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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귀지
최병현 / 문학과비평사 / 198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냉귀지』에 붙여서

삼십여 년 전, 세월에 강도를 당하고 길가에 쓰러져 절판된 책을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출판사가 보고 딱했던지 일으켜 세워 살려놓았다. 한동안 대지를 베개 베고 쓰러졌던 자는 몸보다 의식이 먼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산속에서 잠들었던 립밴 윙클보다 거의 두 배가량 깊은 잠을 잤으니 온몸이 녹슬어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는다. 그때의 사냥감은 사라지고, 사냥감을 쫓던 개마저 보이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달리다 골짜기 바위에 부딪쳐 멍들었던 메아리일 뿐이다. 그때의 처절함은 이제 미학적으로나 평가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어느덧 자서전을 쓸 나이가 되어, 지난날 한 움큼 번개를 움켜쥐고 밤하늘의 칠판에 휘갈겨 쓴 것을 햇살이 눈부신 오후에 천천히 읽으려 하니 그때의 진동과 감동이 어찌 같으리요만, 검색대를 통과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기에 마지못해 바구니에 냉귀지를 담는다, 신발과 함께. 은근히 누군가 나를 비행기 태워줄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재판再版은 재판裁判이다. 그리고 심판審判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를 재판에 회부한다. 의심의 눈초리를 정중하게 초대한다. 유대인의 왕이 받았던 조롱마저 감수할 각오로. 다만 그동안 내가 무시했던 세상과 이를 대변하는 판사들이 좀 달라졌기를 기대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책이 세상과 다시 화해하기를 희망하면서.
올챙이 꼬리는 때가 되면 떨어져나가는데, 『냉귀지冷鬼志』에 대한 어렵다는 세간의 인식은 쉽게 떨어지지가 않는다. 떨어져나가야 할 꼬리가 몸의 일부가 된 것을 생각하면, 걸핏 스치는 바람에도 부대끼는 작가는 괴롭기만 하다. 과연 『냉귀지』는 어려워 영원히 한국 문학의 독도가 되고 말 것인가?
오렌지를 먹으려면 껍질을 벗겨야 하고 자두는 껍질째 먹어야 제격이다. 눈으로 먹는 책도 읽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냉귀지』처럼 껍질이 두꺼운 책을 자두인 양 생각하고 읽으면 『냉귀지』의 맛은 원래의 맛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책의 장마다 땅끝까지 전하고 있건만, 독자들은 자두만을 생각한 나머지 계속 오렌지 밭에서 자두만을 찾고 있다 눈밭에서 신발과 발자국을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 『냉귀지』가 모두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어렵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떨떠름한 맛으로 입소문이 나게 된 것이다. 살아 있는 화석이 된 것이다.
달고 시큼한 『냉귀지』의 맛을 삼팔선처럼 가로막는 그 빛나는 껍질은 대체 무엇인가? 『냉귀지』는 이른바 시설詩說이다. 시이자 소설인 것이다. 이 새로운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에게는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겠지만, 사실 시설이야말로 시와 소설의 원조인 것이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서사시가 그런 것이고, 사설시조에 판소리가 그런 것인데 시간과 세상의 흐름 속에서 홍수에 그만 뗏목처럼 이산가족이 된 것이 바로 이들인 것이다. 시를 시로만 알고 소설을 소설로만 알고 쓰다 보면 오히려 시와 소설이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발견한 나머지, 『냉귀지』의 저자는 1970년대 말, 미국유학의 자유스러움을 틈타 독자들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전격적으로 시와 소설을 한일합방했던 것이다. 그러니 고정관념에 불타는 독자들에게 어찌 반발이 없을 것인가?
독자들의 원한을 산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언어, 즉 냉귀지라는 사실이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실상인데,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인 믿음만을 내세운 데다, 투명인간만도 못한 언어가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명함을 돌렸으니, 실망이 원망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벽돌보다 건물을 원하는 사람들은 무관심의 벽돌을 집어던졌다. 지성의 세계에서 막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더욱 거칠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급한 나머지 몰랐던 사실은 『냉귀지』는 언어이자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냥 인물이 아닌 일구라는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일구라는 이름은 그의 성인 사 자字를 더하면 왕년에 유명했던 연예인만큼이나 분명해진다. 그의 동생인 일육도 비록 이복이기는 하지만 성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사일육과 오일육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이야기했는데도, 아니 노래했는데도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질 못했으니, 이들을 한번쯤 내가 마련한 7080 무대에 띄워야 될 이유가 있지 않은가? 이들에게 교복과 군복을 입히고, 주인공인 일구에게는 냉귀지라는 호號를 더하고 로고스라는 자字를 더해서 말이다. 자유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으니 감히 말씀이란 이름을 감당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혹자는 『냉귀지』에 있어 플롯을 이야기하나, 그것은 소설과 시설의 플롯을 사뭇 착각하기 때문이다. 『냉귀지』의 플롯은 어쩌면 작품의 설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할는지 모른다. 사일구라는 주인공이 학생혁명은 물론 조선의 강직한 선비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로서, 군사독재시대에 모두의 기억에서 삭제된 자신의 생일, 즉 4.19 학생혁명 기념일 하루를 어떻게 행진하면서 헤매는지, 시대의 흐름과 의식의 흐름을 흑백으로 줌인하고자 함이다. 몸은 한가로운데 마음이 분주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 실상을 파헤치고자 함이라. 그러나 의식이라는 것이 지하철과 같아서 가다서다 하는 것이라서 총 아홉 정거장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9장章인 것이다. 이만하면 플롯으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백년해로는 몰라도 신혼살림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태백산맥』이나 『토지』는 길어서 못 읽고 『냉귀지』는 질質려서 못 읽는 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는 바이다. 원래 만리장성보다는 피라미드를 선호하는지라, 세월의 찬바람에 허물어지는 성벽보다는 차라리 신의 질투 때문에 허공에서 멈춰버린 바벨탑이 나의 모델이다. 언어의 양적 부피보다는 질적인 다양화가 내가 함부로 쏘고자 하는 과녁이다. 한 나라는 한 사람이 있어 중요하고, 한 사람은 한마디 말이 있어 중요하다 했으니, 인간의 절반은 자신이요, 그 나머지는 표현이라 했으니, 한마디 말을 남기고자 말의 탑을 쌓고 허무는 시지푸스적인 예술에 바윗돌을 굴려서 시동을 건 것이다. 일찍이 호랑이띠로 태어나 송하맹호로 자란지라, 죽어서 한 장의 명함을 남기고 쑥과 마늘이 있는 동굴 속으로 다시 사라지고자 함이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남겨야 할 말의 가죽 말이다.
동작에 있어 절정은 춤이고, 소리에 있어 절정은 음악이니, 말에 있어 절정은 시일 수밖에 없다. 말로 이루어진 문학이 지향하는 것은 시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설을 달리는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다면, 시는 장대높이뛰기이다. 거꾸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 기분을 어찌 말로 다 카운트다운할 수 있으리요? 또 장대를 버리고 해탈한 모습으로 꽃잎처럼 떨어질 때 느끼는 희열을 어찌 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으리요?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장대높이뛰기도 최소한의 달리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 시가 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달려야 뛰어오를 수 있듯이 최소한의 이야기가 있어야 시가 추진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책 속에서 죽은 말만을 갈아엎으며 살 것인가? 학자가 아닌 책벌레로 둔갑하고 말 것인가? 그나마 죽은 말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은 책벌레보다 더 끔찍한 눈 먼 두더지로 카프카하고 말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의 삶과 삶에 얽힌 언어의 품질과 생산성을 어떻게 한꺼번에 향상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거꾸로 하늘에 오르듯, 우선 종래의 언어적인 관행을 구조조정해야지 정년 때까지 마냥 기다려서는 안 될 것이다. 디스코를 디스코스로 바꾸고, 주인공도 사람에서 언어로 바꾸고,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를 주문처럼 외워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소설이 있으라 하니 시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설인 것이다.
그런데 시를 주문했더니 욕이 배달된 것은 어찌된 셈인가? 데모는 말로도 충분한데 왜 힘으로 하려고 힘쓰는가? 말의 힘이 무력해서인가? 물러가라 물러가라 사자성어 하나로 나아가고 후퇴하면서 민주주의를 하는 것을 보여주었건만, 물러가야 할 파도가 오히려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쓰레기만 쌓고 있으니,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풍경이 어수선하지 않은가? 과연 누가 이 엄청난 말의 기름띠를 치우고 흰 수건으로 검은 바위를 닦을 것인가? 과연 누가 그 바닷속 깊은 상처를 치유할 것인가? 언어의 폭력은 군부의 폭력을 갱신하고 말 것인가? 몇십 년 사이에 왕따와 가해자의 구분이 사라졌으니, 모두가 가해자고 모두가 피해자인 세상이 내 사는 세상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선악이 구분이 안 되는 세상이야말로 위험하지 않은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것보다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가 좋았던 것 아닐까?
이 시대에 『냉귀지』의 미션 임파서블은 나쁜 언어와 싸우는 것이다. 혈기방장할 때는 동생하고 싸우고 독재와 싸웠지만, 나이 들어서는 팔다리를 덜 혹사하면서 정명正名을 해치는 자들과 한판 엉켜 붙고자 한다. 마음을 흐리는 거품과 찌꺼기와 싸우고자 한다. 적당한 숫자의 구경꾼과 활로어만 있어 준다면, 못난 자신과 또 한판 신나게 붙어보고 싶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남을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승리라고 했으니, 그 옛날 공식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말의 군기를 잡고 훈관정음訓官正音을 선포하리다. 백성들이 쓰는 말투가 심히 허황되고 저속하여…… 등등으로 시작하는 나홀로 담화문을 발표하고, 과감하게 언론은 얼론으로, 소설은 시설로 바꾸는 것이다. 사과나 사죄를 대신한 유감이란 말은 엄격히 규제하고, 알면서도 모른다고 잡아떼는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무식한 사람도 모른다는 말을 아예 못쓰게 할 것이다. 훈관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녹슨 책이 목민심서이니, 『냉귀지』의 혀와 칼끝은 사이비의 심장을 겨누도다. 겉으로 호박씨 까는 북곽을 호질하면서. 국회라는 제일 맛없는 회를 욕하면서. 다짜고짜 황금이 녹슬면 쇠는 어떻게 되느냐고?
수만 리를 헤엄쳐 외딴 섬 백사장에 알을 까는 왕거북을 보았는가? 지느러미 같은 두 발로 모래를 파헤치고 그 모래의 허망함 속에 수백 개의 알을 낳지만 그중 과연 몇이나 부화해 꼬물거리며 저 멀리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실을 수 있을 것인가? 햇살로 짠 바구니에 알을 가득 담아보지만 그 어느 것도 닭이 되어 아침을 깨우지 못하고, 한낱 제주도 같은 에그프라이가 되어 바다접시 위에 놓이고 마는가? 『냉귀지』가 까고 파묻은 수많은 말들도 그 운명이 별반 다르지 않으리니, 오, 해 아래서 수고함이여! 알을 낳고 묵묵히 바다로 돌아가는 소리 없는 일꾼이 바로 내가 아니던가?
무슨 서문이 이리도 길고 지루하단 말인가? 이러다간 누군가 남대문처럼 불 지르지 않겠는가? 『1812년 서곡』보다도 장엄장황하니 시설의 서문이라 신경이 쓰인 것인가? 2백년이 지난 2012년, 통과하지 못한 개선문이라면 몰라도 막간에 대포소리만은 빼놓지 않게 잔소리를 하기 위해서인가? 야에서 여로 변신한 청중들을 위하여, 퇴각하는 나폴레옹을 뒤쫓는 영원한 반말과 반발을 위해, 무법을 주도하는 무서운 십대를 위해, 차마 말의 숨을 거두지 못하고 효력도 없는 유언을 스치는 바람 테이프에 녹음하는가? 젊어서는 가진 게 없어 저항하고, 늙어서는 젊기 위해 저항하는가? 향후 세대 간의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이며, 또 어떻게 변질되고 비꼬일 것인가? 줄기세포로 연명하는 고령들은 무엇을 향해 물러가라고 외칠 것인가? 쿠훌린처럼 파도와 싸울 것인가, 적군과 아군도 분간하지 못한 채? 과연 힘없는 목소리에 실려 나온 『냉귀지』는 보이지도 않는 골문을 향해 마지막 발길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 이루었다! 푸른 하늘 올려다보며 힘없이 떨어뜨린 힘 있는 그 한마디, 발등에 떨어지기 전에 받들리라. 망망한 바다 솟구치며 낚아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