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단지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왜 나쁜 일일까

 

 

 

 

 

 

칸트가 사용한 ‘수단’이나 ‘목적’이라는 말에는 좀 이상한 데가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앞서 지적했듯이, 기본 사상은 이미 잘 알려졌다. 사람들은 완전한 성인에게 합당한 만큼 어느 정도의 존중을 해달라고 흔히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합당하게 존중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칸트가 무엇이 그러한 존엄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칸트는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이나 미치광이나 아주 어린 아기가 아닌) 합리적 행위자이기에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합리적 행위자라 하여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위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때로 인간이 비합리적으로 행위할 때가 있다고 해도, 인간은 합리적 행위를 할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적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기본적으로 비이성적 존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자유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자유의 부정적 측면은 곧 이성적 존재는 자신의 추론과 결정이 아닌 다른 추론이나 결정의 영향을 받아 행위하지 않음을 뜻한다. 동물 같은 비이성적 존재는 스스로 묻거나 평가하지 않고 본능과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 굶주린 동물 앞에 먹이를 놓아두었을 때 동물이 그걸 먹어치운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이 확실한 일이다. 이 과정에 간섭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동물이 그것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예를 들면 두려움 같은 더 큰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동물은 과연 그 먹이를 먹어야 할지 같은 의문을 결코 제기하지 못한다. 칸트는 인간이 주어진 방식으로 행위해야 할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지를 언제나 스스로 물을 수 있기에 기본적으로 동물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단순히 타고난 본능이나 충동만으로 행위하도록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자유의 긍정적 측면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행위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성적으로 행위한다는 건 이성을 바탕으로, 다른 행위가 아닌, 어느 특정 행위를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음을 뜻한다. 굶주린 개는 본능에 따라 밥그릇으로 달려가지만, 인간은 행위를 하기에 앞서 심사숙고할 수 있다. 하려는 행위의 이점과 불리한 점에 관해 여러모로 생각할
능력이 있다. 생각을 비교해보고 가장 좋아 보이는 행위를 결정한다. 하나의 행위에 장단점이 있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고, 그 행위를 해야 할 가장 강력한 이유를 고려하여 결정한 바를 실행하는 능력을 지닌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행위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이나 충동에서 동기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하려는 행위에 대한 심사숙고를 거쳐 각각의 장단점에 상당하는 비중을 매기는 식으로, 이성에 따라 동기를 마련한다. 그렇다고 인간이 늘 이성에 따라 행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성에 따라 행위할 경우, 인간은 자율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반면 때때로, 인간은 자신을 본능에 내맡기기도 하는데, 이때 인간은타 율적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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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견해는 공리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다

 

 

 

 

 

칸트의 윤리학은 자율적인 개인에게 똑같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음을 인정한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똑같이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타인의 삶에 관여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뜻한다. 개인들 사이에 경계선이 있음을 인정해야 함을 말한다. 각 개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독립적이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떻게 행위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율적인 개인은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 따라서 이 절의 첫 대목에 나온 주인공들이 그리던, 칸트 윤리학의 기본 구도와 그것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는 모든 행위자가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각각의 개인이 독자적인 권리 영역 안에서 자신만의 권위를 누리며 다른 사람들이 침범할 수 없는 세상에서만 실현될 것이다. 물론 각 개인이 스스로 바라는 모든 것을 할 자유를 지닌 건 아니다. 타인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본 사상은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위할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자율적 존재인 인간이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곧 인간이 지닌 존엄성의 일부다. 개인의 존엄은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비슷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전제 아래서 존중된다. 이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건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칸트의 견해는 공리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다. 공리주의자들은 행위가 가져오는 행복이나 불행의 크기로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린다. 불행을 뒤덮고도 남는 행복의 양이 클수록 옳은 행위인 것이다. 여기서 공리주의자들은 의문스러운 결론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소수를 노예화하여 사회 전반의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다면,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옳은 행위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칸트는 설령 최대의 행복을 실현한다 하더라도, 노예제는 나쁜 것이라고 (매우 직관적으로) 생각한다. 칸트가 볼 때 노예제는 노예들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처럼 희생물로 삼아 그 사회의 나머지 부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기에 나쁘다. 노예제는 노예를 자율적 결정능력이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에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다. 노예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재산이 될 뿐이다. 노예제는 인간의 자율을 무시하기에 그 결과가 어떠하건 간에 나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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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들의 혁명: 마우리아 왕조

 

 

 

 

 

갠지스 계곡에 자리 잡은 하스티나푸라와 아유다야는 아리아인의 세력이 동쪽으로 뻗어나갔음을 보여준다.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에는 아리아인의 인도 내 정착지인 펀자브 지역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320년에 굽타 왕조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리아바르타Aryavarta, 즉 ‘고귀한 종족들의 거주지’는 ‘동부에서 서부의 해안’까지 뻗어 있었다. 아리아인의 동부 진출이 이처럼 지연된 건 하나의 사실을 암시한다. 바로 아리아인이 갠지스 계곡지역의 문명에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 말이다. 당시 마가다Magadha로 불린 갠지스 계곡지역의 사람들은 독특하고 풍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아리아인은 이 때문에 갠지스 계곡지역을 인더스 계곡보다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지역으로 여겼을 것이다. 파괴는 열쇠가 될 수 없었다. 조화를 이루는 것만이 해답이었다. 특히 종교적 측면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다. 마가다 지역사회를 접한 아리아인의 경악은 『마하바라타』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마가다 지역민의 불경스러움과 무질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세상은 본말이 전도된 곳이다. 신들의 사원은 무시당하고 있으며, 대지는 납골당으로 메워져 있다. 심지어 가장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조차 브라만을 섬기기를 거부한다.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왕조를 무너뜨린 숭가 왕조에서는 브라만의 사회적 계급이 가장 높았고, 그들에게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숭가 왕조 사람들도 브라만 계급에 속했다. 『바가바드 기타』가 완성되었을 즈음 계급체계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엄격한 계급체계는 마누 법전의 집대성으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한 차례 외세의 침략이 인도 아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여파가 아직 남아 있던 250년경 입법자들이 카스트 제도를 고안해냈다. 카스트 제도에 따라 인도인은 네 계급으로 나뉘었다. 마누 법전은 여성의 지위도 격하시켰다. 최하위계급과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게 된 여성은 이후로 『리그 베다』의 암송마저 들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바르나의 초기 원칙은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사제인 브라만과 호전적인 크샤트리아, 노동자인 바이샤와 최하계급인 수드라에 관해 자세히 알려준다. 다음은 크리슈나에게는 무척 당연한 이야기였다.
브라만의 천성은 차분하며, 자제력이 있고 금욕적이고 순수하다. 또한 참을성이 강하고 강직하고 이론적이며, 실용적 지식을 갖추고 있고 종교적인 신념 또한 강하다. 한편 크샤트리아의 본성은 영웅적 행위나 장엄함과 관련이 있으며 강직하고 숙련되었을 뿐
아니라 더러 관대하며 충성심이 있다. 농사와 목축,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바이샤의 본래 모습이며, 수드라의 임무는 다른 계급을 모시는 것이다.
위의 네 가지 구분이 바로 카스트의 계급이다. 계급은 세습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의문을 품어서도 안 되고 이에 따르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각 계급에 속한 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히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한 아르주나의 의무는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혼의 불멸은 둘째치고라도 그에게 의무 지워진
살육은 죽음과 환생의 끝없는 고리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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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이슬라미카

 

 

 

 

 

서방세계에서 출간된 이슬람 정치 관련서적이 9・11테러 사태 이후 서점가를 강타했음에도 정치적 이슬람교에서 지하드운동이 차지하는 입지를 두고는 분석이 미흡하다. 단행본 중 상당수가 “거룩한 테러”는 옛말을 썼다. 혹자는 지하드운동의 기원을 부상한 오사마 빈라덴에게서 찾기도 한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지하드운동은 20세기의 정치적 이슬람교 사상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빈라덴보다는 수십 년이나 앞서 있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식 정치” 와는 별개의 것이다.
쿠틉이 “지하드를 영원한 이슬람의 세계 혁명” 으로 규정한 것은 그의 지성에는 못 미치는 알반나의 단순한 사상에서 한 발짝 진보한 것이다. 지하드운동의 포괄적인 목표는 이슬람세계로부터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정치질서로 알라 신의 통치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 같은 질서는 서방세계의 세속적 베스트팔렌 시스템을 이슬람교식으로 대체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목표는 지하드운동과 제도적 이슬람주의의 공통분모다.
지하드운동과 제도적 이슬람주의의 차이점은 지하드운동이 신개념 전쟁을 덧붙였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테러에 중점을 두었으나 지하드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은 간과한 마크 세이지먼34을 비롯하여 서방세계의 권위자들도 이 점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지하드운동을 순수 테러로 취급하는 것은 핵심을 벗어난 처사다. 문화적 및 종교적 토대는 글로벌 지하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를 정치적 이슬람교에 뿌리를 두게 하는 역할을
한다. 테러는 단지 팍스 이슬라미카pax Islamica(이슬람세계의 평화시대)의 비전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지하드 이후에 나타날 세계질서는 세속 국가들의 국제적 베스트팔렌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로써 이슬람교의 세계혁명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것이 바로 테러리즘의 이데올로기적 근간이다. 우리는 그들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이 부족하다. “학술” 간행물을 보면 근간을 분석한 결과를 공격하는가 하면 저자를 이슬람혐오증 환자로 몰아세우는 등, 우려할 점이 많다.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자들은 “역사의 귀환” 을 비롯하여, 과거의 영화를 되찾자는 주장으로 이슬람교의 향수36를 불러일으키고는 있으나, 그들의 테러리즘에는 진정성이 부족하다. 이는 꾸며낸 전통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의 비전은 엄밀히 현대적인 것으로, 신화적 과거가 아니라 탈양극체제postbipolar인 21세기에 내재되어 있다. 신성한 종교의 귀환과 세계정치에서 활약하는 비국가 주동세력의 부상 및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국적 조직의 출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귀환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고전 지하드가 이슬람교의 확장을 위해— 규정의 지배를 받던— 성전에서, 이슬람주의식 세계 혁명의 일환으로 개시된 규정이 없는 비정규전으로 변모한 것은 현대에 꾸며낸 발상이다. 이는 모두 정치적 이슬람교의 향수에 기원을 둔, 세계정치의 맥락에서 벌어졌으나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화된 종교가 국제정세의 주요 현안 중 하나가 된 경위를 이해하려면 기존의 지식을 버리고 참신한 추론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알라 신의 도리에서 지하드의 정당성을 인정한 정치적 종교는 테러가 아닌 세계의 질서를 둘러싼 문명의 분쟁을 역설한다. 쿠틉은 세계 혁명의 일환으로 지하드가 실현하는 이슬람식 평화로서, 세속주의 및 민주적 민족국가에 기반을 둔 칸트의 세계평화 개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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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윤리학

 

 

 

 

 

 

● 인간의 존엄성
우리는 때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자신을 대우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대우받은 방식을 놓고 속상해하기도 한다. 경찰이 우리를 둘러싸더니 짐승 다루듯 거리 한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 사이 시위대의 다른 사람들은 그 옆으로 지나갔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울타리 안으로 밀려들어 가는 가축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를 어린애 취급하듯 늘 감싸는 투로 말하면서 모든 걸 혼자서만 아는 체하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난 애가 아니거든. 그러니 그런 식으로 날 취급하지 마!
위의 사례는 짐승 같으면 둘러싼 뒤 강제로 몰아붙여도 되고 아이 같으면 그에게 무엇이 제일 좋은지를 남이 결정해줘도 된다는 말로 들린다.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짐승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므로 마땅히 그와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이 하려는 말은 이렇다. “이봐요, 난 어른이거든요. 날 그렇게 대하면 안 되죠.” 두 사람이 하는 말은 각각 조금 다른 것에 초점을 둔다. 첫 번째 사례, 경찰은 주인공에게 다른 데로 가라고 요구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단속할 거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몰아붙여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했을 뿐이다. 두 번째 사례, 주인공은 자신이 할 바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았다고 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례 모두 기본적으로 밑바닥에 동일한 문제가 깔려 있다. 더 솔직하고 열려 있는 그리고 정직한 말을 한마디만이라도 들었어야 마땅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리 설명을 들었더라면, 자신들이 할 바를 스스로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고, 한곳으로 모이라고 명령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남이 더 잘 아는 듯 결정해주는 것 따위를 그들은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받은 대우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암암리에 대비시킨다. 이상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사
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타인의 독립성을 인정한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 옳은 결정을 내릴 것으로 기대한다. 강제하거나 감독할 일이 없다. 두 사람의 주인공은 각각 자신을 대한 사람들이 인간관계의 이상에서 크게 벗어나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존재나 스스로 바른 행위를 할 줄 모르는 존재로 다뤘다고 불평한다. 그러므로 두 사례에 공통으로 나타난 문제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주인공 모두 “내가 온전한 성인이란 사실을 존중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온전한 성인이란 사실을 존중했다면, 주인공들을 짐승이나 어린아이처럼 취급할 여지가 전혀 없었을 것이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지닌 존재로 대우했을 것이다.
칸트 윤리학의 핵심에는 바로 이런 존중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저 유명한 정언명령(칸트가 도덕의 기본 원칙에 붙인 명칭) 가운데 한 정식에서, 칸트는 ‘인간을 단순한 도구로 대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목적으로만 대하라’고 주장한다. 타인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특별한 가치와 지위를 지녔고 이것은 존중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그의 특별한 존엄성이 깃들어 있다. 두 주인공은 자신이 마땅히 이런 대우를 받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칸트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만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존중할 의무를 진다는 데 동의한다. 그는인 격의 존중을 믿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존중’은 칭찬의 뜻으로 쓰인 존중이란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을 칭찬한다는 뜻에서 그를 존중한다면, 보통 그 사람이 이룩해 놓은 것의 우수함을 칭찬한다는 뜻이다. 어떤 여성이 훌륭한 작가, 운동선수, 군인, 요리사 또는 위대한 상상력이나 인간성을 발휘한다면, 사람들은 그 여성을 존중하거나 존경한다. 칭찬으로서의 존중이나 존경은 어떤 사람의 뛰어남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한 존중이나 존경은 비범한 업적에서 비롯한다. 칸트가 관심을 둔 존중은 이와는 다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간섭, 감독, 지도, 강제 같은 것을 받지 않고도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능력 혹은 자신의 결정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칭찬이란 뜻의 존중이나 존경은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고 얻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위계상으로 더 나은 자리에 있게 되지만, 칸트가 말하는 존중이나 존경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평등하게 적용된다. 기본적인 존엄은 그 바탕이 되는 자율의 능력을 잃지 않는 한 잃어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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