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타인

 

붓다는 우리가 자신의 참모습을 바라보는 과격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이미 2장에서 살펴본 대로 무아의 방식이다. 붓다는 우리가 분리되고 변하지 않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우주 만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붓다는 무아의 통찰을 제시하여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깊은 유대감의 진리를 깨닫도록 도우며, 만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좀 더 사실적인 시각을 갖도록 했다. 사랑은 이러한 통찰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다. 우리가 만물 그리고 모든 사람과 상호 연결되어 있는데 자애롭지 못하다면 말이 되겠는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곧 내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적 혹은 영적 가르침에서 이런 통찰을 오용하는 경향이 있다. 궁극적인 진실의 영역에는 분리된 자아란 없지만, 자신의 욕구, 욕망, 능력, 성향을 지닌 타인과는 구별되는 유일한 사람, 즉 자아로 있고자 하는 확실한 상대적인 진실도 있다.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려고 한다면 우리도 마시처럼 비참해지고 말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자신이 어렸을 적 있었던 일을 내게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열심히 숙제를 했는데 시기심이 생긴 언니가 번번이 그 숙제를 망쳐놓았다. 할머니에게 일러바칠 때마다, 종교적인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던 할머니는 “착한 어린이는 불평하는 게 아니야” 하고 핀잔을 주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종교의 가르침을 악용한 사례다. 이처럼 부당한 상황에서 어머니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이로서는 얼마나 큰 충격일까! 이는 종교라는 뱀에 물린 사례다. 이는 부모의 책임을 저버리고 종교라는 명칭 하에 아이의 심리적 부분을 무시한 처사다.
아잔 차 선사는 자신이 거처하던 오두막의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자 제자에게 지붕을 고쳐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지붕은 그대로였다. 장마철이라 선사는 장대 같은 비를 쫄딱 맞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 그는 제자에게 왜 지붕을 고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제자는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이는 지혜롭지 못한 집착이 아니다. 이는 물소의 평정과 같다”(Kornfield 1996, 41) 하고 아잔 차 선사가 말했다.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인간 이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성을 유지하고 보살펴야 한다. 상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 즉 내가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마시는 자신을 아끼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늘 자신을 맨 나중에 챙기던 일을 중단해야만 한다. 나의 할머니는 부당한 일에 대해 어머니 편을 들어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아잔 차 선사의 제자는 오두막을 고쳤어야 했다. 다정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품고자 한다면 반드시 나 자신을 그 다정함과 자애로움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반드시 자기애라는 튼튼한 토대 위에 지어야만 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타인을 사랑하는 척할 수는 없다. 자기애의 결핍을 드러내는 피상적이고 과장된 이기심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애여야만 한다.
마시의 사례에서 자기애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곧 나와 타인 모두 사랑하지 못하는 결말로 이어짐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자애로움 없이 가족을 사랑하려고 하다 보면 그 마음이 결국 사랑보다는 증오로 나타난다. 다른 많은 상황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심오한 법칙이 있다. 선해지려고 지나치게 애쓰다가 결국에는 해를 입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시의 사랑은 결코 참사랑이 아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타인을 사랑하는 일과 나를 사랑하는 일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에 너무 많이 치우친다면 결국에는 비참해진다. 내가 비참해지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내가 도우려는 사람들이 나의 분노를 느끼게 되고, 그 분노가 우리는 물론이고 그들 의식의 정원에도 불건전한 씨앗을 심게 된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 강한 사람은 실제로 위험한 상황에 부닥칠 일이 거의 없으므로 이런 걱정은 사실 터무니없다. 그들에게 위험한 건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위험한 일은 자신에게 자애롭지 못해 결국에는 자신의 불행과 분노를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퍼뜨리게 되는 것이다.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반대의 경우, 즉 나를 사랑하는 일에 치우친 사람들 역시 행복하지 못하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부당한 처사를 받을까 봐 늘 긴장하고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아간다. 더구나 그들에게 공평하다는 기준은 그들 자신 그리고 그들의 욕구와 욕망에 심히 편향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갑자기 분노를 터트리는 경향이 있다. 그들 눈에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할 때, 인간관계도 왜곡된다. 한편으로 이런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기준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그 때문에 인관관계가 갑작스럽게 끝나버리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사람들은 수동적인 사람들, 자신을 옹호하는 일이 서툰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행복을 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되지 못하고 양쪽 모두 화나게 만들 뿐이다. 마시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을 주는 사람은 결국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사랑을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과분하게 받더라도 왜곡된 인식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 화를 내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부당한 이기주의로 치부한다.
나와 타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매 순간마다 정확히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간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을 초월한 균형이다. 나와 타인 사이에 균형을 잘 잡는 사람은 융통성이 많다. 때로는 자신이 우선이다. 그리고 때로는 타인이 우선이다. 한밤중에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에 깨어난 부모는 졸음이 쏟아지더라도 아이에게 필요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마찬가지로 온종일 타인을 돌보아야 하는 사회복지사, 의사 또는 심리치료사는 지치고 화나지 않으려면, 웰빙과 행복의 씨앗에 영양분을 줄 수 있도록 근무 외의 시간에는 자신을 돌보고 균형을 잡는 법을 찾아야 한다.
마시와 같은 성향의 사람들은 세상과 무언의 협정을 맺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헌신적이므로 다른 사람들 역시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나를 보살펴 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나보다 타인을 먼저 돌본다. 이런 협정에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먼저 세상은 그 협정에 서명한 적이 없다. 그 협정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둘째, 실제로 그런 협정은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읽고 어떻게든 내가 바라는 것과 필요한 것을 자연히 알 것이라는 기대를 바탕으로 한다.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일 때는 다른 선택이 없겠지만, 성인으로서 이렇게 한다면 잘못된 전략이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내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도 세상이 서명도 하지 않은 협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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