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은 “서방세계에 맞선 이슬람주의 반란” 을 주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테러와의 전쟁” 을 위협하는 지하디스트 조직체는 모두 비국가 주동세력인데, 안타깝게도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자 지하드운동의 세력과 무슬림의 지원이 강화되어 이란에도 이슬람주의 집단의 지원처가 세워졌다. 전쟁으로 추악한 독재정권은 몰락했으나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사담 후세인의 축출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는 지역 열강으로 부상한 이란이 채웠다. 이란은 “서방세계에 맞선 이슬람주의 반란” 을 주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문명의 갈등을 국제적 갈등52으로 비화시키고 세계정치에서 문명적 세계관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국제관계 및 정치학에서 이 같은 쟁점은 2002년 대니얼 필포트가 국제관계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은 『월드 폴리틱스World Politics』지에 기고한 논문을 제외하면 아직 연구 대상에는 들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을 군사점령이라고 비난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부 미국 학자들처럼 “십자군” 을 거론하는 건 프로파간다 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겠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는 대립하고 있는 세계관이 수반된다. 세계관과 개념 및 가치관의 대립은 안보 분석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질서의 개념은 항상 문명의 가치관에 기초하고, 문명 간의 갈등은 국가와 법률, 종교, 전쟁과 평화 및 지식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1995년에 출간된 『문명 전쟁』에서 군사문제는 제외하고 세계질서의 대립된 사상에 중점을 두었다. 문명에는 군대가 없으니, 가치관에 관련된 갈등이 군사력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 “문명 전쟁” 에서 실제적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가치관이니 말이다. 군사력이 제도로 규정되지 않은 이슬람주의자들은 글로벌 지하드를 사상과 세계관의 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념의 전쟁은 2006년 7~8월과 2008~09년에 각각 헤즈볼라와 하마스가 벌인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둘 중 어느 경우도 비정규전에서만 싸우는 조직체에 국한되진 않았으며 최전선은 문명에 걸맞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시아파 이란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해준 덕분에— 지역의 열강으로 부상하여 군사적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일으켰다. 막강한 미군과 이스라엘 방위군도 재래식 수단으로는 이슬람주의자들의 비정규 전력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들은 “알라 신의 마음”— 즉 이슬람주의 조직체들이 누리고 있는 범세계적 지원에서 비롯된 신념— 으로 세계 전쟁에 참여했다고 믿는다. 현장의 실상도 그렇지만, 문명의 의식도 중요하다. 세계정치에서는 의식이 곧 현실이기 때문이다.
9・11테러 공격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지하디스트들의 게릴라전은 가치관과 세계관이 물리적 폭력과 관계가 깊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이처럼 공격에 혈안이 된 이슬람주의자들은 “발광하는 폭력배” 로서가 아니라 지하드운동의 비정규전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자행하는 테러리즘은 문명적 세계관의 갈등을 구현한 것— “세계의 질서” 를 둘러싼 군사적 투쟁을 가리킨다— 이다. 폭력배는 그런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소득을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할지언정 가치관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기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범죄자는 없으므로 탈레반을 비롯한 지하디스트들을 “극단적 범죄자들” 로 몰아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양상이 달라진 전쟁에 합류한 비정규병일 뿐이다. 이 전쟁에서 지하디스트들은 대인살상을 비롯하여, 인프라와 “범세계적인 적” 을 공격하기 위해 제 몸뚱이를 폭탄으로 쓰고 있다. 직접행동단action directe(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조르주 소렐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테러조직을 일컫는다)은 세속 민족국가의 질서를 주요 목표로 삼는다. 이념의 전쟁과 지하드운동의 결합은 적의 사기를 꺾고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같은 전시상황에서는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다. 테러의 목표는 이슬람주의자가 일컫는 “유대인과 십자군,” 그리고 알제리와 2003년 이후 이라크에서 본 바와 같이 협조에 불응한 일반 무슬림이다.
존 켈세이는 “서방세계와 이슬람교가 만나면 누가 먼저 세계의 질서를 정의할지를 두고 투쟁한다” 면서 “승자는 영토와 시장경제, 종교의 자유 및 인권 우선을 내세운 서방세계가 될까? 아니면 순수한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 사회의 질서를 이룩하기 위해 종족 간 공동체의 보편적 사명을 강조하는 이슬람교가 될까?” 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이슬람교만이 세계의 질서 안에서 온 인류를 인도할 수 있다고 밝힌 사이드 쿠틉의 『진리를 향한 이정표』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신냉전의 분위기는 세속주의와 종교적 세계관의 대결구도로 귀결된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서양의 이슬람주의 변론자가 주장한 바와는 달리, 단순한 정신상태나 차이를 둘러싼 논박이나 “신앙의 자유” 가 아니다. 행여 그렇다면 관용으로 해결하면 될지도 모르지만, 핵심은 테러를 자행하는 데 따르는 생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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