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의 연설에 만장이 느껴 울었다

 

 

 

도산 안창호는 연설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연설이 있다면 회장이 터지도록 만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신지식과 애국, 우국의 극진한 정성과 웅변은 청중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거의 연일 연설했습니다. 그는 민족경쟁시대를 맞아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고서는 민족이 설 수 없고 개인도 있을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국민 개개인이 각성하여 큰 힘을 내지 못한다면 조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큰 힘을 내는 길이란 국민 개개인이 분발, 수양하여 도덕적으로 거짓 없고 참된 인격이 되며, 지식적으로 기술적으로 유능한 인재가 되고 그런 개인들이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견고한 단결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지금에 깨달아 스스로 고치고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면 망국을 뉘 있어 막으랴 라고 눈물과 소리가 섞이어 흐를 때는 만장이 느껴 울었다. ... 만장 청중으로 하여금 서슴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게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연설에서 “주목할 것은 그의 민족운동 이론의 체계였다. 다만 우국, 애국의 열만이 아니라 구국 제세濟世의 냉철한 이지적인 계획과 필성필승必成必勝의 신념”이라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신민회, 대한협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웅변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습니다. 그는 앞서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유길준의 계몽강연 활동에 감명을 받아 깊이 공감했습니다. 이후 안창호는 실력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며, 민중의 의식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광수는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산은 지식인들의 여론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당시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급진론자가 많았다. 그때에 급진론이라면, 당장에 정권을 손에 넣어서 서정庶政을 혁신하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니, 이 급진론은 도산이 그 중심인물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이 급진이 성공 못 할 것을 역설하고, 오직 동지의 결합 훈련과 교육과 산업으로 국력, 민력을 배양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로라고 단정하고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힘없는 혁명이 불가능함을 말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갑신정변의 김옥균 일파의 독립당 운동이 그러하였고 정유년의 서재필, 이승만의 독립당 운동도 그러하였다. 번번이 ‘시급’을 말하고 ‘백년하청’을 탄하여서 ‘있는 대로 아무렇게나’로 r사하여서 번번이 실패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이광수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광수의 의견은 안창호가 말한 바와 일치했는데,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신년부터 단결과 교육산업주의로 국력배양 운동을 하였던들 벌써 20여 년의 적축積蓄이 아니겠는가. 정유년부터 실력 운동을 하였어도 벌써 십년생취十年生聚, 10년 교훈이 아니었겠는가. 오늘부터 이 일을 시작하면 10년 후에는 국가를 지탱할 큰 힘이 모이고 쌓이지 아니하겠는가. 이 힘의 준비야말로 독립목적 달성의 유일무이한 첩경捷徑이다.

 

안창호가 급진론자들을 경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조정에 뿌리박은 수구파 세력과 이토 히로부미를 대표로 하는 일본 세력이었습니다. 급진론의 주장과 같이 신인들이 정권을 잡는 길은, 하나는 수구파와 합작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신의 김옥균이나 갑오의 박영효 모두 일본의 후원으로 수구파를 소탕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외력을 빌린다는 건 애초 대의에 어그러질 뿐더러 비록 외국의 위력으로 일시 반대파를 억압한다고 하더라도 억압받는 반대파가 반드시 매국적인 조건으로 그 외력과 재결합하여 신파에게 보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창호는 일본의 후원을 비는 건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일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광수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때에 최석하가 이토 히로부미와 자주 만나서 한국 정치의 혁신공작을 하고 있었고, 그는 안창호 내각을 출현케 하는 것이 한국의 혁신을 위하여 가장 양책임을 이토에게 진언하였다. 동시에 도산에게 대하여서도 이토의 진의가 결코 한국의 병탄에 있지 아니하고, 일본과 한국과 청국과의 삼국정립친선三國鼎立親善이야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막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이토의 정견을 도산에게 전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석하崔錫(1866~1929)는 1899년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하여 10년 가까운 기간을 일본 유학생으로서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최석하는 러시아 제국을 비난하는 건백서를 일본 외무성에 보내고 “동양 평화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자청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전쟁 때 세운 공로로 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8등서보장을 받았습니다. 당시 정계의 실권은 일본과 결탁해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성사시키고 정국을 이끌어 온 이완용이 잡고 있었는데, 이완용 일파와의 주도권 경쟁을 위해 상대적으로 더 선명한 친일성을 내세우며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의 이른바 3파연합이 추진되었습니다. 최석하는 이 3파연합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여 신진 정치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912년에 평안북도 도참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해 11월 4일에 열린 메이지 천황 장례식에서 평안북도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3·1 운동 이후 신일본주의를 내세운 새로운 차원의 친일단체 국민협회가 주도한 참정권청원 운동에 평안북도 대표로서 서명한 기록이 있고, 1928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평가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는 을사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 병탄倂呑의 기초 공작을 수행한 인물로 1907년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도록 했고,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이를 파기하고자 한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그는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哈爾濱을 방문하던 중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에게 저격당해 사망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창호를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표시했고, 두 사람의 회견은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이광수는 “이 일이 있게 한 것은 이갑, 최석하의 권유도 원인이거니와, 도산도 이토를 만나 그 인물과 정견을 알아보자는 필요와 욕망을 느꼈다”고 적었습니다. 이광수는 “이토는 도산더러 자기가 청국에 갈 때에는 그대도 같이 가자고, 그래서 삼국의 정치가가 힘을 합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자고. 이렇게 심히 음흉하게 말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안창호는 이토에게 일본을 잘 만든 것이 이토 자신인 것 같은데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미국이 시켰다면 명치유신이 되었겠느냐고 반문하며 한국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혁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도산은 다시, 그대가 만일 사이좋은 이웃나라의 손님으로 한양에 왔다면 나는 매일 그대를 방문하여 대선배로, 선생님으로 섬기겠노라. 그러나 그대가 한국을 다스리러 온 외국인이매 나는 그대를 방문하기를 꺼리고 그대를 친근하기를 꺼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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