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것이 더 복된 일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사실에 대한 간결한 진술이다. 명절을 예로 들어보자. 선물을 받을 때보다 줄 때 종종 더 신난 적이 없는가? 주는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성경에서는 이를 복되다고 말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어떤 때에 선물이 선물인가? 선물은 누군가가 그것을 받을 때 선물이다. 누군가가 선물을 받지 않는다면 주는 행위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주고 받고, 받고 주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사랑을 하려면 우리는 주는 것뿐 아니라 받을 줄도 알아야만 한다. 선물을 기꺼이 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
지옥을 둘러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화려한 방에서 호화스런 연회에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만 빼면 그곳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까웠다.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팔이 엄청나게 길고 그 끝에 손이 아니라 포크가 달려 있었다. 팔이 너무 길어서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잘차려 놓은 잔치에 배를 곯고 불쌍하게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천국을 보여 달라고 청하자 옆방으로 안내되었다. 놀랍게도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멋진 방에서 호화로운 연회가 열리고 있었고 사람들의 팔은 똑같이 아주 길었다. 하지만 이 방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 천국이란 곧 사랑과 자애로움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랑과 자애로움이 제 효력을 발휘하려면 주는 것과 더불어서 받는 것도 있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타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마시는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천국이 아주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녀는 날마다 스스로 지옥에서 살아갔다.

 

균형 잡기
균형 잡는 일은 나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의 외부적인 균형을 찾고, 나에 대한 사랑이든 타인에 대한 사랑이든 관계없이 우리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만드는 내부의 정서적인 균형을 찾는 일을 의미한다.

 

힐렐의 질문
기원전 1세기, 유대교에서 랍비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랍비 힐렐Hillel(생몰연대 미상)은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의 동시대인으로 ‘샨마이파’와 함께 바리새파 랍비의 율법 해석에 큰 영향을 미친 ‘힐렐파’의 창시자였다. 그는 유대 교도의 일상생활, 제의, 의례행위에 관한 종교적 규정을 구약의 율법에서 도출하기 위한 여러 규범을 정했다. 힐렐은 나와 타인 간의 균형을 강조한 유명한 세 가지 질문을 남겼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날 위해 주겠는가?
내가 타인을 위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하겠는가?
(Buxbaum 2004, 268~70에서 인용)

 

세 가지 질문의 순서에는 의미가 있다. 첫 번째가 반드시 가장 먼저 와야 한다. 이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를 위해 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를 사랑하고 돌보는,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이며 신성한 의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모든 일의 바탕이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우리 자신에게 자애롭지 않은 일은 신성모독인 셈이다. 힐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는 일과 타인을 사랑하는 일중에서 선택을 거부한다. 둘 다 중요하고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겐 타인을 돌보아야 할 의무도 있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하느님의 자녀인 까닭이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나와 타인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에 치우쳐 있다면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로 타인을 위한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내일이면 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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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인

 

붓다는 우리가 자신의 참모습을 바라보는 과격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이미 2장에서 살펴본 대로 무아의 방식이다. 붓다는 우리가 분리되고 변하지 않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우주 만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붓다는 무아의 통찰을 제시하여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깊은 유대감의 진리를 깨닫도록 도우며, 만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좀 더 사실적인 시각을 갖도록 했다. 사랑은 이러한 통찰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다. 우리가 만물 그리고 모든 사람과 상호 연결되어 있는데 자애롭지 못하다면 말이 되겠는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곧 내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적 혹은 영적 가르침에서 이런 통찰을 오용하는 경향이 있다. 궁극적인 진실의 영역에는 분리된 자아란 없지만, 자신의 욕구, 욕망, 능력, 성향을 지닌 타인과는 구별되는 유일한 사람, 즉 자아로 있고자 하는 확실한 상대적인 진실도 있다.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려고 한다면 우리도 마시처럼 비참해지고 말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자신이 어렸을 적 있었던 일을 내게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열심히 숙제를 했는데 시기심이 생긴 언니가 번번이 그 숙제를 망쳐놓았다. 할머니에게 일러바칠 때마다, 종교적인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던 할머니는 “착한 어린이는 불평하는 게 아니야” 하고 핀잔을 주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종교의 가르침을 악용한 사례다. 이처럼 부당한 상황에서 어머니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이로서는 얼마나 큰 충격일까! 이는 종교라는 뱀에 물린 사례다. 이는 부모의 책임을 저버리고 종교라는 명칭 하에 아이의 심리적 부분을 무시한 처사다.
아잔 차 선사는 자신이 거처하던 오두막의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자 제자에게 지붕을 고쳐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지붕은 그대로였다. 장마철이라 선사는 장대 같은 비를 쫄딱 맞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 그는 제자에게 왜 지붕을 고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제자는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이는 지혜롭지 못한 집착이 아니다. 이는 물소의 평정과 같다”(Kornfield 1996, 41) 하고 아잔 차 선사가 말했다.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인간 이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성을 유지하고 보살펴야 한다. 상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 즉 내가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마시는 자신을 아끼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늘 자신을 맨 나중에 챙기던 일을 중단해야만 한다. 나의 할머니는 부당한 일에 대해 어머니 편을 들어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아잔 차 선사의 제자는 오두막을 고쳤어야 했다. 다정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품고자 한다면 반드시 나 자신을 그 다정함과 자애로움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반드시 자기애라는 튼튼한 토대 위에 지어야만 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타인을 사랑하는 척할 수는 없다. 자기애의 결핍을 드러내는 피상적이고 과장된 이기심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애여야만 한다.
마시의 사례에서 자기애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곧 나와 타인 모두 사랑하지 못하는 결말로 이어짐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자애로움 없이 가족을 사랑하려고 하다 보면 그 마음이 결국 사랑보다는 증오로 나타난다. 다른 많은 상황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심오한 법칙이 있다. 선해지려고 지나치게 애쓰다가 결국에는 해를 입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시의 사랑은 결코 참사랑이 아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타인을 사랑하는 일과 나를 사랑하는 일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에 너무 많이 치우친다면 결국에는 비참해진다. 내가 비참해지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내가 도우려는 사람들이 나의 분노를 느끼게 되고, 그 분노가 우리는 물론이고 그들 의식의 정원에도 불건전한 씨앗을 심게 된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 강한 사람은 실제로 위험한 상황에 부닥칠 일이 거의 없으므로 이런 걱정은 사실 터무니없다. 그들에게 위험한 건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위험한 일은 자신에게 자애롭지 못해 결국에는 자신의 불행과 분노를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퍼뜨리게 되는 것이다.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반대의 경우, 즉 나를 사랑하는 일에 치우친 사람들 역시 행복하지 못하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부당한 처사를 받을까 봐 늘 긴장하고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아간다. 더구나 그들에게 공평하다는 기준은 그들 자신 그리고 그들의 욕구와 욕망에 심히 편향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갑자기 분노를 터트리는 경향이 있다. 그들 눈에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할 때, 인간관계도 왜곡된다. 한편으로 이런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기준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그 때문에 인관관계가 갑작스럽게 끝나버리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사람들은 수동적인 사람들, 자신을 옹호하는 일이 서툰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행복을 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되지 못하고 양쪽 모두 화나게 만들 뿐이다. 마시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을 주는 사람은 결국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사랑을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과분하게 받더라도 왜곡된 인식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 화를 내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부당한 이기주의로 치부한다.
나와 타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매 순간마다 정확히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간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을 초월한 균형이다. 나와 타인 사이에 균형을 잘 잡는 사람은 융통성이 많다. 때로는 자신이 우선이다. 그리고 때로는 타인이 우선이다. 한밤중에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에 깨어난 부모는 졸음이 쏟아지더라도 아이에게 필요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마찬가지로 온종일 타인을 돌보아야 하는 사회복지사, 의사 또는 심리치료사는 지치고 화나지 않으려면, 웰빙과 행복의 씨앗에 영양분을 줄 수 있도록 근무 외의 시간에는 자신을 돌보고 균형을 잡는 법을 찾아야 한다.
마시와 같은 성향의 사람들은 세상과 무언의 협정을 맺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헌신적이므로 다른 사람들 역시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나를 보살펴 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나보다 타인을 먼저 돌본다. 이런 협정에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먼저 세상은 그 협정에 서명한 적이 없다. 그 협정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둘째, 실제로 그런 협정은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읽고 어떻게든 내가 바라는 것과 필요한 것을 자연히 알 것이라는 기대를 바탕으로 한다.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일 때는 다른 선택이 없겠지만, 성인으로서 이렇게 한다면 잘못된 전략이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내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도 세상이 서명도 하지 않은 협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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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궁극적인 진리, 관습적인 진리

 

궁극적인 진리는 궁극을 분석하는 이성적 의식에 의해서 명확하게 발견되는 대상입니다. 관습적 의식은 세상적인 용어나 관습의 대상과 관련된 의식입니다. 그러한 의식에 의해서 명쾌하게 발견되는 대상이 관습적 진리입니다.

 

관습적인 진리
관습적인 진리는 공空이 아닌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현상은 이러한 구분에 의해서 상세히 기술됩니다.

 

고요한 마음에 이르는 법
지속적인 고요함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섯 가지 잘못을 버려야 합니다. 다섯 가지 잘못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게으름, 명상을 통해 안정을 얻으려는 열성이 결여된 상태
2. 망각, 관찰의 대상 자체가 무엇인지 마음으로 챙기지 못하는 상태
3. 관찰의 대상을 망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주의함이나 들뜸의 영향으로 마음이 해이해진 상태
4. 부주의함이나 들뜸의 영향에 있더라도 부주의함과 들뜸의 해결책을 적용하지 못하는 상태
5. 부주의함이나 들뜸은 없지만 아직 대상에 일념으로 집중하지 못하며 계속 부주의함이나 들뜸에 대한 해결책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실수를 범하는 상태

미륵보살의 ‘중도와 극단의 구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충고를 망각하는 게으름
부주의와 들뜸
비적용과 적용 —
이것들은 분명 다섯 가지 잘못입니다.

 

다섯 가지 잘못을 버리는 명상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잘못을 버리는 명상을 해야만 합니다. 게으름에 대한 네 가지 해결책은 믿음, 열망, 노력, 유연성입니다. 망각에 대한 해결책은 마음을 챙기는 것입니다. 부주의와 들뜸에 대한 해결책은 내적 성찰입니다. 네 번째 해결책을 적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해결책은 적용하려는 의도입니다. 해결책을 과도하게 적용하는 다섯 번째 잘못에 대한 해결책은 마음을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평정입니다.

 

명상의 효과
마음이 완전하고 쉽게 안정된 명상의 상태가 되는 구종심주九種心住(티베트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수행방법 중 하나로 아홉 가지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는 샤마타calm-abiding와 유사한 수행법입니다. 필요한 집중과 명상을 하면 헤아릴 수 없는 네 가지 감정인 사랑, 연민, 기쁨, 평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신자나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 모두 명상에 몰두하면 이러한 상태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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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는 공자의 제자들을 높이 평가했다

 

 

 

사람들은 장자가 유가儒家를 비판했다고 오해하는데,『장자莊子』를 보면 그가 공자의 제자들을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가 자신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자의 제자 세 명을 특별히 언급했는데, 첫 번째 제자는 원헌原憲입니다.『논어論語』14편「헌문편憲問篇」에 나오며, 편명 중의 헌이 바로 원헌을 말합니다.

원헌은 비지나 쌀겨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는 스승 공자에게 부끄러움에 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거늘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거나, 나라에 도가 없는데 뜻을 지키지 못하고 녹봉만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생풀로 덮어 만든 원헌의 집은 볼품이 없었고, 비가 올 때면 바닥이 금세 빗물로 흥건해졌으며, 집안에 살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문도 짚을 엮어 간단히 만든 것으로 집에 훔쳐갈 물건이 없었으므로 문고리는 아예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 자공子貢이 찾아 왔습니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하나인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 사업수완이 좋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자공은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치려고 할 때, 공자의 허락을 받고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설득하여 노나라를 구함과 동시에 월을 패왕覇王으로 하여 네 나라의 세력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연 인물입니다. 이재가理財家로도 알려져 공문의 번영은 자공의 경제적 원조에 의한 바가 컸다고 합니다. 공자가 죽은 뒤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가서 벼슬했으며, 제나라에서 타계했습니다.

하루는 자공이 멋진 옷에 큰 마차까지 타고 원헌을 보러갔습니다. 그런데 원헌의 집 앞 골목이 너무 좁아 마차가 들어갈 수 없자 하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습니다. 원헌의 집을 본 자공은 친구가 이렇듯 초라한 곳에 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집에 들어서자마자 원헌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아프지 않고서야 사람이 어찌 이런 곳에 살 수 있는가?”

원헌이 말했습니다.

“가난은 병이 아니라네. 학문하는 사람이 이상이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병이지.”

원헌은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자공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는 자공에게 말했습니다.

“자네의 행동이 스승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말을 들은 자공은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장자가 본 원헌의 모습입니다. 원헌은 비록 가난했으나 정신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건했습니다.

장자가 높이 평가한 공자의 또 다른 제자는 증삼參, 즉 증자입니다. 증자는 효도를 역설했으며, 공자의 덕행과 학설을 정통으로 조술祖述하여 이를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맹자孟子가 이 계통입니다. 증자는『효경孝經』의 저자로도 알려졌습니다. 원헌과 마찬가지로 증자도 매우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쌀이 없어 사흘 동안 배를 곯고, 십 년 동안 새 옷을 해 입지 못했다고 합니다. 갓을 쓰려니 갓끈이 끊어지고, 옷을 입자니 해져 팔꿈치가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신발은 아무리 묶어도 맨발이 땅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한 마디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방안에서 경전을 읽는 소리만큼은 음악소리처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자는 그를 신하로 쓰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제후들은 그를 친구로 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증자의 마음에는 도가 있어 기쁨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난도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장자가 인정한 또 하나의 공자의 제자는 안연顔淵(기원전 521~490)입니다. 흔히 안회顔回로 불립니다. 안빈낙도安貧의 삶을 몸소 실천한 안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줄 압니다. 안회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로 때를 만나지 못하고, 운이 따르지 않으며 천명이 하늘에 닿지 않아서임을 꼽으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장자가 가난을 견디다 못해 위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기운 옷에다 새끼줄로 묶은 다 떨어진 신발까지, 장자의 행색은 매우 남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왕은 그토록 높은 학문과 명성이 있는 인물이 이렇듯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온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어찌 이렇듯 행색이 초라하시오?”

장자가 말했습니다.

“초라한 게 아니라 전 그저 가난할 뿐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숭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원숭이는 높은 나무 위에서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데 아무도 그런 원숭이를 잡지 못합니다. 원숭이 역시 정말 즐거워 보이지요. 하지만 원숭이를 가시나무 숲에 둔다면 여기저기 찔리고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를 흔히 혼상난상昏上이라고 하죠. 신은 가시나무 숲에 있는 원숭이 같은 처지입니다. 그러니 가난이 신의 탓은 아닙니다. 모두 시대의 탓이 아니겠습니까?”

혼상昏上은 돼먹지 못한 임금을, 난상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벼슬아치들을 말합니다. 장자의 말은 실상 위왕에게 한 훈계였습니다. 위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자신처럼 학문하는 사람들이 뜻을 펼치지 못하고 이렇듯 낭패를 보지 않느냐고 질타한 셈입니다.

장자가 생각한 가난은 생활에 필요한 최저 기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

도가에서는 자연애와 인생의 정관靜觀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연귀의自然歸依,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천인합일天人合一, 마음을 비우고 순리에 따른다는 청정무위淸淨無爲를 숭상합니다. 도가에서는 가난과 부귀를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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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삼보三寶: 삼독三毒 탐진치貧癡를 극복하는 방법

 

 

 

노자老子는 자비慈悲, 겸허謙虛, 검약儉約, 즉 삼보三寶에 관해 말했습니다. 탐욕貧, 성냄, 어리석음癡, 즉 삼독三毒이라 일컫는 탐진치貧癡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삼보를 말한 것입니다.

노자가 말한 제1보寶가 자비입니다. 자비의 자慈는 사랑으로 탐욕貧을 이기는 것입니다. 제2보는 겸허입니다.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으로 경쟁을 하지 않음으로써 성냄을 이기는 것입니다. 제3보는 검약으로 검儉으로 물자와 정력을 아껴 어리석음癡을 이기는 것입니다.

제1보인 자비는 세상 만물의 어머니인 도처럼 사랑과 관용 그리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제2보인 겸허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남과의 지나친 경쟁을 피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쟁에 연연하지 않고 봉사의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이끈다면 그들은 우리를 다르게 될 것입니다.

제3보인 검약은 돈이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모두 절약하라는 뜻으로 돈을 벌고 쓰는 데 과도하게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인생의 더 소중한 목표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노자는 돈이 많은 것이 나쁘다든가 가난이 좋다든가 하는 극단적인 평가를 한 적이 없습니다. 가능한 한 절약하는 편이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부의 양극화가 평화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도가에서는 가난을 보편적 현상으로 보았으며, 난세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장자莊子는 궁핍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장자莊子를 보면 그가 학식이 높았으나 벼슬을 마다해 평범하다 못해 빈곤한 생활을 해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외출할 때 새총을 들고 나가 기회가 생기면 새를 잡고, 낚시를 가서 물고기를 잡아와 반찬감으로 보탰습니다. 그의 가난은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장자가 친구에게 쌀을 꾸러 갔습니다. 그 친구는 강물을 관리해서 감하후監河侯라 불렸습니다. 장자가 해진 옷차림으로 친구를 찾아가 쌀을 꾸어달라고 하자 감하후가 말했습니다.

“그러게, 다음 달 세금이 걷히면 300금을 빌려주겠네.”

장자는 얼굴색이 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 내가 자네를 보러오는데 길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뒤를 돌아봤다네. 그랬더니 마차 바큇자국 밑에 붕어 한 마리가 바동거리고 있더군. 그래서 붕어에게 혹시 나를 불렀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붕어는 자기가 동해에서 왔는데 지금 목이 말라 다 죽게 생겼다며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물을 좀 가져다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그랬다네. 내 이 길로 오나라와 월나라의 왕을 만나 운하를 뚫어 서강의 물을 이곳으로 끌어와 구해주겠다고 말이네. 그랬더니 붕어가 바로 정색하며 그때까지 기다리느니 차라리 건어물점포에 가서 자기를 찾는 편이 더 빠르겠다고 했네.”

장자는 우화를 통해 인색한 부자들을 심하게 질타했습니다.

이렇듯 평생 가난에 찌들어 산 장자였지만 다음의 고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부러워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장주몽접莊周夢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장자가 홀로 산길을 가다가 지쳐 잠시 쉰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나비로 변해 여기저기를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녔습니다. 너무 즐거워서 그 순간 자신의 존재조차 잊었습니다. 잠에서 깬 장자는 뻣뻣하게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조금 전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와 나비는 원래 별개의 존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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