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윤리학은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버려둘까

 

 

 

 

 

 

 

 

칸트의 윤리학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그림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독립적인 행위자로 대우받아야 하고 그가 지닌 의무와 독자성의 영역은 존중되어야 하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상호신뢰의 이상형이다. 이런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가능한 건 인간이 이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은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다고 신뢰받고 있기에, 강압적인 침해를 받지 않는 가운데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칸트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견해는 한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칸트의 견해에서 볼 때, 위에서 설명한 인간관계의 이상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칸트의 견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자율적 행위자로 존중할 것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성적 행위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칸트의 윤리학에서 기본 신념의 하나다. 그런데 이성적 행위자가 나쁜 일을 하기로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을 잃고 미친 짓을 한다면 더는 그를 존중할 의무가 없어진다. 그 행위자는 여전히 이성적으로 행위할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자율적 존재지만, 나쁜 행위를 하고 타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문제다. 그 사람이 타율에 따라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다고 가정해보자. 참견해서 말려야 할까? 칸트의 윤리학에 비추어볼 때 간섭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는 행위라면, 우리는 그 사람의 위협 앞에 무방비 상태로 마냥 팔짱을 끼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의 원칙은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칸트는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 벌주는 것을 허용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벌 받을 짓을 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건 정당하고 그것은 그 사람을 여전히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기 때문이다. 벌은 책임 있는 행위자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자율적 행위자가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에게 벌을 줄 수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잘못에 합당한 벌은 그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을 신뢰하고, 그들이 하려는 행위를 하게 두라고 가르친다. 일이 벌어진 다음이라야 벌주려고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칸트마저 당황해 마지않던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문 앞에 살인자가 와 있는 사례로, 이를 현대의 조건에 맞추어 수정한 것이다. 어떤 사내가 문 앞에 와서 나의 친구를 찾는다. 그는 비밀경찰일지 모르는데 친구를 죽일 참이다. 친구는 유대인으로 나의 집에 숨어 있다. 나는 친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친구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칸트는 나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할 것이다. 칸트가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존중하는 것이 나의 기본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 앞의 사내까지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그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 사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신뢰해야 하며, 그 사내를 위해 내가 결정을 내려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내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내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요, 사내가 타당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하는 것을 방해하는 셈이다. 보아하니 그 사내는 사람을 죽일 참이기에 사내가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런데도 칸트는 살인자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정할 수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사내가 마음을 바꾸도록 그와 논의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공리주의자들과는 달리, 칸트는 단순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타인의 자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칸트의 견해는 반직관적일 뿐 아니라 자기 모순으로 비치기도 한다. 칸트의 견해는 이성적 행위자를 중심에 놓고 있다. 칸트는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해서 인간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살인자의 자율을 존중하면, 똑같이 이성적 행위능력을 지닌 친구의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정말로 이성적 행위능력의 가치를 존중한다면 그것을 다만 존중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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