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김말봉의 다시 피어난 찔레꽃
김광우|知와 사랑 대표

찔레꽃

 

 

 

 

문학 관련 분야 전공자들에게 김말봉의 작품을 읽어보았는지 물으면 거의가 이름은 들었지만 작품을 접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이럴 수가!


‘김말봉’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그의 생애가 자세하게 읽혀진다. 1901년에 태어나 1961년 타계할 때까지의 60년의 생애가 어찌도 그렇게 소상하게 전해지는지 놀라울 뿐이다. 파란만장한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뿐 아니라 수많은 작품들의 제목과 그것들이 언제 쓰였고, 어떤 작품이 어느 신문에 연재되었는지 그리고 그 반응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으며, 망우리 공동묘지 100768호에서 영원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묘지사진에 이르기까지 작가에 관한 자료는 넘쳐난다. 작품에 대한 논문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려면 절판이고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다. 이는 실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말봉은 누구인가? 근대 여류소설가로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대중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는 이 한 마디로 그를 규정하기란 어렵다. 남긴 작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사에서의 그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려면 많은 작품들에 대한 각각의 해석과 비평이 뒤따라야 한다. 시인 천상병千祥炳이 “김말봉의 찔레꽃론”에서 언급했듯이 김말봉의 『찔레꽃』이 문제작인 이유는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의 정체성이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던 1937년에 이 소설이 신문 연재를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독자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한 점 때문이다. 시인은 작가가 당대 현실을 효과적으로 작품에 형상화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젊은 지식인 남녀의 자유결혼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이 작품에 녹아 있음을 지적했다. 대중소설에 대한 이해가 없던 때에 자유결혼을 주장하는 애정소설을 쓴 작가가 김말봉인 것이다. 이는 『찔레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그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산적한 문제는 그 밖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서 그것들에서 나타난 김말봉의 일관된 문학세계 혹은 정신세계가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1901년 밀양 태생인 김말봉은 정신여고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한다. 신문사에서 탐방기와 수필 등을 쓰게 되자 점차 집필에 흥미를 느껴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필명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소설 “망명녀”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서 “고행” “편지” 등을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통속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가 작가가 된 것은 첫 남편 전상범의 격려에 힘입은 바 컸다.


1936년 전상범과 사별한 뒤 이종하와 재혼해 부산에 살면서 광복 때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5년 “카인의 시장”(1945)과 “화려한 지옥”(1945) 등을 발표하는 한편 공창폐지운동, 박애원 경영 등의 사회운동을 병행하였다. 6.25전쟁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61년 2월 9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산 작가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었으나, 광복 후에는 사회성을 띤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김말봉의 작품세계는 광복 이전은 남녀 간의 애욕 문제를 주로 다뤘으나 광복 이후에는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광복 이전을 ‘제1기 작품’이라 하고, 광복 이후를 ‘제2기 작품’이라 하면 1기의 대표작품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 제2기의 대표작품은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한 “생명生命”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전 김말봉의 문학세계는 개인이 가진 애정이 애욕으로 나아가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였지만 광복 후, 제2기에서는 사회공동체에 눈을 돌려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췄다.

대표 작품으로 “태양의 권속”(1952) “새를 보라”(1953) “바람의 향연”(1953) “이슬에 젖어”(1953) “바퀴소리”(1953) “푸른 날개”(1954) “파초의 꿈”(1955) “찬란한 독배”(1955) “생명”(1957) “화관의 계절”(1957) “푸른 장미”(1958) “사슴”(1958) “행로난”(1958) “해바라기”(1958) “광명한 아침”(1958) “아담의 후예”(1958) “환희”(1959) “제비야 오렴”(1959) “장미의 고향”(1959) “이브의 후예”(1960) “바람의 향연”(1962) 등이 있다.


『찔레꽃』은 1937년 7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우리나라에서 여류작가가 쓴 최초의 인기소설로 선풍을 일으켰다. 김말봉의 남편 전상범은 평소 일본 시인 기다하라 학슈北原白秋 작사에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가 작곡한 가곡 ‘찔레꽃’을 즐겨 불렀고, 김말봉은 이에 맞춰 피아노 반주를 해주었다. 전상범은 1936년에 죽었는데, 그 이듬해 소설을 쓰게 되자 당시의 추억이 생각나 제목을 『찔레꽃』으로 정한 것이다.


『찔레꽃』은 연재가 끝난 지 2년 만인 1939년 인문사에서 출간되었고 해방 때까지 3판을 냈으며, 1948년 합동사에서 다시 출간됐다. 이후 1955년 문연사에서, 1961년 진문출판사에서, 1979년 대일출판사에서, 1984년 문학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지금 『찔레꽃』을 다시 출간하는 이유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름만 빛날 뿐 작품이 사라진 슬픈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작품은 작가의 실존적 가치이므로 작가의 생애를 아무리 소상하게 안다 하더라도, 또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연구논문을 읽는다 하더라도 작가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품을 읽고 작가의 정신세계와 교감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작가는 우리와 더불어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김말봉을 검색하던 중 한 네티즌이 2012년 9월 8일 다음카페에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 예천고등학교 61회 동창들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로 김말봉을 참배하러 간 권모 씨가 후기를 올린 것이다. 198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우연히 『찔레꽃』을 읽고 너무도 충격적이었다면서, 수많은 사람을 울린 명작 토머스 하디의 『테스』(1891)를 『찔레꽃』에 비교하고 있다.


『테스』는 김말봉의 『찔레꽃』에 비하면 유도 아니었다. 정말로 한국적인 소설이었다.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이 그 시대를 고스라이 말해주는 정말로 토속적인 우리 소설이었다. 대단한 문장가는 아니었으나 토속적인 너무나 토속적이어서 된장국에 밥을 말아 훌훌 마셔버리듯이 그렇게 책을 마셨을 정도로 그렇게 빠져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런 참 좋은 글을 남기신 김말봉 선생님을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해준 친구들에게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딸아이 인생길의 멘토가 되어주길 바랐던 김말봉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글을 썼다는 이 네티즌의 글에서 작가 김말봉이 그의 삶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알 수 있다. 1937년대 작가의 문학성이 2012년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현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김말봉은 ‘순수성’을 주장하며 소수 지식인을 위한 글을 쓰던 당대의 문인들을 나무라면서 다수를 위한 글이 아니라면 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예술과 삶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은 1950년대 후반 주로 런던과 뉴욕에서 생겼으며, 1960년대에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일찍이 1930년대에 대중을 위한 문학을 주창한 김말봉은 한국 문학의 선구자임이 틀림없다.


2012년은 김말봉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1년이 되는 해라서 잊혀가는 그의 작품에 대한 아쉬움으로 『찔레꽃』을 서둘러 출간했다. 현대의 독자들이 작품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달라진 오늘날의 문법으로 약간 수정하여 내놓았다.


우리나라 문학사에 끼친 그의 공로에 새삼 감사를 표하면서 2012년 새로 피어난 『찔레꽃』을 그의 영전에 바친다.

2012년 가을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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