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는 것이 더 복된 일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사실에 대한 간결한 진술이다. 명절을 예로 들어보자. 선물을 받을 때보다 줄 때 종종 더 신난 적이 없는가? 주는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성경에서는 이를 복되다고 말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어떤 때에 선물이 선물인가? 선물은 누군가가 그것을 받을 때 선물이다. 누군가가 선물을 받지 않는다면 주는 행위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주고 받고, 받고 주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사랑을 하려면 우리는 주는 것뿐 아니라 받을 줄도 알아야만 한다. 선물을 기꺼이 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
지옥을 둘러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화려한 방에서 호화스런 연회에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만 빼면 그곳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까웠다.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팔이 엄청나게 길고 그 끝에 손이 아니라 포크가 달려 있었다. 팔이 너무 길어서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잘차려 놓은 잔치에 배를 곯고 불쌍하게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천국을 보여 달라고 청하자 옆방으로 안내되었다. 놀랍게도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멋진 방에서 호화로운 연회가 열리고 있었고 사람들의 팔은 똑같이 아주 길었다. 하지만 이 방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 천국이란 곧 사랑과 자애로움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랑과 자애로움이 제 효력을 발휘하려면 주는 것과 더불어서 받는 것도 있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타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마시는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천국이 아주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녀는 날마다 스스로 지옥에서 살아갔다.
균형 잡기
균형 잡는 일은 나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의 외부적인 균형을 찾고, 나에 대한 사랑이든 타인에 대한 사랑이든 관계없이 우리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만드는 내부의 정서적인 균형을 찾는 일을 의미한다.
힐렐의 질문
기원전 1세기, 유대교에서 랍비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랍비 힐렐Hillel(생몰연대 미상)은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의 동시대인으로 ‘샨마이파’와 함께 바리새파 랍비의 율법 해석에 큰 영향을 미친 ‘힐렐파’의 창시자였다. 그는 유대 교도의 일상생활, 제의, 의례행위에 관한 종교적 규정을 구약의 율법에서 도출하기 위한 여러 규범을 정했다. 힐렐은 나와 타인 간의 균형을 강조한 유명한 세 가지 질문을 남겼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날 위해 주겠는가?
내가 타인을 위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하겠는가?
(Buxbaum 2004, 268~70에서 인용)
세 가지 질문의 순서에는 의미가 있다. 첫 번째가 반드시 가장 먼저 와야 한다. 이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를 위해 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를 사랑하고 돌보는,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이며 신성한 의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모든 일의 바탕이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우리 자신에게 자애롭지 않은 일은 신성모독인 셈이다. 힐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는 일과 타인을 사랑하는 일중에서 선택을 거부한다. 둘 다 중요하고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겐 타인을 돌보아야 할 의무도 있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하느님의 자녀인 까닭이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나와 타인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에 치우쳐 있다면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로 타인을 위한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내일이면 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