는 전에 없이 그녀를 데리고 쇼핑을 갔다. 그리고 원하는 장난감은 무엇이든 사주겠다고 말했지만 마시는 조용히 머리만 흔들 뿐이었다. 선물을 받을 줄 몰랐던 것이다. 선물이라는 생각 자체로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종교적인 근본주의에 따라 언제나 타인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때문에 그녀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웠다.
연로한 어머니가 폐암 진단을 받자 마시는 지체 없이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면서까지 어머니를 보살폈다. 겉으로는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방법을 상상하는 일조차 어려웠다.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자신을 위하는 일이나 어머니를 돌보는 다른 방법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가 누군가를 돌보면서 행복해한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 아니겠냐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살면서 의미를 느끼고 행복하다면 누가 감히 말리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삶은 아니겠지만, 마시만 좋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문제는 마시가 이런 삶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자신이 한 결정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한없이 불쌍하게 느끼고 화를 냈다. 그녀는 자유의지로 무엇인가를 결정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늘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의무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스스로 돌보고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배우거나 아니면 억울함과 분노를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는 몹시 분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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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다l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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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10-12 10:50

https://blog.aladin.co.kr/797865117/5904210

철학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나이절 워버턴 지음, 박수철 옮김 / 지와사랑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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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철학이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들이 철학의 개념들을 다룰 때는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기자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접근해야 한다. 철학공부를 한다는 건 철학적 사고를 배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를 공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시를 공부하는 사람은 굳이 시인처럼 시를 지을 필요가 없다. 대신 시를 날카롭게 비평하는 방법만 배우면 된다. 시에 관한 비평을 시처럼 쓸 필요도 없다. 실제로 소네트를 지을 수는 없어도 소네트를 공부할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구태여 그림을 잘 그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림과 조과 건축물을 감상하는 방법과 그것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면 족하다. 그러나 철학은 다르다. 예를 들면, 모든 철학 논술은 그 자체로 철학의 일부다. 논술에서는 어떤 주장을 펼쳐야 한다. 굳이 깜짝 놀랄 만한 독창적인 주장일 필요는 없다. 다만 적절한 논증이 요구된다. 논술을 할 때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듯이, 우리도 자신의 견해를 주장해야 한다. 즉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들의 위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논술을 쓰는 학생은 자신의 위치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며 비판하고 제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철학은 물리학이나 역사학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를테면, 지금 물리학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은 과거의 위대한 물리학자들과 동일한 종류의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나름의 역사연구에 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철학적 사고를 외면할 수 없다.
철학을 읽을 때, 들을 때, 논할 때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철학자로서 읽어야 하고, 철학자로서 들어야 한다. 철학을 논한다는 건 단순히 철학에 관한 토론이 아니라 철학적 토론을 뜻한다. 이것은 철학이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학문의 자리에 오른 여러 가지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단순히 타인의 생각을 배우는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철학자로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는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철학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철학공부는 다른 철학자들의 발언과 그것의 맥락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철학자로서 철학의 과거를 공부하는 목적은 무미건조한 개념으로 가득한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철학의 과거를 공부하는 진정한 목적은, 오늘날의 철학에 기여하고 적어도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문제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철학과에서 르네 데카르트 같은 17세기 철학자에 관한 수업을 듣게 되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과 회의론에 관한 그의 견해를 다루게 될 것이고, 생각이 존재를 입증한다고 주장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Cogito.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견해, 즉 사유를 갖는다는 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견해를 배울 것이다. 우리는 단지 데카르트의 지적, 역사적 맥락에 관한 사실이나 그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 자체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역사적, 인생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까닭은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한 것, 그가 반대한 견해, 그가 활용한 중요한 모델 등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의 저작물이 갖는 문헌적 가치에 집중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의 문맥과 문체를 비롯한 데카르트의 모든 측면들은 그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도 필요하다. 그러나 궁극적 목표는 오늘날까지 이어진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의 시발점을 제공하고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데카르트의 주장을 이해하고 논하는 것이다.
전공자로서 철학 강의를 듣는 것은 철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과정이다. 사상의 역사는 공부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지식의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활동이다. 이는 철학이 무척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학문인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갈고 닦는 여러 기술들은 철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응용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자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 사상가와 단순한 학자의 차이

수동적으로 습득한 진리는 의족과 틀니와 밀랍 코, 혹은 타인의 살집으로 성형한 코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 자신의 사고를 통해 획득한 진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팔다리와 같다. 바로 여기에 단순한 학자와 사상가의 차이점이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의 지적 자산은 적절한 명암, 일관된 색조, 완벽한 색의 조화를 자랑하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다. 반면 단순한 학자의 지적 자산은 다양한 색상을 자랑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조화, 순서, 중요성 등이 없는 커다란 팔레트 같다.
철학적 사고를 배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 네 가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 네 가지 습관은 어떤 공부를 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적극적으로 읽기
■ 적극적으로 듣기
■ 적극적으로 토론하기
■ 적극적으로 글쓰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 네 가지 습관을 적절히 조합해 실천함으로써 나름의 철학적 기술을 다듬어왔다. 물론 소크라테스 같은 예외도 있다. 알다시피 그는 철학과 관련한 글을 남긴 적이 없지만, 탁월한 토론 능력 덕분에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심각한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독순술, 동시수화, 동시자막 등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도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철학 전공자들은 이 네 가지 활동을 적절히 구사해야 그들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내가 강조하는 건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읽기, 적극적인 듣기, 적극적인 토론, 적극적인 글쓰기다. 앞서 강조한 대로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라 오히려 쉽게 만족되지 않거나 아주 신나는 실천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보다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이며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주제를 이미 철학적으로 사고한 바 있는 사람들의 빛나는 업적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기본적 수단들을 배우고 그것들을 적용하면 더 쉬워진다. 한 사람의 정체된(진부한) 사상가가 되기는 쉽다. 그런 사상가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정으로 사고하기를 외면한 채 타인의 말과 글을 단지 암기하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소극적 방식에 안주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터득하면, 그것을 삶의 여러 영역에 응용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철학이 다른 모든 학문에 비해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이끌어내고, 검토하며, 검증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치밀하게 사고한다. 결론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한 주제를 다룰 때조차도 그들의 글에는 진정한 힘이 실려 있다. 이처럼 적극적인 철학 공부는 보답과 보람이 뒤따르는 경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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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아름다운 인연이 주는 감동'l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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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10-11 12:49

https://blog.aladin.co.kr/797865117/5902622

마태 김의 메모아 - 내가 사랑한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
김정준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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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김의 메모아: 내가 사랑한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에 붙여서

'아름다운 인연이 주는 감동'

환기미술관장 박미정

 

 

우리 모두 인생에 사연事緣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와 우리가 만난 사람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설명해준다. 우연한 만남이든 의지에 작용한 필연의 만남이든 사연은 인연因緣이 되어 인생의 근저를 형성하는데, 세월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이를 운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인연은 인생을 구체적으로 조명해주는 또 다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인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과 그 기쁨에 대하여.

피난지에서 시작된 인연

김마태 박사가 수화 김환기 화백을 처음 만난 건 한반도를 순식간에 공포의 땅으로 만든 한국전쟁 중 1951년 부산에서였다.

부산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남하할 수 있는 한반도의 끝자락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많은 이들이 그곳 피난지에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연으로 수놓아지는 인생은 피난지에서도 계속되었다. 예술가들의 삶도 생소한 환경과 궁핍 속에서도 인연을 통해 한결같이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갔다. 김 박사의 부인 전재금 여사는 소설가였던 어머니 김말봉 여사를 통해 일찍이 40년대 중반부터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를 잘 알고 있었고, 당시 문인들과 교류가 잦았던 김 화백과도 어울리곤 했다. 문인들은 주로 찻집(다방)에서 모이곤 했는데, 이런 전통은 해방 후 서울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과거 유럽에서의 카페문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예술가들의 사교 장소, 창작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부산으로 피신한 예술가들 역시 만남의 장소를 물색하여 그들의 단골 찻집을 만들었다. 서울 장안의 유명했던 음악다방 르네상스가 부산으로 이전해와 예술가들의 안식처가 되었으며, 금강다방, 온달다방, 밀다원, 야자수, 녹원다방 등은 예술가들의 대표적인 창작과 친교의 공간이었다. 김 화백 부부가 자주 찾던 금강다방에는 김동인, 조병화, 조연현 등 문인들과 이중섭, 백영수 등 화가들이 늘 진을 치고 있었다. 녹원다방, 온달다방, 밀다원 등에서도 예술가들의 만남이 잦았다. 찻집은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예술가들은 날이 밝으면 찻집에 와서 정보를 교환하고, 글을 쓰고, 작품 발표의 기회를 성립시키면서 피난지에서의 암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김마태 박사와 김환기 화백 부부의 첫 만남은 부산의 길거리에서였다. 피난지 거리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두 사람의 운명적인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그날 김 박사와 김 화백의 눈인사는 두 사람의 여생에 선명한 빛으로 남을 회고의 출발점으로서 두 사람의 만남을 인연으로 발전시켰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인생이 운명적으로 연결되었고 두 사람 모두 그 인연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각자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김 화백 부부는 영도에 위치한 일본식 가옥 다락방에 세 들어 있었다. 전재금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비록 난리통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김 화백 부부의 집안은 늘 정갈했고, 김향안 여사는 풀을 먹여 손질한 모시적삼을 단정하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궁색하고 비좁은 다락방에서의 불편한 삶이었지만, 김 화백은 창작의지를 꺾지 않고 드로잉과 수채화와 유화를 제작하였으며 전시에도 참여하였다. 김마태 박사는 1951년 뉴-서울 다방에서의 전시회를 두 번이나 관람했다. 거리에서 시작된 인연이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져 훗날 먼 이국땅 미국으로까지 연결되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일생에 자리 잡게 된다.

미국에서 꽃피운 인연

1953년 6월에 도미한 김마태 박사는 첫 10년을 뉴욕에서 보내게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한 김 박사는 18세기 이탈리아 화가로 신화와 성서를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긴 티에폴로의 회화에 감동을 받아 김환기 화백에게 엽서를 보냈다. 엽서에 화답하듯 김 화백은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관 커미셔너 겸 작가로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인 1963년 10월, 뉴욕에 도착했다. 서구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들러 생생한 현장을 직접 느끼고 자신의 미학적 위치를 점검하고자 한 김 화백은 부산 피난시절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이탈리아계 미국인 브루노를 만나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듬해 봄, 김 박사의 보증 겸 추천으로 김 화백은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맨해튼 서쪽 73가 160번지 유서 깊은 아파트에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겸한 스튜디오를 얻게 되었다. 록펠러재단은 2년 동안 그의 건강보험까지도 해결해주었다. 그로부터 타계할 때까지 김 화백은 뉴욕을 떠나지 않고 귀국할 기회를 미룬 채 작업에만 매진했다. 김 화백과 김 박사 두 가족은 타국에서 자주 어울리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고, 생활의 힘겨움을 위로하였으며, 예술을 공유하고, 인생의 고된 여정을 서로 응원하며 지냈다.

뉴욕에 정착하게 된 김 화백은 거침없이 생기발랄한 도시의 풍경과 황당하리만치 모든 것이 풍요로운 환경 속에 자리 잡은 현대미술의 중심지에서 철저한 작가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작품세계를 정리하고 끊임없는 도전으로 재료를 실험하고 조형에 대한 탐구에 열중하였다. 물론,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예술가의 삶은 곤궁과 고달픔의 연속이었으리라. 김 화백은 부둣가에서 짐을 나르는 노동을 하면서 “내가 미국에서 배운 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고 전재금 여사는 회상한다. 김 화백은 넥타이를 제조하는 봉제공장에서도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급여를 받으면 맥주 버드와이저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곤 자유와 행복을 함께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회화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연구에 바친 열정과 동료, 후배 예술가들의 관계에서 보여주던 호쾌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있어서 김 화백은 강한 생활력을 갖지 못했고 작업준비와 의식주의 유지를 대부분 아내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형국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삶의 기반을 마련하는 굳센 기질을 지닌 김향안 여사였지만, 그녀 역시 김마태 박사를 많이 의지하였다. 김 여사가 뉴욕에 타고 온 비행기표의 외상값을 갚아준 이도 김마태 박사였다. 1960년대, 머나먼 이역 땅 뉴욕에서 예술가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궁색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김 여사는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고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일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실행해나갔으며, 김 화백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장벽이라도 뛰어넘을 자세로 임해 용맹스러운 행동을 감행했다. 김 화백이 자신을 찾아온 후배들과 한 잔 하겠다며 술상을 요청하면 비록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에서도 외상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했으며, 김 화백이 작업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루는 조각가 한용진과 화가 문미애 부부가 집을 짓기 위해 자재를 구입할 돈을 마련하자 바로 김 여사는 김 화백 작품을 상파울로 전시회에 보내기 위해 그들이 마련한 돈을 모두 가져갔다. 김 화백이 지닌 예술 혼과 김 여사의 불굴의 의지를 주변 사람들은 존경과 존중으로 일관하였으며 그들 부부에게 늘 협조적이었다. 뉴욕에서 다시 만나게 된 그들 모두의 인연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가운데 그들 모두의 삶이 견고하고 융성해졌다. 그리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뉴욕에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계가 터전을 잡고 형성되었다.

 

맨해튼 73가에 위치한 김 화백의 스튜디오가 제작이 끝난 많은 작품들을 모두 걸기에 비좁다는 이유도 있지만 김 화백은 새로 완성한 작품이나 마음에 드는 작품을 김 박사 댁 거실에 걸어두고 감상하기를 즐겼다. 그는 김 박사 댁 거실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 것을 자연스런 일로 여겼는데, 그만큼 김 박사 부부를 가족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묵묵히 작업에만 몰두하지만 김 박사 집에 가면 거실에 앉아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고 또 다른 작품으로 바꾸어 걸기도 하면서 김 박사 부부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뜰에 나가 수영도 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작업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달밤의 섬>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품으로 김 박사의 거실에 반년 이상 걸려 있었다. 이 작품은 김환기 부부가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전재금 여사가 소개한 친구가 고른 작품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김 화백의 작품이 막 추상으로 전환된 시점이라서 구상화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달밤의 섬>을 마음에 들어 하자 김 화백은 “아 그것이 마음에 들어요? 다음에 내가 좋은 그림을 그리면 그때 바꿉시다”라고 당부했고 김향안 여사는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여 그분을 대접했다. 후에 약속대로 김향안 여사가 푸른 색조의 점화작품으로 바꾸어주고 <달밤의 섬>을 찾아갔다. 이 작품은 현재 환기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렇듯 김 박사의 거실에 자리 잡았던 김 화백의 여러 작품이 현재 환기미술관에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 <우주Universe> 역시 30여 년간 김 박사 댁 거실에 걸려 있던 작품이다. 뉴욕에서 김 화백의 회화가 인정받게 된 것은 포인덱스터 갤러리에서 <우주>를 소개하고 그것을 『뉴욕타임즈』가 호평한 후부터라고 김 박사는 말한다.

김 화백은 미국으로 건너간 1963년부터 타계한 1974년에 이르는 소위 ‘뉴욕시대’를 통해 가장 원숙하고 완성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초기부터 부단히 추구해온 산, 달, 강, 새, 나무 등 자연풍경의 구상성을 더욱더 단순화하여 종국에는 점, 선, 면 등 극도로 절제되고 응축된 조형미로써 심화된 추상의 세계를 구현했다. 1950년대 드로잉에서 간간이 나타났던 점과 선의 조형적 실험이 1970년경 본격적인 전면점화全面點畵로 나오기까지 엄청난 양의 소재와 구성적 실험으로 이뤄졌다. 점, 선, 면의 다양한 조형적 실험은 산월추상, 십자구도, 색면추상 등의 방법과 종이죽을 사용한 오브제작품을 비롯하여 신문지, 한지, 포장용 기름종이 등 다양한 재질감의 시도로 추구되었으며, 입체와 평면의 장르를 막론하여 풍요롭게 제작되었다. 김환기 미학의 정점을 이루는 전면점화는 캔버스와 유채라는 서양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한지나 천에 스며드는 부드러운 번짐을 이용한 수묵화 같은 효과로 동양의 정서를 드러내는 미적 표현을 구현하여 ‘수화 김환기의 대표적인 작품코드’가 되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화백에게 1970년은 뉴욕에 도착한 이후 가장 행복했던 한 해였다. 그는 뉴욕 미술계의 인정과 관심을 끌기 시작했으며 여러 전시를 제안받아 더욱더 작품 제작에 매진하게 되었다. 과도한 작업으로 육체는 노곤해졌더라도 분출하는 창작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며 생활의 근심조차 잊게 된 상황 속에서 비로소 화가로서의 소명의식을 확인하고 그러한 인식에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을 만끽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뛰어난 직관으로써 변화하는 서구의 현대미술을 받아들였고, 회화의 평면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작품세계를 확장한 피카소의 불굴의 도전 정신을 칭송하였다.

이 시기, 화백은 다양한 재료와 새로운 조형실험의 과정에서 부단히 추구해온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회화에 대한 그의 정신이 확연히 드러나는 색감과 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음악적 운율이 내재된 시적 조형성과 세련된 색감이 어우러진 수많은 걸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는 오로지 열과 성으로 작업에 정진하고 또 매진했고 분출하는 영감과 에너지를 수개월간 집중하여 다양한 푸른 색조의 전면점화를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김광섭의 시구에서 제목을 따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는 그 시기의 연작 중 하나로 캔버스 전체에 푸른 점을 가득 찍은 작품이다. 무수한 단색 톤의 점으로 채워진 절제되고 통일된 색조의 바다가 주는 감동은 관람자로 하여금 초월적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한다. 발이 고운 면포에 그가 수년간의 실험으로 찾아낸 농도의 유채 물감으로 혼신의 기를 모아 선을 긋고 점을 찍고 그 점을 하나하나 둘러싸듯 감싸안기를 반복함으로써 무한히 확산되어 가는 형이상학적 공간을 창조해낸다. 절제된 응축으로 찍혀지는 점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기운으로 반향을 일으키며 미세한 울림의 융합을 이룬다. 즉 점이 선이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면을 이뤄 하나하나의 점이 개별적 요소가 아니라 전체로 통일된 조화로운 메아리가 되어 숭고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점들은 의도된 울림-율동으로 화면을 조화롭게 채우면서 색조의 바다를 이루는데, 그것은 곧 각각의 별들이 발광하여 운집한 은하계가 또다시 어우러져 우주 공간을 이루는 것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이루어갔다.

김환기 화백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자유와 행복을 함께 느낀다고 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가 바라본 하늘, 무수한 별들이 쏟아내는 빛의 울림, 자연을 감싸고 있는 숲의 호흡이 들려주는 메아리, 또한 그가 내려다본 맨해튼의 명멸하는 불빛이 만드는 야경, 허드슨 강물처럼 흐르는 자동차 불빛의 여운을 연상하게 하고, 그러한 경관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고향의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독백을 떠올리게 한다. 다양한 푸른 색조의 깊고 신비한 조화가 빚어내는 우주적 공간, 섬세한 색점의 음영에는 과거 그가 즐겨 그리던 산, 달, 구름 같은 구체적인 형상을 유추할 수 있는 구상적 표현을 대신하여 이국에서 그가 홀로 느끼고 맞이하는 우주를 대하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동경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선망해온 인연과 자연,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섬세한 색점의 음영으로 구현되어 감동의 바다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부단히 추구해온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더라도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는 수년간의 고된 작업으로 혹사한 그의 육신은 지쳐가고 있었다. 김향안 여사는 “그 즈음 전시 제의가 많아졌는데 그것에 다 응하느라고 몸을 너무 혹사해서 수화가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김 화백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필사의 기를 모아 점을 찍고, 휴식도 없이 다음 작업을 위한 틀을 메는 일을 중단 없이 매진하는 가운데 그의 육신은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974년, 김 화백이 갑자기 타계하자 김 여사는 그의 작품이 흩어지는 걸 막고 그의 예술세계를 널리 알리고자, 또 그의 유지를 받들어 후진을 양성하고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환기재단을 설립했다. 여사는 남편의 작품을 그의 분신인 양 모으기 시작하였고 콜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을 회수하거나 바꾸어 재단 설립과 미술관 건립을 준비하였다. 예술가가 남겨놓은 위대한 작품은 작가 개인이나 그의 유족이 아니라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국가적 문화유산이라는 신념으로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환기미술관의 기초를 닦아놓은 김향안 여사의 훌륭한 업적이 실천되는 과정에는 김마태 박사와 전재금 여사를 비롯하여 한용진, 문미애, 문성자 등 주변 지인들의 김환기 예술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 의한 헌신적인 도움과 사명감이 큰 역할을 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연이 낳은 또 다른 인연

내가 김향안 여사를 처음 만난 건 12년의 긴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던 1999년 봄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거침없이 쏘아서 투과하는 눈빛을 가진 여사는 범할 수 없는 위엄과 지성을 지녔으며 왜소한 체구와 조용한 제스처만으로도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매력적인 분이었다. 김환기 예술세계에 대한 흠모와 함께 여사의 적극적이고 진지한 태도, 환기미술관에 쏟는 열정에 매료된 나는 곧 환기미술관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분이었지만 군더더기 없는 여사의 말은 신기하게도 그 어떤 긴 설명보다도 명확한 이해와 의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새 천 년이 시작되던 해, 나는 김환기 화백의 창작의 산실이자 두 분의 삶의 공간이었고, 이후 환기재단을 탄생시킨 곳이며, 여전히 김 여사가 살고 있던 뉴욕 맨해튼 73가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마치 작업 도중에 잠시 자리를 비운 듯이 김 화백의 삶의 체취와 창작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후로 나는 뉴욕에 갈 때면 호텔보다는 73가 스튜디오에 머물곤 했는데 여사는 화백에 대한 이런저런 많은 기억들을 전해주려고 애썼다. 김환기 화백이 작업하던 공간에서 그의 창작열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직접 화백을 만난 듯 흥분되곤 했다. 우리는 환기미술관 소식과 미술계 이야기를 나누었고 미술관, 박물관과 소호의 화랑들을 방문하고 센트럴파크와 허드슨 강변을 산책했으며,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주말에는 거리에 서는 벼룩시장을 구경하고 저녁이면 뉴욕 지인들과 함께 식당에 가거나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가 김마태 박사와 전재금 여사를 만난 건 그때였다. 김 박사 내외와 김환기 화백, 김향안 여사와의 인연이 또 하나의 새로운 인연으로 나에게 이어진 것이다.

 

김향안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매년 7월 25일 김 화백의 기일이면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약속이나 한 듯 정오에 산소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누군가가 가지고 온 꽃을 놓고 준비해온 담배와 술을 대접하고 잡초를 뽑거나 담소를 나누고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김 박사 부부를 위시하여 조각가 존 배 부부와 한용진, 문미애 부부, 최일단, 문성자, 조천형 부부, 문병기 박사님, 박원창, 노찬주 부부는 김향안 여사 생전부터 자주 모이고 김환기 화백의 제사를 지내온 것처럼 지금도 매년 만나서 함께 제사를 드리고 근처 식당이나 어느 분의 집에 모여 식사를 하며 담소로 하루를 보낸다. 세월이 흘러 함께했던 문미애와 문병기 박사님이 세상을 떠났다. 이경성도 고인이 되었다. 여전히 우리는 김 화백과 김 여사의 기일이면 두 분의 산소에서 제를 드리고 근처에 있는 문병기, 손인실 박사 내외분과 문미애의 산소에 들러 추모의 시간을 갖는다.

 

이번 여름 뉴욕에서의 우리 제사모임은 특별했다. 서울 환기미술관에서는 나와 직원 백승이가 환기재단 이사인 박충흠 조각가와 함께 참석했고, 뉴욕에서는 김 박사 부부, 조각가 존 배, 이은숙 부부, 문성자, 조천형 부부와 화가 최일단 선생이 참석했다. 박원창 박사는 몸이 불편해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했고 대신 우리가 며칠 후 코네티컷 주 바닷가에 있는 집으로 박원창, 노찬주 부부를 방문했다. 뉴욕에 머문 10일 내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김마태 박사, 전재금 여사와, 주말에는 자녀들(유진, 수잔, 다니엘, 올리비에)과 시간을 함께하며 인터뷰를 완성했다. 김환기, 김향안 부부와 가족처럼 지냈던 이들의 추억담은 몇 번씩 들어도 언제나 새롭고 흥미롭다. 샘솟듯 무궁무진한 김마태 박사의 회상은 늘 우리를 웃게 만들고 전재금 여사가 전해주는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의 일화들은 유용한 기록이 된다. 이번에는 환기미술관의 ‘김환기 부처 뉴욕지인들 인터뷰 계획’에 따라 녹음과 촬영이 동반된 조금 특별한 목적의 업무로서 진행되었지만, 평소에도 우리는 함께 모일 때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선생들이 김환기, 김향안 부부와 함께했던 추억을 듣거나 김 여사와의 일화들을 무용담처럼 차례로 늘어놓으며 웃고 수다를 즐긴다. 그런 시간이면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공감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는 우리 각자가 어떤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다른 해석을 곁들여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한결같은 그리움의 정서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를 바탕으로 한 우리들의 인연은 훌륭한 작품들로써 세상에 남겨진 이들을 끝없는 감동과 따뜻한 추억으로 결속시켜주는 김 화백과, 아름다운 인연의 역사를 잇고 예술의 감동을 후세에게 지속시켜줄 환기미술관을 만들어 남긴 김 여사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훌륭한 예술이 뿜어내는 감동을 늘 함께 누리고 격려하며 지켜주는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이번 여름에 1년 전부터 추진해온 ‘김 박사 부부의 환기미술관에 대한 기부내용’을 정리하는 최종 약정서를 작성했다. 두 분은 숭고한 용기와 결단으로, 실로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을 지극히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셨다.

김 박사 부부의 용기와 결단으로, 환기미술관은 제2의 탄생을 맞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문화와 예술의 역할과 그 중요성이 더없이 강조되고 있지만, 실제로 사회의 질적, 정신적 기반을 이루는 문화와 예술의 활성화를 위한 자발적 기여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 김 박사 부부의 용기와 결단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실천으로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고 모범을 제시한다. 더욱이 환기미술관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그 고마움과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거대한 단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선행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금년 여름,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으로 환기미술관의 번영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인연이 낳은 또 다른 인연의 소중함과 그 고귀한 힘과 아름다움을 절감하면서 내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2012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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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woo (이메일 보내기) l 2012-10-1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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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김말봉의 다시 피어난 찔레꽃
김광우|知와 사랑 대표

찔레꽃

 

 

 

 

문학 관련 분야 전공자들에게 김말봉의 작품을 읽어보았는지 물으면 거의가 이름은 들었지만 작품을 접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이럴 수가!


‘김말봉’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그의 생애가 자세하게 읽혀진다. 1901년에 태어나 1961년 타계할 때까지의 60년의 생애가 어찌도 그렇게 소상하게 전해지는지 놀라울 뿐이다. 파란만장한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뿐 아니라 수많은 작품들의 제목과 그것들이 언제 쓰였고, 어떤 작품이 어느 신문에 연재되었는지 그리고 그 반응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으며, 망우리 공동묘지 100768호에서 영원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묘지사진에 이르기까지 작가에 관한 자료는 넘쳐난다. 작품에 대한 논문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려면 절판이고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다. 이는 실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말봉은 누구인가? 근대 여류소설가로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대중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는 이 한 마디로 그를 규정하기란 어렵다. 남긴 작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사에서의 그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려면 많은 작품들에 대한 각각의 해석과 비평이 뒤따라야 한다. 시인 천상병千祥炳이 “김말봉의 찔레꽃론”에서 언급했듯이 김말봉의 『찔레꽃』이 문제작인 이유는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의 정체성이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던 1937년에 이 소설이 신문 연재를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독자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한 점 때문이다. 시인은 작가가 당대 현실을 효과적으로 작품에 형상화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젊은 지식인 남녀의 자유결혼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이 작품에 녹아 있음을 지적했다. 대중소설에 대한 이해가 없던 때에 자유결혼을 주장하는 애정소설을 쓴 작가가 김말봉인 것이다. 이는 『찔레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그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산적한 문제는 그 밖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서 그것들에서 나타난 김말봉의 일관된 문학세계 혹은 정신세계가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1901년 밀양 태생인 김말봉은 정신여고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한다. 신문사에서 탐방기와 수필 등을 쓰게 되자 점차 집필에 흥미를 느껴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필명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소설 “망명녀”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서 “고행” “편지” 등을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통속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가 작가가 된 것은 첫 남편 전상범의 격려에 힘입은 바 컸다.


1936년 전상범과 사별한 뒤 이종하와 재혼해 부산에 살면서 광복 때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5년 “카인의 시장”(1945)과 “화려한 지옥”(1945) 등을 발표하는 한편 공창폐지운동, 박애원 경영 등의 사회운동을 병행하였다. 6.25전쟁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61년 2월 9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산 작가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었으나, 광복 후에는 사회성을 띤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김말봉의 작품세계는 광복 이전은 남녀 간의 애욕 문제를 주로 다뤘으나 광복 이후에는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광복 이전을 ‘제1기 작품’이라 하고, 광복 이후를 ‘제2기 작품’이라 하면 1기의 대표작품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 제2기의 대표작품은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한 “생명生命”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전 김말봉의 문학세계는 개인이 가진 애정이 애욕으로 나아가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였지만 광복 후, 제2기에서는 사회공동체에 눈을 돌려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췄다.

대표 작품으로 “태양의 권속”(1952) “새를 보라”(1953) “바람의 향연”(1953) “이슬에 젖어”(1953) “바퀴소리”(1953) “푸른 날개”(1954) “파초의 꿈”(1955) “찬란한 독배”(1955) “생명”(1957) “화관의 계절”(1957) “푸른 장미”(1958) “사슴”(1958) “행로난”(1958) “해바라기”(1958) “광명한 아침”(1958) “아담의 후예”(1958) “환희”(1959) “제비야 오렴”(1959) “장미의 고향”(1959) “이브의 후예”(1960) “바람의 향연”(1962) 등이 있다.


『찔레꽃』은 1937년 7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우리나라에서 여류작가가 쓴 최초의 인기소설로 선풍을 일으켰다. 김말봉의 남편 전상범은 평소 일본 시인 기다하라 학슈北原白秋 작사에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가 작곡한 가곡 ‘찔레꽃’을 즐겨 불렀고, 김말봉은 이에 맞춰 피아노 반주를 해주었다. 전상범은 1936년에 죽었는데, 그 이듬해 소설을 쓰게 되자 당시의 추억이 생각나 제목을 『찔레꽃』으로 정한 것이다.


『찔레꽃』은 연재가 끝난 지 2년 만인 1939년 인문사에서 출간되었고 해방 때까지 3판을 냈으며, 1948년 합동사에서 다시 출간됐다. 이후 1955년 문연사에서, 1961년 진문출판사에서, 1979년 대일출판사에서, 1984년 문학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지금 『찔레꽃』을 다시 출간하는 이유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름만 빛날 뿐 작품이 사라진 슬픈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작품은 작가의 실존적 가치이므로 작가의 생애를 아무리 소상하게 안다 하더라도, 또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연구논문을 읽는다 하더라도 작가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품을 읽고 작가의 정신세계와 교감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작가는 우리와 더불어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김말봉을 검색하던 중 한 네티즌이 2012년 9월 8일 다음카페에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 예천고등학교 61회 동창들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로 김말봉을 참배하러 간 권모 씨가 후기를 올린 것이다. 198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우연히 『찔레꽃』을 읽고 너무도 충격적이었다면서, 수많은 사람을 울린 명작 토머스 하디의 『테스』(1891)를 『찔레꽃』에 비교하고 있다.


『테스』는 김말봉의 『찔레꽃』에 비하면 유도 아니었다. 정말로 한국적인 소설이었다.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이 그 시대를 고스라이 말해주는 정말로 토속적인 우리 소설이었다. 대단한 문장가는 아니었으나 토속적인 너무나 토속적이어서 된장국에 밥을 말아 훌훌 마셔버리듯이 그렇게 책을 마셨을 정도로 그렇게 빠져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런 참 좋은 글을 남기신 김말봉 선생님을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해준 친구들에게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딸아이 인생길의 멘토가 되어주길 바랐던 김말봉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글을 썼다는 이 네티즌의 글에서 작가 김말봉이 그의 삶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알 수 있다. 1937년대 작가의 문학성이 2012년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현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김말봉은 ‘순수성’을 주장하며 소수 지식인을 위한 글을 쓰던 당대의 문인들을 나무라면서 다수를 위한 글이 아니라면 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예술과 삶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은 1950년대 후반 주로 런던과 뉴욕에서 생겼으며, 1960년대에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일찍이 1930년대에 대중을 위한 문학을 주창한 김말봉은 한국 문학의 선구자임이 틀림없다.


2012년은 김말봉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1년이 되는 해라서 잊혀가는 그의 작품에 대한 아쉬움으로 『찔레꽃』을 서둘러 출간했다. 현대의 독자들이 작품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달라진 오늘날의 문법으로 약간 수정하여 내놓았다.


우리나라 문학사에 끼친 그의 공로에 새삼 감사를 표하면서 2012년 새로 피어난 『찔레꽃』을 그의 영전에 바친다.

2012년 가을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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