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윤리학

● 인간의 존엄성
우리는 때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자신을 대우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대우받은 방식을 놓고 속상해하기도 한다. 경찰이 우리를 둘러싸더니 짐승 다루듯 거리 한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 사이 시위대의 다른 사람들은 그 옆으로 지나갔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울타리 안으로 밀려들어 가는 가축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를 어린애 취급하듯 늘 감싸는 투로 말하면서 모든 걸 혼자서만 아는 체하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난 애가 아니거든. 그러니 그런 식으로 날 취급하지 마!
위의 사례는 짐승 같으면 둘러싼 뒤 강제로 몰아붙여도 되고 아이 같으면 그에게 무엇이 제일 좋은지를 남이 결정해줘도 된다는 말로 들린다.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짐승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므로 마땅히 그와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이 하려는 말은 이렇다. “이봐요, 난 어른이거든요. 날 그렇게 대하면 안 되죠.” 두 사람이 하는 말은 각각 조금 다른 것에 초점을 둔다. 첫 번째 사례, 경찰은 주인공에게 다른 데로 가라고 요구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단속할 거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몰아붙여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했을 뿐이다. 두 번째 사례, 주인공은 자신이 할 바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았다고 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례 모두 기본적으로 밑바닥에 동일한 문제가 깔려 있다. 더 솔직하고 열려 있는 그리고 정직한 말을 한마디만이라도 들었어야 마땅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리 설명을 들었더라면, 자신들이 할 바를 스스로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고, 한곳으로 모이라고 명령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남이 더 잘 아는 듯 결정해주는 것 따위를 그들은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받은 대우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암암리에 대비시킨다. 이상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사
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타인의 독립성을 인정한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 옳은 결정을 내릴 것으로 기대한다. 강제하거나 감독할 일이 없다. 두 사람의 주인공은 각각 자신을 대한 사람들이 인간관계의 이상에서 크게 벗어나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존재나 스스로 바른 행위를 할 줄 모르는 존재로 다뤘다고 불평한다. 그러므로 두 사례에 공통으로 나타난 문제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주인공 모두 “내가 온전한 성인이란 사실을 존중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온전한 성인이란 사실을 존중했다면, 주인공들을 짐승이나 어린아이처럼 취급할 여지가 전혀 없었을 것이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지닌 존재로 대우했을 것이다.
칸트 윤리학의 핵심에는 바로 이런 존중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저 유명한 정언명령(칸트가 도덕의 기본 원칙에 붙인 명칭) 가운데 한 정식에서, 칸트는 ‘인간을 단순한 도구로 대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목적으로만 대하라’고 주장한다. 타인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특별한 가치와 지위를 지녔고 이것은 존중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그의 특별한 존엄성이 깃들어 있다. 두 주인공은 자신이 마땅히 이런 대우를 받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칸트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만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존중할 의무를 진다는 데 동의한다. 그는인 격의 존중을 믿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존중’은 칭찬의 뜻으로 쓰인 존중이란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을 칭찬한다는 뜻에서 그를 존중한다면, 보통 그 사람이 이룩해 놓은 것의 우수함을 칭찬한다는 뜻이다. 어떤 여성이 훌륭한 작가, 운동선수, 군인, 요리사 또는 위대한 상상력이나 인간성을 발휘한다면, 사람들은 그 여성을 존중하거나 존경한다. 칭찬으로서의 존중이나 존경은 어떤 사람의 뛰어남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한 존중이나 존경은 비범한 업적에서 비롯한다. 칸트가 관심을 둔 존중은 이와는 다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간섭, 감독, 지도, 강제 같은 것을 받지 않고도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능력 혹은 자신의 결정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칭찬이란 뜻의 존중이나 존경은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고 얻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위계상으로 더 나은 자리에 있게 되지만, 칸트가 말하는 존중이나 존경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평등하게 적용된다. 기본적인 존엄은 그 바탕이 되는 자율의 능력을 잃지 않는 한 잃어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