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분노와 증오, 행복해지기 위한 수행, 황금만능주의의 위험

 

분노와 증오
지속적인 불만, 불만족, 혹은 무엇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 등은 분노와 증오를 발생시키는 연료입니다. 자신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친한 친구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위협을 당할 때, 그리고 사람들이 불의를 행할 때 우리 안에서 이러한 불만이 일어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를 방해하면, 우리는 짓밟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화가 나게 됩니다. 이때 취할 수 있는 방식은 결국 분노나 증오와 같은 정서 상태를 촉발하는 인과관계, 즉 연결고리를 인식하며 근원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수행
자선의 중요한 한 형태는 음식, 옷, 피난처 등과 같은 물질적인 것을 주는 것입니다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질로는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정화시킬수록 점점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들을 쉽게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르치는 능력을 충분히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의 위험
요즘 세상이 갈수록 물질을 숭배하고, 권력과 소유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외적 발전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인 세계에서 이렇게 공허한 노력을 하다 보니 사람들은 내면의 평화와 마음의 행복에서 점점 멀어져 방황하게 됩니다.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엄청난 무기를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시대를 사는 우리가 산 증인입니다. 영적인 삶만이 행복과 평화를 수립할 수 있는 굳건한 기반이라고 공언하는 일이 점점 더 필요합니다.

 

수행의 효과
수행은 최고의 방법이며, 연로하거나 젊거나 중년이거나 모두를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수행은 ‘탁월한’ 향수와 같아서 바람을 타고 향기가 흘러가는 일반 향수와 달리 신선한 향기를 사방으로 내뿜습니다. 수행은 비할 데 없는 연고와 같아서 착각의 쓰라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의약품의 역할
용한 의사는 환자 개개인의 특성을 감안해 치료에 적절한 의약품을 처방합니다. 게다가 치료 방식과 재료는 치료하는 시기와 환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게 광범위하고 다양한 의약품과 치료 방식이 존재하지만, 아픈 환자를 낫게 한다는 목표는 동일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과 방식은 살아 있는 존재를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해방시키고,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치유의 힘
영적인 치유의 힘이 자연스럽게 영적인 길을 따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인 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힘은 형상이 새겨진 금에도, 법복으로 지어진 실크에도, 법원의 영장에도 없지만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우리 마음의 본질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위대한 스승들이 정한 가르침을 따릅니다. 마음에서 말하는 본능을 승화시키고 생각을 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교파에 상관없이 매일 수행을 함으로써 모든 종교의 목표를 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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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가질 수 있나?

 

 

『장자莊子』에는 순임금이 대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도道를 가질 수 있나?”

대신이 말했습니다.

“자신의 몸도 자신의 것이 아닌데 어떻게 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소유할 수 없으며, 이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도를 소유하다니요? 자신이 도 안에 있고, 도는 자신 안에 있으니 도를 소유 한다는 생각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몸은 기의 변화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명이 온전히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이는 단지 기가 변화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후손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천지 사이에서 기의 변화가 낳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도가에서는 어떤 것에 대한 집착도 반대합니다. 그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의 변화에 순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문이나 후손에 집착할 필요가 없고 다만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질 뿐입니다.

『장자莊子』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초나라로 향하던 장자가 땅바닥에서 유골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유골을 두드리며 물었습니다.

“어찌 된 일이오? 당신은 생명을 탐하고 양생을 너무 심하게 한 나머지 일찍 죽은 것이오?”

도가에서는 양생을 중시했는데, 양생이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자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굶어 죽었소? 아니면 얼어 죽었소? 그것도 아니라면 천수를 다하고 죽은 거요?”

장자가 살던 시대는 난세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도한 양생으로 명을 단축하는 것, 나라가 망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사형에 처하는 것, 아사나 동사하는 것, 자연에 순응해 살다가 명이 다해 죽는 것입니다. 앞의 네 가지는 자연사가 아니지만, 자연에 순응해 살다가 명이 다해 죽는 것은 자연사입니다.

유골에게 질문을 마친 장자는 그 유골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잤습니다. 그러자 꿈에 유골이 출현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본래 양지바른 곳에서 잘 지내고 있었소.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바람에 머리가 복잡해졌소. 한참 생각해 보았는데, 내게는 섬겨야 할 왕도 없고 다스려야 할 백성도 없소. 철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여기서 머물며 햇볕이나 자유롭게 쬐다 비가 오면 젖을 뿐이오. 그런데 내게 그런 질문을 하여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오? 지금 난 내 처지에 만족하고 있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장자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자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 젊은 시절이 집을 떠나는 것이라면 죽음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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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개요를 파악하라

 

책이나 논문을 읽기 시작할 때 방향감각을 잡는 한 가지 방법은, 전체의 개요를 파악하는 것이다. 책의 경우 제목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제목은 책의 중심주제에 관한 힌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논문의 경우에도 제목에 중심주제와 저자의 전반적인 시각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윌러드 콰인의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1950)을 예로 들어보자. 이 제목에는 저자가 두 가지 요소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즉 저자는 제목을 통해 지금까지 경험주의에서 두 가지 요소를 의심하지 않은 채 신봉해왔으며, 두 가지 요소가 경험주의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독단dogma’으로 규정함으로써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제목들 중에는 의도적으로 정체를 감춘 것도 있다. 『중요한 문제들Mortal Questions』(1979)에 수록된 토머스 네이젤의 논문 「성적 도착증Sexual Perversion」과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은 것일까?What is it Like to be a Bat?」를 비교해보자. 첫 번째 논문의 제목은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논문의 주제가 성적 도착증인 점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물론 저자인 네이젤은 ‘도착증’이란 낱말을 도덕적 비판의 맥락에서 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반면 두 번째 논문의 제목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독자들은 철학자인 네이젤이 굳이 저런 문제를 탐구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은 것일까?’는 알쏭달쏭한 제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논문의 중심주제에 관한 이정표는 담겨 있다(논문을 계속 읽다 보면 주요 사례를 통해 중심주제가 드러날 것이다).
책의 뒤표지에도 해당 책의 중심주제와 저자의 시각이 간략히 설명되어 있을 수 있다. 책의 머리말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저자들은 머리말을 통해 주장의 큰 줄기를 부각시키면서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간략히 설명한다. 목차 부분도 무척 유익한 정보원이다. 특히 저자가 각 장의 제목에 신경 쓸 때는 더욱 그렇다. 적어도 목차는 책의 구조를 나타내는 지표일 수 있다. 책과 논문, 각 장의 결론 부분에는 저자의 핵심주장이 되풀이될 때가 많다. 책이나 논문의 본문을 읽기 전에 결론을 먼저 살펴보는 것도 좋다. 철학논문이나 철학서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미리 결론을 안다고 해서 독서의 재미가 반감된다고 여기지 마라. 저자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미리 알면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라.
읽을 책에 관한 평가가 어떤지 미리 알아두면, 그 책의 개요를 비판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최근의 철학서에 대한 서평이 실려 있는 『철학서Philosophical Books』 같은 잡지는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될 것이다. 수준 높은 서평에는 해당 책의 중요한 점과 특이한 점, 그리고 핵심구절과 주제가 소개되어 있다. 철학사전에서 저자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는 방법도 좋다. 철학사전에는 대개 철학자들의 주요 저작과 핵심주제가 요약되어 있다. 가능하다면 여러 참고문헌들도 살펴보기 바란다. 참고문헌은 해당 철학자의 저서를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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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귀지
최병현 / 문학과비평사 / 198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냉귀지』에 붙여서

 

 

 

삼십여 년 전, 세월에 강도를 당하고 길가에 쓰러져 절판된 책을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출판사가 보고 딱했던지 일으켜 세워 살려놓았다. 한동안 대지를 베개 베고 쓰러졌던 자는 몸보다 의식이 먼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산속에서 잠들었던 립밴 윙클보다 거의 두 배가량 깊은 잠을 잤으니 온몸이 녹슬어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는다. 그때의 사냥감은 사라지고, 사냥감을 쫓던 개마저 보이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달리다 골짜기 바위에 부딪쳐 멍들었던 메아리일 뿐이다. 그때의 처절함은 이제 미학적으로나 평가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어느덧 자서전을 쓸 나이가 되어, 지난날 한 움큼 번개를 움켜쥐고 밤하늘의 칠판에 휘갈겨 쓴 것을 햇살이 눈부신 오후에 천천히 읽으려 하니 그때의 진동과 감동이 어찌 같으리요만, 검색대를 통과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기에 마지못해 바구니에 냉귀지를 담는다, 신발과 함께. 은근히 누군가 나를 비행기 태워줄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재판再版은 재판裁判이다. 그리고 심판審判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를 재판에 회부한다. 의심의 눈초리를 정중하게 초대한다. 유대인의 왕이 받았던 조롱마저 감수할 각오로. 다만 그동안 내가 무시했던 세상과 이를 대변하는 판사들이 좀 달라졌기를 기대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책이 세상과 다시 화해하기를 희망하면서.
올챙이 꼬리는 때가 되면 떨어져나가는데, 『냉귀지冷鬼志』에 대한 어렵다는 세간의 인식은 쉽게 떨어지지가 않는다. 떨어져나가야 할 꼬리가 몸의 일부가 된 것을 생각하면, 걸핏 스치는 바람에도 부대끼는 작가는 괴롭기만 하다. 과연 『냉귀지』는 어려워 영원히 한국 문학의 독도가 되고 말 것인가?
오렌지를 먹으려면 껍질을 벗겨야 하고 자두는 껍질째 먹어야 제격이다. 눈으로 먹는 책도 읽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냉귀지』처럼 껍질이 두꺼운 책을 자두인 양 생각하고 읽으면 『냉귀지』의 맛은 원래의 맛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책의 장마다 땅끝까지 전하고 있건만, 독자들은 자두만을 생각한 나머지 계속 오렌지 밭에서 자두만을 찾고 있다 눈밭에서 신발과 발자국을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 『냉귀지』가 모두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어렵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떨떠름한 맛으로 입소문이 나게 된 것이다. 살아 있는 화석이 된 것이다.
달고 시큼한 『냉귀지』의 맛을 삼팔선처럼 가로막는 그 빛나는 껍질은 대체 무엇인가? 『냉귀지』는 이른바 시설詩說이다. 시이자 소설인 것이다. 이 새로운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에게는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겠지만, 사실 시설이야말로 시와 소설의 원조인 것이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서사시가 그런 것이고, 사설시조에 판소리가 그런 것인데 시간과 세상의 흐름 속에서 홍수에 그만 뗏목처럼 이산가족이 된 것이 바로 이들인 것이다. 시를 시로만 알고 소설을 소설로만 알고 쓰다 보면 오히려 시와 소설이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발견한 나머지, 『냉귀지』의 저자는 1970년대 말, 미국유학의 자유스러움을 틈타 독자들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전격적으로 시와 소설을 한일합방했던 것이다. 그러니 고정관념에 불타는 독자들에게 어찌 반발이 없을 것인가?
독자들의 원한을 산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언어, 즉 냉귀지라는 사실이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실상인데,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인 믿음만을 내세운 데다, 투명인간만도 못한 언어가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명함을 돌렸으니, 실망이 원망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벽돌보다 건물을 원하는 사람들은 무관심의 벽돌을 집어던졌다. 지성의 세계에서 막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더욱 거칠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급한 나머지 몰랐던 사실은 『냉귀지』는 언어이자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냥 인물이 아닌 일구라는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일구라는 이름은 그의 성인 사 자字를 더하면 왕년에 유명했던 연예인만큼이나 분명해진다. 그의 동생인 일육도 비록 이복이기는 하지만 성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사일육과 오일육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이야기했는데도, 아니 노래했는데도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질 못했으니, 이들을 한번쯤 내가 마련한 7080 무대에 띄워야 될 이유가 있지 않은가? 이들에게 교복과 군복을 입히고, 주인공인 일구에게는 냉귀지라는 호號를 더하고 로고스라는 자字를 더해서 말이다. 자유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으니 감히 말씀이란 이름을 감당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혹자는 『냉귀지』에 있어 플롯을 이야기하나, 그것은 소설과 시설의 플롯을 사뭇 착각하기 때문이다. 『냉귀지』의 플롯은 어쩌면 작품의 설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할는지 모른다. 사일구라는 주인공이 학생혁명은 물론 조선의 강직한 선비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로서, 군사독재시대에 모두의 기억에서 삭제된 자신의 생일, 즉 4.19 학생혁명 기념일 하루를 어떻게 행진하면서 헤매는지, 시대의 흐름과 의식의 흐름을 흑백으로 줌인하고자 함이다. 몸은 한가로운데 마음이 분주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 실상을 파헤치고자 함이라. 그러나 의식이라는 것이 지하철과 같아서 가다서다 하는 것이라서 총 아홉 정거장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9장章인 것이다. 이만하면 플롯으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백년해로는 몰라도 신혼살림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태백산맥』이나 『토지』는 길어서 못 읽고 『냉귀지』는 질質려서 못 읽는 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는 바이다. 원래 만리장성보다는 피라미드를 선호하는지라, 세월의 찬바람에 허물어지는 성벽보다는 차라리 신의 질투 때문에 허공에서 멈춰버린 바벨탑이 나의 모델이다. 언어의 양적 부피보다는 질적인 다양화가 내가 함부로 쏘고자 하는 과녁이다. 한 나라는 한 사람이 있어 중요하고, 한 사람은 한마디 말이 있어 중요하다 했으니, 인간의 절반은 자신이요, 그 나머지는 표현이라 했으니, 한마디 말을 남기고자 말의 탑을 쌓고 허무는 시지푸스적인 예술에 바윗돌을 굴려서 시동을 건 것이다. 일찍이 호랑이띠로 태어나 송하맹호로 자란지라, 죽어서 한 장의 명함을 남기고 쑥과 마늘이 있는 동굴 속으로 다시 사라지고자 함이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남겨야 할 말의 가죽 말이다.
동작에 있어 절정은 춤이고, 소리에 있어 절정은 음악이니, 말에 있어 절정은 시일 수밖에 없다. 말로 이루어진 문학이 지향하는 것은 시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설을 달리는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다면, 시는 장대높이뛰기이다. 거꾸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 기분을 어찌 말로 다 카운트다운할 수 있으리요? 또 장대를 버리고 해탈한 모습으로 꽃잎처럼 떨어질 때 느끼는 희열을 어찌 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으리요?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장대높이뛰기도 최소한의 달리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 시가 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달려야 뛰어오를 수 있듯이 최소한의 이야기가 있어야 시가 추진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책 속에서 죽은 말만을 갈아엎으며 살 것인가? 학자가 아닌 책벌레로 둔갑하고 말 것인가? 그나마 죽은 말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은 책벌레보다 더 끔찍한 눈 먼 두더지로 카프카하고 말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의 삶과 삶에 얽힌 언어의 품질과 생산성을 어떻게 한꺼번에 향상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거꾸로 하늘에 오르듯, 우선 종래의 언어적인 관행을 구조조정해야지 정년 때까지 마냥 기다려서는 안 될 것이다. 디스코를 디스코스로 바꾸고, 주인공도 사람에서 언어로 바꾸고,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를 주문처럼 외워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소설이 있으라 하니 시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설인 것이다.
그런데 시를 주문했더니 욕이 배달된 것은 어찌된 셈인가? 데모는 말로도 충분한데 왜 힘으로 하려고 힘쓰는가? 말의 힘이 무력해서인가? 물러가라 물러가라 사자성어 하나로 나아가고 후퇴하면서 민주주의를 하는 것을 보여주었건만, 물러가야 할 파도가 오히려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쓰레기만 쌓고 있으니,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풍경이 어수선하지 않은가? 과연 누가 이 엄청난 말의 기름띠를 치우고 흰 수건으로 검은 바위를 닦을 것인가? 과연 누가 그 바닷속 깊은 상처를 치유할 것인가? 언어의 폭력은 군부의 폭력을 갱신하고 말 것인가? 몇십 년 사이에 왕따와 가해자의 구분이 사라졌으니, 모두가 가해자고 모두가 피해자인 세상이 내 사는 세상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선악이 구분이 안 되는 세상이야말로 위험하지 않은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것보다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가 좋았던 것 아닐까?
이 시대에 『냉귀지』의 미션 임파서블은 나쁜 언어와 싸우는 것이다. 혈기방장할 때는 동생하고 싸우고 독재와 싸웠지만, 나이 들어서는 팔다리를 덜 혹사하면서 정명正名을 해치는 자들과 한판 엉켜 붙고자 한다. 마음을 흐리는 거품과 찌꺼기와 싸우고자 한다. 적당한 숫자의 구경꾼과 활로어만 있어 준다면, 못난 자신과 또 한판 신나게 붙어보고 싶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남을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승리라고 했으니, 그 옛날 공식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말의 군기를 잡고 훈관정음訓官正音을 선포하리다. 백성들이 쓰는 말투가 심히 허황되고 저속하여…… 등등으로 시작하는 나홀로 담화문을 발표하고, 과감하게 언론은 얼론으로, 소설은 시설로 바꾸는 것이다. 사과나 사죄를 대신한 유감이란 말은 엄격히 규제하고, 알면서도 모른다고 잡아떼는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무식한 사람도 모른다는 말을 아예 못쓰게 할 것이다. 훈관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녹슨 책이 목민심서이니, 『냉귀지』의 혀와 칼끝은 사이비의 심장을 겨누도다. 겉으로 호박씨 까는 북곽을 호질하면서. 국회라는 제일 맛없는 회를 욕하면서. 다짜고짜 황금이 녹슬면 쇠는 어떻게 되느냐고?
수만 리를 헤엄쳐 외딴 섬 백사장에 알을 까는 왕거북을 보았는가? 지느러미 같은 두 발로 모래를 파헤치고 그 모래의 허망함 속에 수백 개의 알을 낳지만 그중 과연 몇이나 부화해 꼬물거리며 저 멀리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실을 수 있을 것인가? 햇살로 짠 바구니에 알을 가득 담아보지만 그 어느 것도 닭이 되어 아침을 깨우지 못하고, 한낱 제주도 같은 에그프라이가 되어 바다접시 위에 놓이고 마는가? 『냉귀지』가 까고 파묻은 수많은 말들도 그 운명이 별반 다르지 않으리니, 오, 해 아래서 수고함이여! 알을 낳고 묵묵히 바다로 돌아가는 소리 없는 일꾼이 바로 내가 아니던가?
무슨 서문이 이리도 길고 지루하단 말인가? 이러다간 누군가 남대문처럼 불 지르지 않겠는가? 『1812년 서곡』보다도 장엄장황하니 시설의 서문이라 신경이 쓰인 것인가? 2백년이 지난 2012년, 통과하지 못한 개선문이라면 몰라도 막간에 대포소리만은 빼놓지 않게 잔소리를 하기 위해서인가? 야에서 여로 변신한 청중들을 위하여, 퇴각하는 나폴레옹을 뒤쫓는 영원한 반말과 반발을 위해, 무법을 주도하는 무서운 십대를 위해, 차마 말의 숨을 거두지 못하고 효력도 없는 유언을 스치는 바람 테이프에 녹음하는가? 젊어서는 가진 게 없어 저항하고, 늙어서는 젊기 위해 저항하는가? 향후 세대 간의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이며, 또 어떻게 변질되고 비꼬일 것인가? 줄기세포로 연명하는 고령들은 무엇을 향해 물러가라고 외칠 것인가? 쿠훌린처럼 파도와 싸울 것인가, 적군과 아군도 분간하지 못한 채? 과연 힘없는 목소리에 실려 나온 『냉귀지』는 보이지도 않는 골문을 향해 마지막 발길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 이루었다! 푸른 하늘 올려다보며 힘없이 떨어뜨린 힘 있는 그 한마디, 발등에 떨어지기 전에 받들리라. 망망한 바다 솟구치며 낚아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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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귀지
최병현 / 문학과비평사 / 198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냉귀지』가 세상에 태어난 이야기

 

 

묘한 것이 인연이라지만 나와 『냉귀지』처럼 묘한 인연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지난 해 고국을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나왔지만 며칠밖에 머물 수 없는 형편이어서 숨 가쁘게 집안 어른과 친척들을 찾아보고 친구도 만나고 시집간 옛 애인까지 만나다 보니 출국일자가 눈앞에 다가오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만사 제쳐놓고 명동에 나가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면서 추억과 감회를 만끽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획대로 미도파와 신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눈요기 배요기를 실컷 하고 몸도 맘도 가득 차 서서히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때가 아마 늦은 오후가 아니면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또 하루가 이렇게 해서 다 가는구나 아쉽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백화점을 나서니 갑자기 눈이 맵고 기침이 나지 않는가? 당시 한국은 학생 데모가 극심하고 혼란한 상태였다. 내가 명동을 나간 날은 우연히 6·25였는데 모르면 몰라도 6·25를 방불케 할 만큼 학생과 경찰의 충돌이 치열했었다. 나는 데모를 피하려다가도 한편 구경하고 싶기도 해서 미처 마음을 못 정한 상태로 길을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또다시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눈물은 범벅이고 기침은 연속이었다. 손수건으로 두 눈을 거의 붕대처럼 감고 가는데, 갑자기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내가 들고 있던 쇼핑백 속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동시에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잡아라!” 하는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기에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누군가를 다급하게 뒤쫓고 있었다. 쫓기는 사람은 모르면 몰라도 학생일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건대 이 사건이 내가 『냉귀지』와 만나게 된 원인이며 어쩌면 『냉귀지』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동기이자 최초의 출생신고라고 할 수 있다. 『냉귀지』의 저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할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도 그의 신원이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이상, 『냉귀지』는 원고지 핏덩어리로 내 쇼핑백에 떨어졌을 때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물건을 주우면 주인을 찾아주거나 못 찾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원칙이다. 나는 데모가 끝나고 밤이 어두워질 때까지 부근을 배회하면서 떨어진 물건의 주인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만 가고 밤만 깊어갈 뿐 아무도 나타나질 않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숨었단 말인가, 잡혔단 말인가? 박종철은 이미 죽었으니 그가 그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또 하나의 박종철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발버둥치고 있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무작정 기다릴 수만도 없는 일이어서 나는 인근 다방에 들어가 도대체 내 가방 속에 떨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것은 뜻밖에도 마치 급히 도망이라도 치듯 어지럽게 흘겨 쓴 원고뭉치가 아닌가? 그리고 첫 장에는 “냉귀지”라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궁리를 해보았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별로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지 않았다. 경찰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경찰이 수상하게 찾는 것이니 오히려 숨기고 보호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의도와는 상관없이 지금 내가 불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불안해지기조차 했다. 과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또, 주운 것은 주운 자 맘대로라지만 만일 주운 것이 아니고 맡겼다면 『냉귀지』의 신원과 소재를 경찰에 알리는 것은 주인에 대한 배반이 아니겠는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나가는 행인의 보따리 속에 집어던져야 했을 때 어찌 그의 간절한 기도와 신뢰를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애기 같은 핏덩어리 원고, 내 자식으로라도 키워야 될 것 아닌가?

 

작품이 작가를 찾습니다
다음날 신문사를 찾아갔다. “작품이 작가를 찾아요?” 광고부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만 나에게 물었다. 나는 또 난처해졌다. 사실대로 설명하자면 너무 복잡하고 믿지도 않을 것만 같고 의심스런 나머지 자칫하면 신문에 안 실어 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또 말을 잘못했다간 경찰서에 신고할지도 몰랐다.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인 수십 대의 전화기들이 눈에 띄면서 일제히 울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럴 사정이 있노라고 얼버무리고 실어만 주신다면 돈 내고도 고맙겠다고 사정했다. 직원의 갸우뚱했던 고개가 마지못해 끄덕여졌다.
미국으로 출발하려면 약 사흘밖에 안 남았다. 그런데 신문광고에는 아무런 반응조차 없지 않은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기만 하면 어디서 전화연락 없었느냐고 초조하게 물었다. 서울 시민들은 데모기사만 읽고 광고 같은 것은 안 읽는단 말인가? 나중에는 혹시 광고의 어딘가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문사에 전화해서 광고를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명동에서 고의적인 실수로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린 분을 찾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광고부 직원이 “아니 지금 수수께끼를 내시는 겁니까? 아니면, 광고를 내시는 겁니까? 고의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가라니요. 도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렇게 밝히기를 꺼려 하십니까? 주인을 못 찾으면 경찰서에 갖다 주면 그만이지 돈 내고 광고까지 하시는 분은 광고사상 처음 봤습니다.” 말인즉 옳았으나 남의 속을 모르는 말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명동에서 원고뭉치를 읽어버린 사람을 찾는다고?”
소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 사람들은 광고도 안 읽나? 학생들은 뭘 하기에 광고 읽을 시간도 없는가? 책이라도 읽는단 말인가? 결국 나는 『냉귀지』의 저자를 찾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뭔가 잃어버린 기분으로. 찾지 못한 기분은 잃어버린 기분이니까.

 

출판사의 이유
미국에 돌아온 나는 『냉귀지』 때문에 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냉귀지』는 내가 일을 갔다 돌아오면 마치 호소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내가 미국에 왔느냐고, 한국말이 영어 속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푸념과 불평을 토하는 것만 같았다. 죽어도 한국에서 죽고 썩어도 한국에서 썩고 쓰레기통에 버려져도 한국의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싶다고, 그러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문득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즉 『냉귀지』를 출판하면 작가를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다음날 나는 은행에 가서 10전짜리 은전을 잔뜩 바꿔가지고 시립도서관에 있는 복사기로 『냉귀지』의 사본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한국에 있는 유명 출판사들에게 간단한 편지와 더불어 『냉귀지』를 우송했다. 『냉귀지』를 우체국에 가지고 가 한국으로 부치던 날 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냉귀지』가 운명적으로 나를 만난 것처럼 또한 운명적으로 자기의 주인과 극적인 상봉을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한국으로부터 『냉귀지』에 대한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다. 집에 돌아와 우체통이 비어 있으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한국에 있는 출판사에다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용건을 말했더니, 전화를 받는 사람마다 자기는 잘 모르겠으니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자꾸만 다른 사람을 바꿔주었다. 참다 못해 전화를 끊을까 말까 포기하려는 찰나 약간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국이라고요?” “아 그 제목이 뭐더라, 이상한 원고 말인가요? 그렇죠, 『냉귀지』죠,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나는 잘 알았노라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왕 내친 김에 또 다른 출판사에다가 전화를 걸었다. 다른 출판사 역시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예술성은 몰라도 상품성은, 글쎄요, 정치성은 강하더구만, 글쎄요, 적어도 제 출판 경험에 의하면 이런 작품은, 물론 힘들게 쓰셨겠지만,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나.” 『냉귀지』는 내 작품이 아니라고 대답하자 상대방은 몹시 뜻밖이라는 듯이 “그러면 부탁을 받으셨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그래서 그것 역시 아니고 사실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주운 거나 다름없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선생에게 솔직히 말씀드리겠는데, 임자도 없는 원고를 출판하려고 국제적으로 애쓰시느니 차라리 처음 주웠던 자리에다 다시 버리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가 저질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고상한 것은 안 먹히고 안 팔립니다. 『냉귀지』가 아니고 『삼국지』라면 모르지만, 그게 고질이죠. 『냉귀지』 속에 있는 말마따나 저질은 고질이죠. 출판사는 독자적獨白的이어야 하는데 독자적讀者的이죠. 그래서 출판과 노름판이 다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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