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은 편지에 적었다

 

 

 

 

 

 

 

카를 융은 편지에 적었다.

 

 

친구에게,
리비도에 대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보기로 하세. 나는 자네의 변화가 어떤 속성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고 그 동기 역시 전혀 알 수가 없네. 나에게 편견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사정을 더 자세히 듣고 나면 자네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우리가 서로의 의견에 즉각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학문적인 차이가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네. 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근본적인 의견 차가 있었다는 점이 떠오르는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저의 변화는 변덕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문제입니다. 교수님을 존경하는 저의 마음도 저를 말릴 수는 없습니다 … 물론 저는 은인이신 교수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주시고 노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는 제대로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신분석학 운동을 위해 랑크Rank, 슈테켈Stekel, 아들러Adler 등이 한 일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저는 콤플렉스로 가득 찬 바보 취급 당하는 걸 거부하는 것 외에는 저항할 길이 없음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나는 이 (리비도) 논문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네 … 지금 나는 자네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이네.
자네와 부인에게 안부를 전하며,
여전히 변치 않은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무례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교수님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인다”라고 쓰신 글은 저의 글을 크게 과소평가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친애하는 교수님,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지만 그 문장은 교수님이 저를 폄하함으로써 저의 연구를 이해하려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수님은 저의 시각을 일종의 정점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 이것은 산의 가장 아래 지점일 뿐입니다. 그러한 시각은 수년간 우리에게 자명하게 보였던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솔직한 저의 표현에 사과드립니다. 저는 때때로 신경증의 잣대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받고 싶은 순수한 인간적 욕망 때문에 괴롭습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객관적인 발언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버릇은 (퇴행적인) 인간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빈 사람 특유의 단점이라네. 그런 주장은 자네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네. 하지만 화를 내지 않고도 (자네가) 다음과 같은 실언을 고려할 만큼“ 객관적”인가? “심지어 아들러의 무리도 저를 당신과 한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제가 진심으로 몇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교수님이 환자를 다루는 기법을 제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 교수님은 도처를 다니시면서 주변의 모든 증후성 행동의 냄새를 맡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하며 이를 인정하는 아들과 딸들로 만들어버리시지요. 그사이 교수님은 아버지로서 최고의 자리에 멋지게 남게 되고요 … 친애하는 교수님, 저에게 증후성 행동이 있다는 교수님의 지속적인 주장을 저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행동은 교수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시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여나 부정을 탈까 하여 언급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절대로 신경증을 앓고 있지 않습니다! 제 행동을 스스로 분석한 결과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입니다. 환자가 자기분석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잘 아실 겁니다. 교수님이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추종자들의 아버지 역할을 멈춘 후 추종자들의 약점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대신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신다면, 저도 제 태도를 고치고 교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저의 죄를 단번에 뿌리 뽑겠습니다. 이 같은 기이한 우정의 징표에 분명히 노하시겠지만 이 방법이 교수님에게 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융 드림
1913년 3월 1일

 

회장 겸 박사님에게,
내가 추종자들을 환자처럼 대한다는 주장은 확실히 터무니없네. 나는 빈에서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로 비난받고 있으니 말이지 … 그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면 이 편지에 답장할 필요도 없네.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려워질 것이고 더욱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지. 자신이 신경증을 앓고 있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 정신분석학자들의 관례이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정상이라고 계속 외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병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할 근거가 되지. 그래서 나는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제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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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왕조의 왕들은 매우 다양한 종교적 기호를 보였다

 

 

 

 

 

 

마우리아 왕조의 왕들은 매우 다양한 종교적 기호를 보였다.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에 심취했지만 아들 빈두사라는 사명외도교의 결정론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명외도교는 자이나교의 이단적인 한 분파로, 인간은 84,000번의 윤회를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는 세계 최초의 불교도 군주였다. 기원전 270년 빈두사라 왕의 사후에 왕위계승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을 제치고 아소카가 왕위를 거머쥐었다. 그는 기원전 261년경 인도 동부 오리사Orissa 지역에서 카링가 왕국을 정복했다.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자신의 정복욕 때문에 일어난 전례 없는 유혈사태로 인한 참상에 심적 충격을 받은 아소카는 마우리아 왕조의 이름을 떨치기 위한 전쟁에 회의를 느꼈다. 번민 끝에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는 집권 내내 내면의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를 열성적으로 지지했으며, 그 후로는 전쟁이 아닌 ‘법을 통한 정복’을 지향했다. 아소카의 전격적인 포교활동 덕에 불교는 붓다가 세상을 떠난 지 250년 만에 범아시아적인 종교의 위상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불교에서 전파하는 붓다의 가르침에 우호적 태도를 보인 왕들이 몇몇 존재했다. 하지만 붓다가 설파한 삶의 원리를 조직적인 방식으로 전파하려 한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붓다는 이에 대해 염려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불교적인 세계질서를 확립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왕위에 오른 이들은 아소카 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붓다의 예언을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소카는 자신의 영토 도처에 불법을 설파하는 칙령을 새긴 암석 또는 석주를 세우게 했다. 그 칙령에는 다음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나의 지배를 받는 왕국의 영토가 아직 넓지 않아 불법이 세계 곳곳에 전파되지 못했도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

 

 


거대한 돌기둥 표면에 새겨져 있는 이 칙령은 아람어로부터 그리스어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언어들로 적혀 있다. 특히 이 두 언어로 적힌 비문은 1958년 아프가니스탄 동남부 칸다하르Kandahar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의 손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아대륙에 정착시킨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고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데칸 고원 북쪽의 고대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언어는 프라크리트Prakrit어였다. 마하비라와 붓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아리아인의 언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했던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는 브라만 계급의 전용언어였다. 브라만이 남긴 종교적인 문헌들이 산스크리트어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독교 시대가 열리기 직전의 시기에 인도 아대륙 북부의 불교도들에 의해 산스크리트어가 재조명되었다. 이들은 프라크리트어로 기록된 문헌들을 찾아내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를 이용한 새로운 기록들을 남겼다. 이는 브라만교가 불교와 융합된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굽타 왕조 시절에 브라만교와 불교를 융합한 힌두교가 왕가와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굽타 왕조에서 인도 고유의 불교형태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종교 융합이라는 사실에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브라만은 붓다의 가르침을 원형 그대로 전하는 사명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 같다. 이 시기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붓다의 온전한 가르침은 이후 원시불교의 내용을 복원한 대승불교에 의해서 다시 부흥된다. 사무드라굽타가 재위했던 4세기까지의 기간에 힌두교가 불교를 대체하는 과정을 지켜본 중국인 순례자 법현法顯이 남긴 글에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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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드운동의 폭력은 테러행위이다

 

 

 

 

 

 

폭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는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의 기본 특성이긴 하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목표는 단연 이슬람교의 질서가 될 것이다. 지하드운동은 진정한 지하드로 규정된 비정규전이 종교적으로 정당하다는 점에 근거하여 활동한다. 사실, 지하드운동의 폭력은 테러행위이므로 고전 지하드의 윤리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성 이슬람교의 종교기관은 지하디스트 원리주의자들을 대놓고 규탄하지 못한다. 평화적인 무슬림과 그들을 구별할 수 있을 텐데 선뜻 그러지 못하는 까닭은 기회주의와 두려움 때문이다. 지하드운동과 테러리스트가 이슬람교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한데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는 소수 이슬람 집단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젊은 무슬림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들이 신병 모집에 몰리는 까닭은 지하드운동이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는 암울한 현실에서 위안과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럽에서의 대안은 이슬람교를 유럽식으로 바꾸든지, 유럽을 이슬람교의 대륙으로 만들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대안을 유럽인이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방관과 무관심 속에서 신앙의 자유와 지하디스트들의 전쟁을 혼동하면 은연중에라도 지하드운동의 국제주의를 지지하겠지만 말이다. 이슬람세계와 서방세계 및 유럽의 소수 무슬림 집단 문화로 조성된 삼각구도에서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를 가르는 경계선은 결국 흐릿해질 가능성이 크다.
일부 유럽 국가(이를테면 독일)는 시민권 문화를 제한하여,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여권은 발행하나 공동체의 일원으로는 수용하지 않는다. 중산층에 합류할 수 있는 특권층도 평등한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방문 근로자”로 취급할 뿐이다. 나 역시 학계의 차별로 독일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 현지의 보편적인 사정이 그렇다. 유럽에서 합법적으로 독일 여권을 소지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시민은 아니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50여 년을 살고 본토어로 28권의 책을 썼지만 달라진 것이라고는 없었다. 이슬람교를 꾸준히 배우고 지식을 습득한 덕에 서양을 배격하는 지하드운동 이데올로기에는 빠져들지 않았으나, 고등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무슬림 이민자의 입장을 감안해볼 때, 디아스포라diaspora에서 벌이는 이슬람주의 운동과 유럽의 인종차별주의는 알카에다 전사가 되라는 구호에 매력을 더할 것이다. 『뉴욕 타임스』지에 따르면, 그 결과로 독일에서 태어난 젊은 무
슬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지하디스트 단체들에 합류했다고 한다. 유럽 사회에서 무슬림을 남남인 양 “배척한다면”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자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슬람세계에서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하드운동의 유혹에 대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사원에서 실시하는 교육은 국가가 통제하지 않는 데다 지하디스트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장려하고 기존의 치안활동도 이를 진압할 수가 없다. 무슬림 젊은이들의 삶은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현상유지만으로는 자유와 민주정치를 수호하기가 어렵다. 이슬람세계의 민주화와 효과적인 개발정책, 그리고 독재국가와 대립되는 시민 사회 원칙을 이룩할 제도가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에 대처하는 수단이 되나, 이슬람과 서방세계의 문화가 달라져야 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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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윤리학은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버려둘까

 

 

 

 

 

 

 

 

칸트의 윤리학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그림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독립적인 행위자로 대우받아야 하고 그가 지닌 의무와 독자성의 영역은 존중되어야 하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상호신뢰의 이상형이다. 이런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가능한 건 인간이 이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은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다고 신뢰받고 있기에, 강압적인 침해를 받지 않는 가운데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칸트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견해는 한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칸트의 견해에서 볼 때, 위에서 설명한 인간관계의 이상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칸트의 견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자율적 행위자로 존중할 것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성적 행위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칸트의 윤리학에서 기본 신념의 하나다. 그런데 이성적 행위자가 나쁜 일을 하기로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을 잃고 미친 짓을 한다면 더는 그를 존중할 의무가 없어진다. 그 행위자는 여전히 이성적으로 행위할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자율적 존재지만, 나쁜 행위를 하고 타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문제다. 그 사람이 타율에 따라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다고 가정해보자. 참견해서 말려야 할까? 칸트의 윤리학에 비추어볼 때 간섭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는 행위라면, 우리는 그 사람의 위협 앞에 무방비 상태로 마냥 팔짱을 끼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의 원칙은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칸트는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 벌주는 것을 허용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벌 받을 짓을 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건 정당하고 그것은 그 사람을 여전히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기 때문이다. 벌은 책임 있는 행위자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자율적 행위자가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에게 벌을 줄 수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잘못에 합당한 벌은 그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을 신뢰하고, 그들이 하려는 행위를 하게 두라고 가르친다. 일이 벌어진 다음이라야 벌주려고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칸트마저 당황해 마지않던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문 앞에 살인자가 와 있는 사례로, 이를 현대의 조건에 맞추어 수정한 것이다. 어떤 사내가 문 앞에 와서 나의 친구를 찾는다. 그는 비밀경찰일지 모르는데 친구를 죽일 참이다. 친구는 유대인으로 나의 집에 숨어 있다. 나는 친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친구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칸트는 나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할 것이다. 칸트가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존중하는 것이 나의 기본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 앞의 사내까지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그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 사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신뢰해야 하며, 그 사내를 위해 내가 결정을 내려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내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내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요, 사내가 타당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하는 것을 방해하는 셈이다. 보아하니 그 사내는 사람을 죽일 참이기에 사내가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런데도 칸트는 살인자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정할 수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사내가 마음을 바꾸도록 그와 논의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공리주의자들과는 달리, 칸트는 단순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타인의 자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칸트의 견해는 반직관적일 뿐 아니라 자기 모순으로 비치기도 한다. 칸트의 견해는 이성적 행위자를 중심에 놓고 있다. 칸트는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해서 인간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살인자의 자율을 존중하면, 똑같이 이성적 행위능력을 지닌 친구의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정말로 이성적 행위능력의 가치를 존중한다면 그것을 다만 존중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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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서방세계에 맞선 이슬람주의 반란” 을 주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테러와의 전쟁” 을 위협하는 지하디스트 조직체는 모두 비국가 주동세력인데, 안타깝게도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자 지하드운동의 세력과 무슬림의 지원이 강화되어 이란에도 이슬람주의 집단의 지원처가 세워졌다. 전쟁으로 추악한 독재정권은 몰락했으나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사담 후세인의 축출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는 지역 열강으로 부상한 이란이 채웠다. 이란은 “서방세계에 맞선 이슬람주의 반란” 을 주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문명의 갈등을 국제적 갈등52으로 비화시키고 세계정치에서 문명적 세계관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국제관계 및 정치학에서 이 같은 쟁점은 2002년 대니얼 필포트가 국제관계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은 『월드 폴리틱스World Politics』지에 기고한 논문을 제외하면 아직 연구 대상에는 들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을 군사점령이라고 비난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부 미국 학자들처럼 “십자군” 을 거론하는 건 프로파간다 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겠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는 대립하고 있는 세계관이 수반된다. 세계관과 개념 및 가치관의 대립은 안보 분석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질서의 개념은 항상 문명의 가치관에 기초하고, 문명 간의 갈등은 국가와 법률, 종교, 전쟁과 평화 및 지식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1995년에 출간된 『문명 전쟁』에서 군사문제는 제외하고 세계질서의 대립된 사상에 중점을 두었다. 문명에는 군대가 없으니, 가치관에 관련된 갈등이 군사력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 “문명 전쟁” 에서 실제적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가치관이니 말이다. 군사력이 제도로 규정되지 않은 이슬람주의자들은 글로벌 지하드를 사상과 세계관의 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념의 전쟁은 2006년 7~8월과 2008~09년에 각각 헤즈볼라와 하마스가 벌인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둘 중 어느 경우도 비정규전에서만 싸우는 조직체에 국한되진 않았으며 최전선은 문명에 걸맞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시아파 이란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해준 덕분에— 지역의 열강으로 부상하여 군사적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일으켰다. 막강한 미군과 이스라엘 방위군도 재래식 수단으로는 이슬람주의자들의 비정규 전력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들은 “알라 신의 마음”— 즉 이슬람주의 조직체들이 누리고 있는 범세계적 지원에서 비롯된 신념— 으로 세계 전쟁에 참여했다고 믿는다. 현장의 실상도 그렇지만, 문명의 의식도 중요하다. 세계정치에서는 의식이 곧 현실이기 때문이다.
9・11테러 공격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지하디스트들의 게릴라전은 가치관과 세계관이 물리적 폭력과 관계가 깊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이처럼 공격에 혈안이 된 이슬람주의자들은 “발광하는 폭력배” 로서가 아니라 지하드운동의 비정규전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자행하는 테러리즘은 문명적 세계관의 갈등을 구현한 것— “세계의 질서” 를 둘러싼 군사적 투쟁을 가리킨다— 이다. 폭력배는 그런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소득을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할지언정 가치관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기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범죄자는 없으므로 탈레반을 비롯한 지하디스트들을 “극단적 범죄자들” 로 몰아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양상이 달라진 전쟁에 합류한 비정규병일 뿐이다. 이 전쟁에서 지하디스트들은 대인살상을 비롯하여, 인프라와 “범세계적인 적” 을 공격하기 위해 제 몸뚱이를 폭탄으로 쓰고 있다. 직접행동단action directe(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조르주 소렐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테러조직을 일컫는다)은 세속 민족국가의 질서를 주요 목표로 삼는다. 이념의 전쟁과 지하드운동의 결합은 적의 사기를 꺾고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같은 전시상황에서는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다. 테러의 목표는 이슬람주의자가 일컫는 “유대인과 십자군,” 그리고 알제리와 2003년 이후 이라크에서 본 바와 같이 협조에 불응한 일반 무슬림이다.
존 켈세이는 “서방세계와 이슬람교가 만나면 누가 먼저 세계의 질서를 정의할지를 두고 투쟁한다” 면서 “승자는 영토와 시장경제, 종교의 자유 및 인권 우선을 내세운 서방세계가 될까? 아니면 순수한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 사회의 질서를 이룩하기 위해 종족 간 공동체의 보편적 사명을 강조하는 이슬람교가 될까?” 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이슬람교만이 세계의 질서 안에서 온 인류를 인도할 수 있다고 밝힌 사이드 쿠틉의 『진리를 향한 이정표』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신냉전의 분위기는 세속주의와 종교적 세계관의 대결구도로 귀결된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서양의 이슬람주의 변론자가 주장한 바와는 달리, 단순한 정신상태나 차이를 둘러싼 논박이나 “신앙의 자유” 가 아니다. 행여 그렇다면 관용으로 해결하면 될지도 모르지만, 핵심은 테러를 자행하는 데 따르는 생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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