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와 신민회, 대성학교, 쳥년학우회

 

 

 

안창호는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한 강연에 참여해 연설을 했는데,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받은 여운형, 여운홍 형제와 조만식은 독립 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강연에 감화를 받은 조만식은 “장차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려면 실력을 키워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07년 2월에 안창호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했습니다.

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 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스물아홉 살의 안창호는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조건에 합당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각 도에서 골고루 인물을 구하는 것인데 이는 여러 가지로 불쾌한 악습이 된 지방색을 예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동지들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습니다. 안창호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 대부분이 1896년도에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었습니다.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 이갑, 평양지방의 부자들 이종호, 이승훈, 그리고 안태국, 이동녕, 이회영 등이었습니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체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탈피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습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자신을 위한 신사상, 신윤리, 신학술, 신모범, 신개혁을 주창했습니다.

이광수에 의하면,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각 도에 한 사람씩 책임자가 있고 그 밑에는 군 책임자가 있어 종으로 연락하고, 횡으로는 서로 동지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게 되어 있엇다.” 그리고 “입회 절차는 심히 엄중하여서 ‘믿을 사람’, ’애국 헌신할 결의 있는 사람‘, ’단결의 신의에 복종할 사람‘ 등의 자격으로 인물을 골라서 입회를 시키는 것이요, 지원자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이광수는 “신민회가 있다는 소문이 나고 일본 경찰이 이것을 탐색하게 된 것은 합병 후였던 것으로 보아서, 이 단결이 어떻게 비밀을 엄수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위 테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700여 명의 혐의자가 경무총감부 아키라이시 모토지로의 명령으로 검거될 적에야 비로소 세상은 신민회라는 것과 누가 그 회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1907년에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吳熙源 등의 재정적 원조를 받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했는데, 교육방침은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건전한 인격의 함양,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이었습니다. 개교 때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습니다. 대성학교는 민족사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아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1909년 2월 3일 융희황제가 서도순행 중 대한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고 나와 환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습니다.

안창호의 인격은 이광수의 다음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도산은 평양 대성학교의 무명한 직원으로서 교장을 대리하는 것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도산이 무엇에나 자신이 표면에 안 나서고 선두에 안 나서는 사업 방침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제로는 도산이 대성학교의 교주요 교장이었다.

 

안창호는 건전한 인격을 역설했는데, 그것은 거짓말이 없고 속이는 행실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게 학생의 가장 큰 죄는 거짓말,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하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반면에 안창호는 “학도들을 사랑하였고 모든 긴장을 풀고 유쾌하게 담소 오락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둘 것을 잊지 아니하였다. 이런 좌석에선 도산 자신도 노래하고 우스꽝스러운 흉내도 내어서 남을 웃겼다”고 이광수는 증언했습니다.

대성학교는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한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습니다. 안창호는 제1회 졸업도 보지 못한 채 망명의 길을 떠났지만, 그 짧은 기간에 젊은이들에게 미친 감화는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남강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운 것도 함북에 경성중학이 선 것도, 그 밖에 크고 작은 무수한 사립학교들이 서북 지방에 울흥蔚興한 데는 도산과 대성학교의 공이 대단히 컸던 것이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1864~1930)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운 것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난 후였습니다. “나라가 없고서 일가와 일신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를 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가 없소”라는 말을 듣고 이승훈은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론, 교육론을 직접 듣고 그날로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가서 자기 주택과 서재의 공사를 중지하고 그 재목과 기와를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빈한한 서민집안에서 태어나 2세 때 어머니를 여읜 이승훈은 열 살 때 이름난 유기상鍮器商 임권일상점林權逸商店의 사환으로 들어가 3년 뒤에는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습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선敬善과 결혼하고, 보부상으로 평안도 및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했습니다. 1901년 평양에 진출,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손을 대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오산학교는 그의 열성과 성의를 바탕으로 이종성李鍾聲, 이광수李光洙, 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습니다.

안창호는 1909년에 젊은이들을 결합하여 일대 수양 운동, 즉 민족향상 운동을 일으키려고 쳥년학우회를 발기했습니다. 그 정신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의 훈련을 힘쓰며, 한 가지 이상의 전문적인 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고, 평생에 매일 덕德, 체體, 지智 삼육에 관한 행사를 하여 건전한 인격자가 되기를 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흥사단興士團 창립 당시의 약법約法에 표시된 단團의 설립목적과 일치하는데, 약법에 “본 단의 목적은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忠義男女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며 덕체지德體智 삼육을 동맹수련同盟修鍊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를위해 흥사단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네 가지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인격, 단결, 공민의 3대 수련활동을 합니다.

쳥년학우회는 정치적 성질을 띤 것이 아니라고 하여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자기가 아무리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평양의 대성학교에 칩거하더라도 당국이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정치가요 혁명가로 지목했습니다. 안창호는 쳥년학우회 운동과 대성학교에 지장을 줄 것이 두려워 대중을 향한 연설도 서울로 가는 것도 피하고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민족향상 운동은 도덕 운동이지 정치 운동이 아니라고 절연히 구분했습니다. 그가 민족향상 운동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두 가지로 가를 수 있습니다. 이광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적이란 것은 민족향상 운동자가 정치적 야심을 가지게 되면 그 운동을 정치에 이용할 걱정이 있고, 또 도덕적 민족향상의 가치를 정치보다 아래로 떨어뜨릴 근심이 있다. 민족향상 운동은 정치보다도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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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팥은 하나를 떼어내더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까?

 

 

 

콩팥 혹은 신장kidney은 아래쪽 배의 등쪽에 쌍으로 위치하며 노폐물을 배설하고 산염기 및 전해질 대사 등 체내 항상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 중요한 장기 중 하나입니다. 콩팥이란 명칭은 누에콩인 잠두蠶豆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입니다. 양쪽 콩팥의 총 무게는 240-320g으로 몸무게의 약 0.4%에 지나지 않지만 콩팥의 기능이 심하게 저하되거나 소실되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생명의 유지에 매우 중요한 생리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총 심박출량의 20~25%가 콩팥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콩팥의 기능을 담당하는 단위 구조로서 네프론nephron 혹은 신우腎盂가 있으며 이는 소변을 생산하는 데 있어 기본 단위가 됩니다. 신우에 모인 오줌이 수뇨관輸尿管을 타고 내려가 방광에 모이고, 일정량 이상이 되면 요도를 통해 배설됩니다. 정상인에서 하루에 콩팥에서 여과되는 혈액량은 무려 180리터에 이르지만 대부분은 재흡수되고 실제로 배설되는 소변의 양은 1~2리터에 불과합니다. 이는 인체에서 필요한 수분과 영양분들은 재흡수가 되고 더 배설이 필요한 물질은 분비가 되어 최종적으로 소변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오줌에 당이 섞여 나옵니다. 당뇨병diabetes mellitus은 인슐린의 분비량이 부족하거나 정상적인 기능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의 대사질환의 일종으로, 혈중 포도당의 농도가 높아지는 고혈당을 특징으로 하며, 고혈당으로 인하여 여러 증상 및 징후를 일으키고 소변에서 포도당을 배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당뇨병은 제1형과 제2형으로 구분되는데, 제1형 당뇨병은 ‘소아당뇨’라고도 불리며, 인슐린을 전혀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환입니다. 인슐린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제2형 당뇨병은 인슐린 저항성insulin resistance(혈당을 낮추는 인슐린 기능이 떨어져 세포가 포도당을 효과적으로 연소하지 못하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제2형 당뇨는 식생활의 서구화에 따른 고열량, 고지방, 고단백의 식단, 운동 부족, 스트레스 등 환경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외에 특정 유전자의 결함에 의해서도 당뇨병이 생길 수 있으며, 췌장 수술, 감염, 약제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습니다.

콩팥은 하나를 떼어내더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경화증 같은 이상이 생기면 콩팥에서 여과작용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해 몸에 물이 남아있게 되므로, 혈압이 오르고 부종이나 요독尿毒이 생깁니다. 콩팥 자체에서는 레닌renin이라는 호르몬이 만들어져 혈당량과 혈압을 유지하고,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이 콩팥의 혈관을 확장시켜 혈의 흐름을 증가시키는 일을 하는데, 콩팥 자체에서 적혈구 조혈인자를 만들지 못하면 콩팥이 빈혈상태에 이르게 되는 신부전증腎不全症에 걸리게 됩니다. 만성 신부전은 3개월 이상 신장이 손상되어 있거나 신장 기능 감소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만성 신부전은 신장의 손상 정도와 기능의 감소 정도에 따라 다음의 5단계로 나누어지며, 잘 관리하지 않으면 마지막 단계로까지 악화되어 결국은 투석이나 신장이식과 같은 신장대체 요법을 해야 합니다. 1단계는 신장 기능 검사상 정상 혹은 소변 검사상 이상이 관찰되는 것입니다. 2단계는 신장 기능이 정상의 69~89%로 약간의 기능 감소가 관찰되는 것입니다. 1~2단계에서는 신장 기능 저하의 원인(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을 찾아 치료하고, 신장 기능 저하의 진행 여부를 주기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3단계는 정상 신장에 비해 신장 기능이 30~59%로 감소되는 것입니다. 신장 기능 감소에 따른 합병증 발생 여부를 검사하여 치료해야 하며 신장 기능 저하의 진행 여부를 주기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4단계는 정상 신장에 비해 신장 기능이 15~29%로 감소되는 것입니다. 신장내과 의사의 진료를 받고 투석 방법 및 이식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5단계는 정상 신장에 비해 신장 기능이 15%이하로 심하게 감소되는 것입니다. 혈액투석hemodialysis, 복막투석peritoneal dialysis이나 신장이식renal transplantation과 같은 신장 대체요법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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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 이슬람세계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바삼 티비 지음, 유지훈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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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관련된 쟁점들

 

 

 

 

 

 

신간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지와 사랑, 원제: Islamism and Islam)의 저자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와 관련된 쟁점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무슬림과 서방세계 모두가 이슬람주의의 사상과 관습에 대한 몰이해가 있다면서, ‘급진적 이슬람교’를 추종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전투적인 작태로 치부하거나, 이슬람답지 못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들을 파문하는 건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티비는 ‘급진적 이슬람교’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혹 가장 보수적인 무슬림을 가리켜서 급진적이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몰이해라고 말합니다. 티비는 무슬림에 대한 이런 오해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이슬람주의와 관련된 쟁점에서 정치가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정책을 잡거나 학자들은 쟁점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함을 경고합니다.

티비는 이슬람세계에 ‘급진적 이슬람교’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정치를 종교로 승화시킨 초국가조직의 전체주의적 이슬람주의가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질서를 이슬람교에 접목시켜 신정정치를 꿈꾸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슬람교란 이런 것이다 하고 운운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저자의 주장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 자신 독실한 이슬람교 가정에서 성장하고 진보주의 입장에서 이슬람교를 옹호하는 학자로서 이슬람주의자들의 정치적 속셈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신실한 신도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데 대해 냉소합니다.

티비는 서방세계의 정책 입안자들과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이슬람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하면서 그들이 이슬람주의자들을 소외된 소수민족이자 “급진적 무슬림”으로 낮잡아 부르거나 이슬람화 정책을 “또 하나의 근대화” 로 부풀리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방세계의 주요 정치가들이 과거에 범한 잘못은 이슬람주의가 번성하는 것을 실용적 차원에서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이 이슬람주의자들을 포섭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에서 정권을 잡아 통치권을 내세우면 이슬람주의자들이 고분고분 따를 것이라 생각한 데에 있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의 조직이 그러했듯이 이슬람주의자들도 통치권을 주면 제풀에 사그라지거나 현실에 적응하게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알고 있듯이 이슬람세계에서의 포스트이슬람주의의 조짐은 여태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저자는 이슬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꾸며낸 전통의 모태가 되는 이슬람교의 전통을 먼저 파악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에서 이슬람교의 전통을 파악하기 위한 여섯 가지 주제를 제시합니다. 그 여섯 가지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기본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운

동이 또 하나의 전체주의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 공산주의, 동시대 이슬람주의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전체주의, 파시즘, 그리고 공산주의의 초기 사상들은 종교와 무관했던 반면 이슬람주의는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일 뿐입니다.

“이슬람주의”는 본래의 사상을 이데올로기로 전환할 때 “주의ism”를 붙인다는 보편적인 관행을 반영합니다. 예컨대, 카를 마르크스의 이름에 “주의”를 덧대면 유럽 휴머니스트 마르크스의 사상을, 본래의 것과 늘 일치하는 사상이 아닌 이데올로기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레닌주의자들이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로 발전시킨 것으로 마르크스의 원래 의제와는 사뭇 다른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의 정치화란, 이슬람교 신앙과는 일치하지 않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 종교가 이용되는 과정을 일컫습니다. 정치적 종교가 세속적 목적을 추구하는 수단이 된 것으로 저자는 이런 점에서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가 다르다고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슬람주의가 종교를 정치적으로 해석한 것이란 점을 보탰습니다. 이는 이슬람주의가 종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자가 이런 결론에 도달은 것은 그가 30년간 이슬람주의를 연구하면서 전 세계의 이슬람주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이 자신들을 진정한 신도로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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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연설에 만장이 느껴 울었다

 

 

 

도산 안창호는 연설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연설이 있다면 회장이 터지도록 만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신지식과 애국, 우국의 극진한 정성과 웅변은 청중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거의 연일 연설했습니다. 그는 민족경쟁시대를 맞아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고서는 민족이 설 수 없고 개인도 있을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국민 개개인이 각성하여 큰 힘을 내지 못한다면 조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큰 힘을 내는 길이란 국민 개개인이 분발, 수양하여 도덕적으로 거짓 없고 참된 인격이 되며, 지식적으로 기술적으로 유능한 인재가 되고 그런 개인들이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견고한 단결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지금에 깨달아 스스로 고치고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면 망국을 뉘 있어 막으랴 라고 눈물과 소리가 섞이어 흐를 때는 만장이 느껴 울었다. ... 만장 청중으로 하여금 서슴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게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연설에서 “주목할 것은 그의 민족운동 이론의 체계였다. 다만 우국, 애국의 열만이 아니라 구국 제세濟世의 냉철한 이지적인 계획과 필성필승必成必勝의 신념”이라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신민회, 대한협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웅변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습니다. 그는 앞서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유길준의 계몽강연 활동에 감명을 받아 깊이 공감했습니다. 이후 안창호는 실력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며, 민중의 의식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광수는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산은 지식인들의 여론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당시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급진론자가 많았다. 그때에 급진론이라면, 당장에 정권을 손에 넣어서 서정庶政을 혁신하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니, 이 급진론은 도산이 그 중심인물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이 급진이 성공 못 할 것을 역설하고, 오직 동지의 결합 훈련과 교육과 산업으로 국력, 민력을 배양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로라고 단정하고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힘없는 혁명이 불가능함을 말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갑신정변의 김옥균 일파의 독립당 운동이 그러하였고 정유년의 서재필, 이승만의 독립당 운동도 그러하였다. 번번이 ‘시급’을 말하고 ‘백년하청’을 탄하여서 ‘있는 대로 아무렇게나’로 r사하여서 번번이 실패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이광수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광수의 의견은 안창호가 말한 바와 일치했는데,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신년부터 단결과 교육산업주의로 국력배양 운동을 하였던들 벌써 20여 년의 적축積蓄이 아니겠는가. 정유년부터 실력 운동을 하였어도 벌써 십년생취十年生聚, 10년 교훈이 아니었겠는가. 오늘부터 이 일을 시작하면 10년 후에는 국가를 지탱할 큰 힘이 모이고 쌓이지 아니하겠는가. 이 힘의 준비야말로 독립목적 달성의 유일무이한 첩경捷徑이다.

 

안창호가 급진론자들을 경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조정에 뿌리박은 수구파 세력과 이토 히로부미를 대표로 하는 일본 세력이었습니다. 급진론의 주장과 같이 신인들이 정권을 잡는 길은, 하나는 수구파와 합작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신의 김옥균이나 갑오의 박영효 모두 일본의 후원으로 수구파를 소탕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외력을 빌린다는 건 애초 대의에 어그러질 뿐더러 비록 외국의 위력으로 일시 반대파를 억압한다고 하더라도 억압받는 반대파가 반드시 매국적인 조건으로 그 외력과 재결합하여 신파에게 보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창호는 일본의 후원을 비는 건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일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광수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때에 최석하가 이토 히로부미와 자주 만나서 한국 정치의 혁신공작을 하고 있었고, 그는 안창호 내각을 출현케 하는 것이 한국의 혁신을 위하여 가장 양책임을 이토에게 진언하였다. 동시에 도산에게 대하여서도 이토의 진의가 결코 한국의 병탄에 있지 아니하고, 일본과 한국과 청국과의 삼국정립친선三國鼎立親善이야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막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이토의 정견을 도산에게 전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석하崔錫(1866~1929)는 1899년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하여 10년 가까운 기간을 일본 유학생으로서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최석하는 러시아 제국을 비난하는 건백서를 일본 외무성에 보내고 “동양 평화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자청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전쟁 때 세운 공로로 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8등서보장을 받았습니다. 당시 정계의 실권은 일본과 결탁해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성사시키고 정국을 이끌어 온 이완용이 잡고 있었는데, 이완용 일파와의 주도권 경쟁을 위해 상대적으로 더 선명한 친일성을 내세우며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의 이른바 3파연합이 추진되었습니다. 최석하는 이 3파연합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여 신진 정치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912년에 평안북도 도참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해 11월 4일에 열린 메이지 천황 장례식에서 평안북도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3·1 운동 이후 신일본주의를 내세운 새로운 차원의 친일단체 국민협회가 주도한 참정권청원 운동에 평안북도 대표로서 서명한 기록이 있고, 1928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평가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는 을사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 병탄倂呑의 기초 공작을 수행한 인물로 1907년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도록 했고,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이를 파기하고자 한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그는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哈爾濱을 방문하던 중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에게 저격당해 사망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창호를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표시했고, 두 사람의 회견은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이광수는 “이 일이 있게 한 것은 이갑, 최석하의 권유도 원인이거니와, 도산도 이토를 만나 그 인물과 정견을 알아보자는 필요와 욕망을 느꼈다”고 적었습니다. 이광수는 “이토는 도산더러 자기가 청국에 갈 때에는 그대도 같이 가자고, 그래서 삼국의 정치가가 힘을 합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자고. 이렇게 심히 음흉하게 말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안창호는 이토에게 일본을 잘 만든 것이 이토 자신인 것 같은데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미국이 시켰다면 명치유신이 되었겠느냐고 반문하며 한국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혁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도산은 다시, 그대가 만일 사이좋은 이웃나라의 손님으로 한양에 왔다면 나는 매일 그대를 방문하여 대선배로, 선생님으로 섬기겠노라. 그러나 그대가 한국을 다스리러 온 외국인이매 나는 그대를 방문하기를 꺼리고 그대를 친근하기를 꺼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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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탄다”에서 애란 무엇입니까?

 

 

 

창자intestine는 소화기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작은창자(소장)와 큰창자(대장)로 구성됩니다. 유문pylorus에서 회맹판ileocecal valve까지를 작은창자small bowel, 막창자(맹장)에서 직장rectum까지를 큰창자large bowel로 구분하며 주로 소화와 흡수, 배설을 담당합니다. 작은창자는 위와 큰창자 사이의 길이 약 6-7m 내외의 소화기관으로 샘창자duodenum(십이지장), 빈창자jejunum, 작은창자의 마지막 부위인 돌창자ileum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샘창자 혹은 십이지장은 손가락 열두 개를 가지런히 놓았을 때의 길이인 약 25cm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입니다. 위의 유문반사로 음식물이 샘창자로 내려오면 분비되는 소화액의 양이 더 많아집니다. 샘창자 다음에 빈창자로 연결되는데 이 빈창자의 길이가 약 2m, 지름이 3-4cm로 샘창자보다 조금 가늘며, 해부를 해보면 창자 속이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빈창자 다음으로는 길이가 약 4m, 지름 2-3cm인 돌창자가 나타납니다. 빈창자와 돌창자 둘레에는 부채 모양의 장간막이 발달되어 있으며 혈관이 많이 분포할 뿐만 아니라 지방도 많이 붙어있습니다. 샘창자에서는 음식물이 내려올 때에 위액의 자극을 받아 세크레틴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 물질은 혈관을 타고 췌장액의 분비를 촉진시키고, 그 췌장액은 다시 췌장관을 타고 샘창자의 벽으로 분비됩니다.

“애가 탄다” “애를 먹는다” “남의 애를 긋나니”"단장斷腸의 메아리“는 말에서 애는 창자를 가리킵니다. 단장이란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게 견딜 수 없는 심한 슬픔이나 괴로움을 말합니다. 큰창자大腸는 길이 1.5m, 직경 6cm 정도로, 작은창자보다 길이는 짧지만 굵기 때문에 큰창자라 부릅니다. 큰창자는 맹장(막창자), 결장(잘룩창자), 직장(곧은창자)으로 나눕니다. 큰창자의 대부분을 결장이 차지하며, 이것도 상행결장, 횡행결장, 하행결장, S자결장의 네 부위로 나눕니다.

큰창자에는 500종이 넘는 세균이 살고 있습니다. 창자가 탈이 없을 대에는 우리 몸에 이로운 세균들이 주권을 잡고 있을 때이고, 설사가 날 때에는 잡균이 득세할 때입니다. 대장균도 세균이므로 나쁜 것으로 알기 쉬우나, 대장균은 작은창자에서 내려온 찌꺼기를 분해하여 비타민B, 비타민K, 아미노산 등을 우리 몸에 공급합니다. 그래서 항생제를 장기간 복용하면 비타민 결핍증이 생기고, 혈액응고물질 합성에 필요한 비타민K 흡수에도 지장을 받아 혈액응고가 되지 않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항문의 괄약근을 밀고 나오는 똥을 분석하면 대략 창자의 세균이 33%, 창자의 상피세포가 33%, 음식물 찌꺼기가 34%입니다. 입에서 항문까지 음식물이 내려오는 데는 약 24시간이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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