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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나이절 워버턴 지음, 박수철 옮김 / 지와사랑 / 2012년 9월
평점 :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철학이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들이 철학의 개념들을 다룰 때는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기자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접근해야 한다. 철학공부를 한다는 건 철학적 사고를 배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를 공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시를 공부하는 사람은 굳이 시인처럼 시를 지을 필요가 없다. 대신 시를 날카롭게 비평하는 방법만 배우면 된다. 시에 관한 비평을 시처럼 쓸 필요도 없다. 실제로 소네트를 지을 수는 없어도 소네트를 공부할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구태여 그림을 잘 그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림과 조과 건축물을 감상하는 방법과 그것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면 족하다. 그러나 철학은 다르다. 예를 들면, 모든 철학 논술은 그 자체로 철학의 일부다. 논술에서는 어떤 주장을 펼쳐야 한다. 굳이 깜짝 놀랄 만한 독창적인 주장일 필요는 없다. 다만 적절한 논증이 요구된다. 논술을 할 때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듯이, 우리도 자신의 견해를 주장해야 한다. 즉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들의 위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논술을 쓰는 학생은 자신의 위치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며 비판하고 제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철학은 물리학이나 역사학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를테면, 지금 물리학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은 과거의 위대한 물리학자들과 동일한 종류의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나름의 역사연구에 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철학적 사고를 외면할 수 없다.
철학을 읽을 때, 들을 때, 논할 때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철학자로서 읽어야 하고, 철학자로서 들어야 한다. 철학을 논한다는 건 단순히 철학에 관한 토론이 아니라 철학적 토론을 뜻한다. 이것은 철학이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학문의 자리에 오른 여러 가지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단순히 타인의 생각을 배우는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철학자로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는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철학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철학공부는 다른 철학자들의 발언과 그것의 맥락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철학자로서 철학의 과거를 공부하는 목적은 무미건조한 개념으로 가득한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철학의 과거를 공부하는 진정한 목적은, 오늘날의 철학에 기여하고 적어도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문제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철학과에서 르네 데카르트 같은 17세기 철학자에 관한 수업을 듣게 되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과 회의론에 관한 그의 견해를 다루게 될 것이고, 생각이 존재를 입증한다고 주장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Cogito.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견해, 즉 사유를 갖는다는 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견해를 배울 것이다. 우리는 단지 데카르트의 지적, 역사적 맥락에 관한 사실이나 그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 자체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역사적, 인생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까닭은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한 것, 그가 반대한 견해, 그가 활용한 중요한 모델 등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의 저작물이 갖는 문헌적 가치에 집중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의 문맥과 문체를 비롯한 데카르트의 모든 측면들은 그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도 필요하다. 그러나 궁극적 목표는 오늘날까지 이어진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의 시발점을 제공하고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데카르트의 주장을 이해하고 논하는 것이다.
전공자로서 철학 강의를 듣는 것은 철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과정이다. 사상의 역사는 공부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지식의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활동이다. 이는 철학이 무척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학문인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갈고 닦는 여러 기술들은 철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응용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자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 사상가와 단순한 학자의 차이
수동적으로 습득한 진리는 의족과 틀니와 밀랍 코, 혹은 타인의 살집으로 성형한 코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 자신의 사고를 통해 획득한 진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팔다리와 같다. 바로 여기에 단순한 학자와 사상가의 차이점이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의 지적 자산은 적절한 명암, 일관된 색조, 완벽한 색의 조화를 자랑하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다. 반면 단순한 학자의 지적 자산은 다양한 색상을 자랑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조화, 순서, 중요성 등이 없는 커다란 팔레트 같다.
철학적 사고를 배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 네 가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 네 가지 습관은 어떤 공부를 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적극적으로 읽기
■ 적극적으로 듣기
■ 적극적으로 토론하기
■ 적극적으로 글쓰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 네 가지 습관을 적절히 조합해 실천함으로써 나름의 철학적 기술을 다듬어왔다. 물론 소크라테스 같은 예외도 있다. 알다시피 그는 철학과 관련한 글을 남긴 적이 없지만, 탁월한 토론 능력 덕분에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심각한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독순술, 동시수화, 동시자막 등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도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철학 전공자들은 이 네 가지 활동을 적절히 구사해야 그들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내가 강조하는 건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읽기, 적극적인 듣기, 적극적인 토론, 적극적인 글쓰기다. 앞서 강조한 대로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라 오히려 쉽게 만족되지 않거나 아주 신나는 실천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보다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이며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주제를 이미 철학적으로 사고한 바 있는 사람들의 빛나는 업적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기본적 수단들을 배우고 그것들을 적용하면 더 쉬워진다. 한 사람의 정체된(진부한) 사상가가 되기는 쉽다. 그런 사상가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정으로 사고하기를 외면한 채 타인의 말과 글을 단지 암기하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소극적 방식에 안주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터득하면, 그것을 삶의 여러 영역에 응용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철학이 다른 모든 학문에 비해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이끌어내고, 검토하며, 검증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치밀하게 사고한다. 결론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한 주제를 다룰 때조차도 그들의 글에는 진정한 힘이 실려 있다. 이처럼 적극적인 철학 공부는 보답과 보람이 뒤따르는 경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