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괘 중에서 열 번째가 입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소리素履 무구无咎

리도탄탄履道坦坦 유인幽人 정길貞吉

묘능시眇能視 파능리跛能履 리호미履虎尾 질인㗌人 무인武人 위우대군爲于大君

리호미履虎尾 색색愬愬 종길終吉

쾌리夬履

시리視履 고상考祥 기선其旋 원길元吉

 

첫 번째 효사爻辭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입니다. 리호미履虎尾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았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질인不咥人(깨물 질), 그 호랑이는 사람을 물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형하기 때문인데, 은 젊고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의 기운을 말합니다. 젊고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호랑이는 군주를 말합니다. 직언의 위험성을 먼저 말하고 있지만, 정의롭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직언은 위험하지 않다는 점과, 그런 직언에 벌하지 않는 군주의 자애를 한 구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효사爻辭소리素履 무구无咎입니다. 소리素履의 소는 순수하고 소박한 것, 깨끗하고 정직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심 없는 마음으로 하는 충정의 직언이 소리素履입니다. 이렇게 하면허물이 없습니다无咎.

 

세 번째 효사爻辭리도탄탄履道坦坦 유인幽人 정길貞吉입니다. 리도탄탄履道坦坦은 리도履道(신 리, 평편할 탄, 직언의 도)는 탄탄坦坦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 평편하고 너그럽고 편안하다는 말이므로 탄탄坦坦은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 부드러워서 누구나 좋아하는 포용력과 유연성, 지극히 편안한 것을 의미합니다. 직언의 도는 이처럼 중도, 포용력, 유연성, 편안하고 부드러움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유인幽人(그윽할 유)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는 사람, 즉 은둔자를 말합니다. 은둔자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심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의 직언이라야 끝까지 길합니다. 직언의 자격을 갖춘 사람과 직언의 방식을 설명한 구절입니다.

 

네 번째 효사爻辭묘능시眇能視 파능리跛能履 리호미履虎尾 질인㗌人 입니다. 애꾸눈(애꾸눈 묘)도 볼 수는 있고能視, 절름발이(절름발이 파)도 밟을 수 있지만能履, 이런 사람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호랑이 꼬리를 밟으면履虎尾, 호랑이가 그를 물어㗌人 흉합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 리도履道를 모르는 사람은 직언할 수 없습니다. 애꾸눈과 절름발이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볼 수 있고 직언할 수 있지만, 그 결과가 흉하므로 직언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무인武人 위우대군爲于大君입니다. 자기 수양이 부족한 까닭에 직언의 자격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애초에 직언을 해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있으니, 그가 바로 무인武人입니다. 무인은 사리를 판별하고 선악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리를 판별하고 선악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왕과 문신文臣이 할 일입니다. 무인에게 필요한 건 직언이 아니라 군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일 뿐입니다爲于大君.

 

다섯 번째 효사爻辭리호미履虎尾 색색愬愬 종길終吉입니다. 여기서는 직언의 실제적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직언이라는,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과도 같이 위험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호랑이 꼬리를 밟을 때에는履虎尾 경계하고 두려워해야愬愬(두려워할 색, 하소연할 소) 끝까지길합니다. 색색愬愬은 놀라 두려워하는 모양을 형용한 말로, 윗사람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조심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여섯 번째 효사爻辭쾌리夬履 입니다. 색색愬愬한 태도가 아닌, 오만불손한 직언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직언을 쾌리夬履라고 합니다. 쾌리는 통쾌한 직언이며, 통쾌한 직언이란 자신의 감정만 내세우고 상대를 무참하게 짓밟는 직언입니다. 그런 태도로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면 물려 죽을 것이 뻔합니다.주역은 그 끝이 위험하고도 위태롭다고 말합니다.

 

일곱 번째 효사爻辭시리視履 고상考祥 기선其旋 원길元吉입니다. 시리視履는 지나간 과거의 직언을 다시 잘 들여다본다는 뜻입니다. 고상考祥은 좋고 나쁨을 자세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기선其旋은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말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살핀다는 뜻입니다. 전체를 연결하여 해석하면 과거로 되돌아가서, 잘못된 것과 잘된 것을 상세히 반성하고 고찰한 후에 직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근원적으로길합니다.

 

주역은 윗사람의 잘못을 지적해 바로잡고자 하는 직언을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점을 치는 사람은 호랑이 꼬리가 항문을 감추고 있으므로 더러운 비리를 가리는 부분을 상징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렇지만 호랑이 꼬리는 용맹과 힘의 상징입니다. 잘못 밟으면 큰 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언할 때에는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는 강한 믿음과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당찬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직언이나 충언은 순수한 마음에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심이 없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진정한 군자인 것입니다. 직언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은 자만심을 갖고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 같은 직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언을 하는 사람은 조심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언하는 사람은 타인의 비리를 짚어내기 전에 자신의 과거를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과오를 먼저 바로잡은 뒤 직언해야 올바른 충언을 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詩說 냉귀지 - 개정판
최병현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냉귀지>가 비행접시처럼 새롭게 나타났다

 

 

 

 

[천지일보=송범석 기자]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한다면, 눈 내린 진흙밭에 기러기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한다면, 나는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죽으면 세상이 눈과 같이 녹아 우리의 발자국도 사라지는 것인가. (…) 다시 어둠속으로 들이민다는 것인가, 어떤 논리는 기차 바퀴의 연결대처럼 뒤로 갔다 앞으로 나아가고, 칙칙폭폭은 독후감이고, 막힌 콧구멍에 독감이든가 (…)” (p265)

이 알 듯 말 듯한 언어의 향연을 저자는 ‘냉귀지’로 명명한다. ‘냉귀지’는 한마디로 시설(詩設)이다. 시이자 소설이다. 이 새로운 장르는 시이면서 소설인데, 동시에 시도 아니면서 소설도 아니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서사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가 밝히는 이 시대에 ‘냉귀지’의 ‘미션 임파서블’은 나쁜 언어와 싸우는 것이다.

“혈기왕성할 때는 동생하고 싸우고 독재와 싸웠지만, 나이 들어서는 팔다리를 덜 혹사하면서 정명을 해치는 자들과 한판 엉켜 붙고자 하다. 마음을 흐리는 거품과 찌꺼기와 싸우고자 한다. 적당한 숫자의 구경꾼과 활로어만 있어 준다면, 못난 자신과 또 한판 신나게 붙어보고 싶다.”

1988년 제1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시야에서 유성처럼 사라졌던 <냉귀지>가 비행접시처럼 새롭게 나타났다. 판소리에서 노래와 이야기가 하나이듯이 <냉귀지> 또한 시와 소설이 한통속이다. 이는 판소리에서 이야기와 랩이 분리되지 않는 것과 같다. 스토리에만 치중하는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저자의 놀라운 언어의 변용에 낯설 수 있고, 감성적 표현에만 치중하는 독자라면 저자의 놀라운 은유의 역사 해석에서 길을 잃을 수가 있다.

저자는 ‘시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아니면 진화된 오늘날의 독자와 교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조미료로 맛을 낸 현 문학의 언어와 달리 하얀 종이 접시 위에 각종 야채와 고기와 양념 같은 말들을 가득 言져놓고 한바탕 비비고 부볐으니, 시설의 맛이 아직 생소한 독자는 입맛 대신 음식을 탓하겠지만, 소위 “뛰는 놈, 나는 놈, 그 위에 뭘 좀 아는 놈”은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갑자기 밥 먹다 말고 일어나 말 춤을 출 것이다. 그이것이 진정한 맛이요, 말이요, 이야기다. 이 맛 저 맛 중에 말맛이 최고이다.

최병현 지음 / 지와사랑 펴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4괘 중에서 아홉 번째가 소축小畜입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축小畜 형亨 밀운불우密雲不雨 자아서교自我西郊

복자도復自道 하기구何其咎 길吉

견복牽復 길吉

여탈복輿說輻 부처반목夫妻反目

유부有孚 혈거척출血去惕出 무구无咎

유부有孚 련여攣如 부이기린富以其隣

기우기처旣雨旣處 상덕尙德 재載 부婦 정貞 려厲 월기망月幾望 군자君子 정征 흉凶

 

첫 번째 효사爻辭는 소축小畜 형亨 밀운불우密雲不雨 자아서교自我西郊입니다. 소축小畜은 작은 것을 기른다는 말이니, 작은 성공이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축은 원형리정元亨利貞 네 시기 가운데 두 번째의 시기 형亨에 결정됩니다. 점을 치는 사람들은 형亨을 부부가 처음 연을 맺고 가정을 꾸리는 시기라고 해석합니다.『주역』은 소축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부부가 처음 연을 맺고 가정을 꾸리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밀운불우密雲不雨는 구름이 가득하더라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니, 소축이 곧 달성될 것처럼 쉬워 보이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을 자연에 비유한 것입니다.『주역』은 이를 자아서교自我西郊, 즉 서쪽 교외에 서서 기다리고만 있기 때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주역』은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소축이 달성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부부가 처음 연을 맺고 가정을 꾸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노력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효사爻辭는 복자도復自道 하기구何其咎 길吉입니다. 누구나 가정이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주역』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성공이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철저히 깨닫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자도復自道는 스스로自 가정의 소중함과 도道를 깨달아 가정으로 다시 돌아온다復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何其咎 하고『주역』이 묻고 있습니다. 허물이 없고 길吉하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효사爻辭는 견복牽復 길吉입니다. 견복牽復은 복자도復自道와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서牽,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아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돌아오는復 경우에 해당합니다. 스스로自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만은 못하더라도 이 역시 나쁠 것이 없습니다吉.

 

세 번째 효사爻辭는 여탈복輿說輻 부처반목夫妻反目입니다. 부부의 합심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경우夫妻反目를 두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의 한쪽 바퀴가 어긋난 경우輿說輻(수레 여, 벗을 탈, 바퀴살 복)에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부부는 두 바퀴에 해당합니다. 한쪽 바퀴가 어긋나면(說=脫) 가정이란 수레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습니다. 부부 사이의 합심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네 번째 효사爻辭는 유부有孚 혈거척출血去惕出 무구无咎입니다. 부부는 재앙血을 물리치고去 두려움惕(두려워할 척)을 몰아낼出 수 있으며, 그래야 허물이 없습니다无咎. 혈거血去의 혈血은 핏빛 재앙, 즉 불의의 사고나 전쟁 등을 말하고, 척출惕出의 척惕은 공포와 두려움을 말합니다. 부부 사이의 합심이 재앙을 물리치고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효사爻辭는 유부有孚 련여攣如 부이기린富以其隣입니다. 신뢰는 부부 사이에서의 덕목만은 아닙니다. 친지나 친구 그리고 이웃에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뢰는 필수입니다. 그들과 결속攣如(걸릴 련)하기 위해서도 신뢰가 필수有孚란 의미로 유부有孚 련여攣如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신뢰로 결속된 이웃其隣(이웃 린)이라면 부富를 함께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야 소축小畜, 즉 부부가 처음 연을 맺고 가정을 꾸리는 시기에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이기린富以其隣은 생산에 있어서의 분업이나 기술의 공유를 뜻합니다.

 

여섯 번째 효사爻辭는 기우기처旣雨旣處 상덕尙德 재載 부婦 정貞 려厲 월기망月幾望 군자君子 정征 흉凶입니다. 한때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 밀운불우密雲不雨의 시기도 있을 수 있지만, 때가 되면 마침내 비가 쏟아졌다가旣雨(이미 기) 그치는旣處(살 처) 호시절이 옵니다. 고대하던 비가 내리고 다시 그치는 시절, 이것이 기우기처旣雨旣處의 시절이요, 또한 소축, 즉 부부가 처음 연을 맺고 가정을 실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비는 소축의 성공과 행복을 상징합니다. 이런 성공을 다른 말로 상덕尙德이라 합니다. 상덕은 큰 은혜를 의미하기도 하므로 그렇게 거둔 성공을 이웃과 나눠 칭송을 얻게 된다는 의미까지 포괄하는 뜻입니다. 재載(실을 재)는 힘에 벅찬 짐을 떠맡은 상황을 말합니다. 자기 일이 아닌 일, 자기 분수를 넘어선 일을 맡은 경우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엉뚱한 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주역』은 부인婦이 그 끝貞을 염려하고 걱정한다厲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인은 아내를 의미하지만, 일을 함께 도모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말로 해석해도 됩니다. 부인이 이처럼 걱정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간다면征 월기망月幾望으로 달이 보름에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때가 이르렀다는 의미이지만, 군자君子는 무리한 일을 벌여 부인을 걱정시키는 사람이 아니므로 설령 때가 이르렀더라도 결과는 흉합니다凶.

소축小畜은 작은 것을 기른다는 말이므로 가정을 원만하게 이끌고 이를 기반으로 작은 성공을 거두는 걸 의미합니다. 큰 성공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대축大畜의 교훈이 나중에 나올 터인데, 두 괘를 비교하면 내가 소축을 추구해야 할 사람인지, 대축을 추구해야 할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주역』은 대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정은 일종의 기피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주역』에 따르면 소축조차 이뤄지지 않는 건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방관하기 때문입니다. 한쪽 바퀴가 빠져버린 수레, 즉 부부가 합심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진보할 수 없으므로 부부 가운데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소축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부부의 합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입니다. 신뢰가 있어야 어려움을 이겨내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원만한 화합이 이뤄졌다면, 그 다음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신뢰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가운데 생깁니다. 이해는 영어로 understanding인데, 상대방의 아래서 선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다면 이해하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詩說 냉귀지 - 개정판
최병현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설은 시·소설의 원조 … 낯선 장르 아니다”
『냉귀지』 개정판 낸 최병현 교수
출판사 이해 부족해 고친 부분
원래 의도대로 바로잡아 출간
[중앙일보]2012.11.06 00:12 입력 / 2012.11.06 00:12 

 

 

최병현 교수가 호남대 연구실에서 시설(詩說) 『냉귀지』 개정판을 보여 주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최병현(64) 호남대 영어영문과 교수는 『징비록』『목민심서』 같은 고전을 영역해 유명하지만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젊은 시절 발표했던 『냉귀지』를 다시 손봐 개정판(408쪽)을 냈다. 그는 “30여 년 전, 세월에 강도를 당하고 길가에 쓰러져 절판된 책을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출판사(知와 사랑)가 보고 딱했던지 일으켜 세워 살려 놓았다”고 개정판 서문에 적었다.

 제목으로 冷鬼志·LANGUAGE를 함께 쓴『냉귀지』는 최 교수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1980년 대 초 썼다. 하지만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래 엄두를 못 내다 1988년에야 발표, 그해 제1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책을 찍은 회사가 곧 문을 닫는 바람에 그간 제 빛을 보지 못했다.

 최 교수는 “당시 일부러 틀리게 말을 만들고 시처럼 끊어 쓴 것을 이해가 부족한 출판사가 평범하게 고쳐버리고 일반 소설처럼 늘여서 편집했었는데, 원래의 내 의도대로 바로잡아 책을 다시 냈다”고 말했다.

 『냉귀지』는 형식이 독특하다.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시설(詩說)이다. 최 교수는 “조미료로 맛을 낸 일반 문학의 언어와 달리 하얀 종이 접시 위에 각종 야채·고기·양념 같은 말들을 가득 얹어 놓고 한바탕 비볐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적인 소설, 소설적인 시로 시와 소설의 원조”라며 “판소리나 서사시를 생각하면 전혀 낯선 장르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내용도 특이하다. 언어(Language·랭귀지)가 주인공이다. 스토리보다는 언어 중심적이다. 이 때문에 해체주의 문학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학 국문학과에서 기호학 쪽 교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냉귀지는 소설 속 일구의 별명이기도 하다. 일구의 아버지는 삼일이고, 일구의 잘나가는 이복동생 이름은 일육. 작품은 일구가 생일을 맞아 하루 동안 기억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로 이뤄졌다. 생일임에도 누구 하나 축하 노래를 불러주지 않자 직접 축가를 지어 부르며 잠자리에 드는 걸로 이야기는 끝난다. 삼일은 1960년 3·15 부정선거, 일구는 60년 4·19 학생혁명과 민주세력, 일육은 61년 5·16 쿠데타와 군사독재세력을 상징하고 있다. 삼일(3+1)은 4(死)이고, 일구(1+9)는 (화투에서 열을 짓고) 0이 돼버린다. 반면 일육(1+6)은 억세게 운이 좋은 7이다.

 최 교수는 소설『헤라클레스의 강물』(양지), 『대한민국 하여가』(知와 사랑) 등도 썼다. 『징비록』『목민심서』에 이어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을 영역하고 있다. 주석을 다는 마지막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영역본 분량이 약 1200쪽, 약 40만 개 단어에 이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 사랑과 무아

 

 

흔히 상대적인 차원에서 ‘나’와 ‘타인’이란 단어를 편리한 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며 더욱 심오한 진리가 있으리라는 믿음 하에 우리의 심리적, 정서적 문제를 간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렵고 죄책감에 시달리더라도 우리는 자신을 옹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타인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우리보다 덜 중요하다고 여겨 자신만을 돌보아서도 안 된다. 우리가 타인을 돌보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손해만 보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사랑함은 물론 타인도 깊이 사랑해야 한다. 나와 타인 사이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다 하더라도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궁극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보면 나와 타인 사이에 구별이란 없다. 주체와 객체가 하나이고, 위와 아래는 동일한 차원에서 존재하며, 삶과 죽음이 동일한 과정의 일부이므로 나와 타인이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나에 대한 적절한 관계와 타인에 대한 적절한 관계는 자애와 자비라는 동일한 본질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들이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을 도울 때, 우리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이타주의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통합을 목격한다. 한 경찰관이 자신의 위험이나 가족에게 찾아올 불행은 생각지도 않고 벼랑에서 막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구한다. 한 군인이 쓰러진 전우를 구하려고 망설임 없이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돌진한다. 이때 그 사람은 이런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고 유일한 선택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행동은 무아와 분리가 없는 실재를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의식적인 행동으로 옮길 때만 가능하다.
사소한 일이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서로 돕는다. 본 적도 없
고 다시 볼 일도 없는 사람이 지나가도록 문을 붙잡아주고,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고, 은행원에게 미소를 보내거나 다른 운전자에게 길을 양보한다. 그리 극적이지는 않은 이런 행동도 삶의 근본적인 상호 연관성을 증명한다. 무아의 통찰은 의식 속에 강제로 주입해야 하는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이미 있어서 그냥 발견하고 키우기만 하면 되는 요소다.
무아에 비추어보면 이타적 행동은 단순히 현명한 행동일 뿐이다. 분리라
는 망상에서 벗어난 깨우친 의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떤 행동에 용감
하다거나 영웅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상장이나 훈장을 수여하는 일은 요점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우리의 영웅이 자신의 행동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며, 그 순간에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면 그건 거짓 겸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행을 베풀었다고 우쭐해하거나, 자애로운 행동을 하면서 도움을 받는 이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도 올바르지 못하다.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하는 자애로운 행동과 말은 분리와 자아라는 개념에 그 뿌리가 있으며, 도덕적 측면에서 나쁜 일은 아니지만 망상에 근거한 잘못된 생각이다. 자애로운 언행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다.
자연스럽게 화합을 인식하지 않더라도 자애와 자비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도움이 된다. 새로운 통찰을 얻으려면 행동을 먼저 바꾸어야만 할 때가 있다. 자애와 자비의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뜻밖에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을 받기도 한다.
자애로운 행동은 우리를 실재로 안내한다. 우리 문화에서 사람들은 냉철한 금융업자나 자본가가 매우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이 현실이
아닌 분리와 영원이라는 망상을 바탕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우습다. 붓다는 진정한 현실주의자다. 자애로움은 곧 깨닫는 마음이다. 자애롭게 행동할 때마다 우리는 의식을 열고 좀 더 현실적으로 무아와 상호 연관된 존재, 즉 분리되지 않은 실재의 본질을 본다.
사랑이 유익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테레사 수녀가 캘커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을 보며 우울해지고 테레사 수녀의 엄격한 신앙심에 반감을 느끼는 학생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학생들에게도 침에서 면역을 강화하는 호르몬인 s-IgA가 증가했다(McClelland 1986). 또 다른 실험을 살펴보자. 한 티베트 승려가 실시간으로 뇌의 작용을 보여주는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에 누워 자애 명상을 했는데, 뇌에서 기쁨과 열정을 담당하는 중전두회中前頭回 왼쪽의 활동이 극적으로 증가했다(Barasch 2005). 이처럼 사랑을 수행하면 우리가 행복해진다.
반대로 화와 같은 감정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화가 나면 우리 몸은 코티솔(부신 피질에서 생기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일종), 에피네프린(부신副腎 호르몬), 노르에피네프린(부신수질副腎髓質 호르몬)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혈관에 내보낸다. 이 호르몬이 혈관 내에 플라크를 형성하고 심장마비나 뇌졸중 같은 건강 문제를 초래한다(McKay, Rogers, and Mckay 1989). 우리는 때때로 화를 내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나쁜 행동을 했다고 인정하는 것 같아 화 참기를 꺼리지만, 화내서 당장 고통받는 사람은 바로 우리다. 누군가에게 화를 냄은 스스로 독을 마시고, 그 사람이 고통받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앞서 소개한 마시는 분리된 영역에서 살았다. 그녀 자신을 위해 한 모든 일이 타인에게 반하며 타인을 위해 한 모든 일은 그녀 자신에게 반했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타인도 사랑할 수 없었다. 자신을 자애롭게 대하려고 하면 죄책감에 빠지고 타인을 돌보려고 하면 화가 났다. 상호 연관된 존재에 비추어보면 이런 공멸의 상황이 착각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마시가 그녀 자신을 위해 한 모든 일이 타인을 위한 일이기도 했고 그녀가 타인을 위해 한 모든 일 역시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웰빙과 행복을 돌볼 때 그녀는 그녀를 필요로 한 사람들에게 충실할 수 있다. 자신의 행복을 보살피지 못한다면 마시의 분노는 그녀를 필요로 한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게 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행동함과 동시에 그녀는 비분리라는 궁극적인 실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실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커다란 행복의 원천이다. 그녀는 우주의 소중한 발현으로서 그녀 자신을 타인과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돌보아야 했다. 나와 타인 모두 소중한 발현인 까닭이다.
전 우주가 하나가 되어 나로 발현되었다. 전 우주가 하나가 되어 타인으로
발현되었다. 이것들은 분리할 수 없는 실재들이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자애
로운 행동은 전 우주에 영향을 끼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