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능형근rhomboid muscles에 통증이 생길까요?

 

 

 

열중쉬어 자세를 취할 때 어깻죽지 주위의 등 근육에서 통증을 느낀다면 능형근rhomboid muscles에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견갑골scapula(어깨 뼈) 사이에 크고 작은 능형근이 있는데, 대능형근greater rhomboid muscle과 소능형근lesser rhomnboid muscle입니다. 이 둘은 상하에 접하고 있는데, 위에 있는 것이 소능형근이고 아래에 있는 것이 대능형근입니다. 이 근육은 흉추胸椎의 돌기에서 시작하여 외하방으로 이어지면서 어깨 뼈의 외내연에서 끝납니다. 이 근육은 견갑배신경肩甲背神經의 지배를 받으며 견갑골을 내전하는 동시에 하방으로 회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의자에 오래앉아 있다가 갈비뼈 뒤쪽으로부터 통증을 느끼거나 갈비뼈 엽구리에서 통증을 느끼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앉을 때 통증을 느낀다면 능형근을 의심해야 합니다. 자세가 나쁘면 상체 운동에 관여하는 가슴에 있는 삼각형 근육인 대흉근의 이상에 의해 통증이 생길 수 있으며 주로 어깨 뼈의 극상근supraspinous muscle에서 통증이 생기고 어깨 뼈 등쪽 면 부위에서 통증이 발생합니다. 통증은 견갑거근의 것과 유사하지만, 어깨의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점과 목을 돌릴 때 통증이 없는 점이 다릅니다.

능형근에서 통증을 느끼면 테이프를 붙이는 것도 방법입니다. 환자의 어깨를 뒤로 젖혀 머리를 숙이고 팔을 앞으로 감싸게 한 뒤 폭 5cm 길이 10cm 테이프를 X자형으로 붙입니다. X자형이란 테이프 하나를 그 위에 X모양으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붙이면서 약간 구부려 두 개가 하나의 X모양이 되게 붙이는 것입니다. 능형근에 테이프를 붙여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면, 후두골(뒤통수뼈)로부터 아래로 흉추(등뼈)에 이르기까지 길게 내려오며, 옆으로는 어깨 뼈까지 걸쳐 있는 긴 근육으로 어깨뼈를 움직이고 팔을 지탱하는 근육인 다승모근trapezius muscle 위쪽과 견갑골을 위로 들어 올리는 작용을 하는 근육인 견갑거근에도 테이프를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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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 이슬람세계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바삼 티비 지음, 유지훈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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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늘 기자의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천지일보=고하늘 기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의 무슬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저자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진보주의 이슬람교 학자로 명성이 나 있다. 40여 년간 이슬람문화를 연구한 그는 은퇴하기에 앞서 혼신의 힘을 쏟아 마지막 작품을 내놓았다. 그 결정체가 바로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다.

 

진보주의 이슬람교 학자인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도피생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외로운 길을 걸어왔다. 그렇게 40여 년간 연구한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기까지도 쉽지 않았다. 예일 대학에서 책을 집필하고 탈고한 후에 두 차례에 걸쳐 전문가 여덟 명이 검토하고 네 차례의 편집과정을 거쳐 최종 통과됐다. 예일 대학 출판부는 다시 세 명의 검토자를 선정해 몇 차례의 원고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민감한 주제임에 그 같은 과정이 있어졌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책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는 그만큼 간절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가장 역설하는 점은 이슬람교 신앙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슬람교의 종교성을 도입한 이슬람주의의 종교화된 정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슬람권 밖의 사람들이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까닭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의 뿌리가 이슬람교라고 확신하며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슬람교를 순수한 종교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석해 신정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무슬림의 사명으로 간주하고 17억 무슬림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선동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다시 말해 이슬람주의는 국가질서를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하고 이슬람교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무슬림의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규정하는 문화적, 종교적 제도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주의를 반대하는 무슬림으로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 안에서 이슬람교가 새로이 인식돼야 함을 주장한다. 진보주의 무슬림으로서 그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이슬람주의의 전체주의적 외관은 반유대주의와 관계가 깊으며, 이슬람주의자들이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양극화를 부추길 뿐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의 내분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살테러 등 폭력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데도 영향력 있는 서양 학자와 정치가들은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동 이슬람 세계에 대한 정책을 펴고 있어 현재 이슬람교가 문명의 충돌 혹은 문명의 위기에 분수령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에 관한 무지는 서양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예외라 할 수 없는데 이는 17억 인구를 가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정책에도 큰 혼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계한다. 우리는 종교로서의 이슬람교는 존중해야 하나, 종교를 빙자해 정치적 목적을 무력으로 달성하려는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종교가 종교화된 정치의 탈을 쓰고 공공영역에 귀환한 것은 이슬람교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슬람교의 이데올로기는 여느 종교적 원리주의보다 세계의 정치에 중요하다. 전통적인 보편주의를 종교적 토대 위에 제기된 새로운 국제주의로 옮기는 데 이슬람주의가 다른 원리주의보다 더 공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9・11테러 사태 이후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발광하는 폭력배”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주의는 팔레스타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릇된 서양식 정치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세계질서를 추구하는 세력이다. 이는 아랍 및 이슬람세계의 구조적・규범적 위기에 매우 깊이 내재되어 있다.” -2장 이슬람주의와 정치질서 p86


바삼 티비 지음 / 知와 사랑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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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 이슬람세계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바삼 티비 지음, 유지훈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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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는 왜 이슬람교가 아닌가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지와 사랑)의 저자 바삼 티비는 저서에서 ‘이슬람주의는 왜 이슬람교가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종교와 종교로 채색한 이데올로기를 구분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이슬람주의가 이슬람교가 아닌 이유로 이슬람주의가 신앙에 본질적인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정치질서를 신정정치에 기반을 두는 가운데 이데올로기를 종교로 채색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정치질서를 “종교화한 정치”로 규정합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말하는 종교화한 정치란 국민의 주권이 아닌, 알라 신의 뜻에서 비롯된 정치질서를 장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이슬람교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신앙과 종교 및 윤리적 기틀로서 정치적 가치를 내포하긴 하지만 정부의 구체적인 질서를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주의는 자주 회자되는 이슬람교의 부흥도 아닐 뿐만 아니라 부흥은커녕 전통과는 다른 선입견을 부추기는 사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삼 티비는 “상상 속의 신정국가인 알라 신의 통치hakimiyyat Allah(하키미야트 알라)라는 이슬람교의 유토피아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슬람주의에서는 제도적인 이슬람주의와 지하드운동이 뚜렷이 대별되나 수단만 다를 뿐 둘 다 목적은 같다”면서 “이슬람주의가 전통을 꾸며낸 경위와 까닭을 이해하려면 이슬람교 조직의 아젠다부터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슬람주의를 이해하려면 이슬람주의가 세계화의 시류에서 식민지로부터 독립 후 개발이 중단된 데 대한 문화적, 정치적 대응책으로, 정치색을 띠긴 하나 종교적인 면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점에 주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관계를 배제하지 않는 가운데 이슬람교와 구별되는 이슬람주의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생 이 분야에서 연구하여 명성을 얻은 저자는 이슬람주의가 이슬람교의 휴머니즘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이슬람교가 태동한 이슬람문명의 위기에 전 세계 역사, 사회학 사상을 적용했습니다.

우선 그는 전통적인 신앙을 따르는 무슬림을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슬람주의가 꾸며낸 전통임을 증명합니다. 독실한 무슬림인 그의 눈에는 이슬람주의가 전통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보이고 그것을 지적합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슬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자신들의 공약을 지키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자들로 전락하여 반대파를 억압한 실상을 지적합니다. 그는 정교가 분리된 세속 민주국가인 터키에서조차도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정의개발당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 집권당은 언론의 자유를 저해하고 언론인들을 재판 절차 없이 강제 투옥시키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2010년 11월, 유럽연합EU은 연례보고서에서 터키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슬람주의의 가면은 바삼 티비에 의해서 신간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에서 완전히 벗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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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챙김의 중심적 역할

 

 

 

유대의 유명한 옛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랍비는 숲속 깊은 곳에 있는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장소를 찾았다. 그는 그곳에서 성스러운 불을 피우고 성스러운 기도로 신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곤 했다. 세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성스러운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스러운 불과 성스러운 기도는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했고 기도는 응답받아 문제가 해결되었다. 시간이 더 흐르자 성스러운 불을 피우는 방법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성스러운 기도를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국 아무도 성스러운 장소나 성스러운 불을 피우는 방법 또는 성스러운 기도를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때 성스러운 장소, 성스러운 불, 성스러운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기억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음챙김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챙김은 팔정도의 요소들과 연결된다. 동시에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바른 정견과 정사유를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마음을 챙긴다면 우리가 하는 말을 의식할 수 있고, 그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어 정언을 하게 된다. 마음을 챙기면 우리의 행동과 직업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챙긴다면 이미 정업과 정명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챙김은 정정진과 정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에는 우리 자신(우리의 호흡, 우리의 몸, 우리의 의식)으로 돌아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라. 우리의 지각이 점차 명료해지고 깊어지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을 챙기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슬픔의 주요 원인인 과도한 탐욕을 줄이는 방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마음챙김을 수행하면 된다. 고통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이 고통임을 인식하라. 그 뿌리, 즉 원인을 살펴보라. 고통의 원인을 아는 순간, 둑카의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무엇이 우리를 치유하고 힘을 주는지 살펴보고 그것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인다면 고통이 치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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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지와 사랑)

 

 

 

토론, 논증, 탐구

 

 

토론은 철학 교육에서 특히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토론을 통해 새로운 견해를 만나고,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며, 대안을 모색하고, 사고력을 향상시킨다. 반론을 접하고 그것을 재반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철학 토론은 하나의 자극제이자 강력한 청량제로도 작용할 수 있다.
철학 토론은 대체로 비공식 토론회, 대학의 개별 지도시간, 세미나, 질의응답시간 등에서 참가자들이 얼굴을 서로 마주한 채 이뤄진다. 과거에는 편지교환을 통한 토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대의 철학자들은 편지보다는 인터넷을 선호할 것이다.
편지나 이메일을 이용한 ‘비동시적’ 토론과 달리 현장에서 얼굴을 맞대고 진행되는 ‘실시간’ 토론은 장점이 많다. 실시간 토론 특유의 지적 에너지와 신속한 반응은 생각에 집중하고 불필요한 노력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교수들이나 동료 학생들을 상대로 직접 철학 토론을 해보면, 그 진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안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직접 상대의 비판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진술하고 변호해보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물론 인터넷을 이용한 철학 토론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비동시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라면, 인터넷 토론은 토론기술보다는 문장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의 입장에서 노련한 철학자의 철학적 사고를 직접 목격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철학 전문가가 개념을 탐색하고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고 비판에 맞서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값진 공부가 될 수 있다. 철학의 특정 분야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분야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과 직접 토론해보는 것이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전문 철학자를 상대로 토론하면 토론의 주제에 관한 글이나 책을 더 많이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특정 주제를 향한 철학자들의 뜨거운 열정은 학생들의 공부의욕을 부추기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철학은 지적인 게임이 아니다. 철학은 우리가 삶에 관해,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 던질 수 있는 심오한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철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제기되기를 바라지 않는 거북한 질문, 즉 무사안일complacency과 자기기만을 깨뜨릴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주 좁은 범위의 관심사를 갖고 살고 있다. 우리는 주택융자금을 어떻게 갚을지, 새 자동차를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늘 저녁식사를 위해 무엇을 요리할지 따위를 고민한다. 철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한걸음 물러나 더 큰 그림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그간 당연시했던 것들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내가 볼 때 지금까지 한걸음 물러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 즉 자기 삶을 점검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깊이가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20세기의 소중한 교훈들 중 하나는, 인간은 아무리 ‘문명화’되었어도 도덕적 순응주의자라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제시하는 도덕적 주문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곤 한다. 나치 독일에서 르완다 사태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지배적 흐름을 맹목적으로 따라만 갔다.
일반인의 눈에는 철학 토론이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한 사람이 어떤 요점을 제기하자마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비판한다. 마치 토론 참가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렇게 진행되는 토론도 많다. 그것은 특정한 방식의 철학 토론의 특징이다. 토론자들은 의견을 제시하고 비판을 받아들인다. 철학은 세미나실, 인쇄물, 인터넷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판과 반박, 공격과 방어를 통해 발전하고 성장한다.
치열한 토론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공격당하는 느낌이 들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어떤 주장과 그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혼동하면 곤란하다. 철학자들이 누군가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상대를 철학자로서 존중하고 있다는 표시다. 철학 토론의 취지는 진리에 다가가는 것, 비판과 담쌓은 생각에 반대하는 것, 잘못된 생각을 합리적인 견해로 대체하는 것이다. 어떤 주장에 대한 비판은 개인을 겨냥한 잔인한 공격이 아니라 해당 주제의 발전을 꾀하기 위한 필연적인 수단이다.
부정적 논리에 대한 비난, 즉 긍정적인 진리를 확립하지 않은 채 특정 이론의 약점이나 실제의 오류를 지적하는 행위에 대한 비난이 오늘날 유행하고 있다. 그런 부정적 논리는 사실 궁극적인 결과로서는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명칭에 걸맞은 긍정적인 지식이나 확신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을 접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반론을 자기 입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자극제로 삼으라는 말이다.
철학공부는 단순한 말싸움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해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관계가 있다. 논쟁의 기술을 배우고 반론에 대처하기 위한 열쇠는 모든 쟁점에서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고, 적절한 논증을 바탕으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증은 수사법에 의존한 설득이 아니라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철학 토론이 언제나 찬성과 반대가 부딪히는 논쟁은 아니다. 철학 토론에서는 해석이 따르고,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도 수반되며, 철학 텍스트에 관한 더욱더 깊이 있는 통찰력과 이해도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협력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때로는 토론의 목적이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도록 유도하는 것, 어떤 철학자가 특정한 방식으로 주장을 전개하는 까닭을 이해하는 것, 어떤 철학자가 언급한 말의 의미나 그것이 중요한 까닭을 이해하는 것 등이 될 수도 있다. 철학 토론은 흠잡기가 아니다. 철학 토론은 생각의 창의적 교환일 수 있고, 특정 주제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의 탐구일 수 있으며, 기존의 익숙한 사고방식을 새로운 상황에 응용하는 과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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