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래 강변북로와 서강대교가 보입니다

 

 

 

13년가량을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마당이 있어 흙을 바라보며 살다가 공중누각에서 살려고 하니 적응이 될까 은근히 염려했습니다.

밤섬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를 보고선 당장 결정했습니다.

살던 곳에서 걸어갈 만큼 가까운 곳이라서 낯설지 않은 것도 결정하는데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 나무가 바라보이는 층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24층을 선택했습니다.

전망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이사는 작년 12월 10일이었습니다.

 

 

발아래 강변북로와 서강대교가 보입니다.

도시의 혈관이라 할 수 있는 달리는 자동차를 늘 바라보면서 도시의 활력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흙을 밟고 위로 바라만 보던 눈을 공중에서 이리저리 날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눈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 생겼고, 앞집 옆집 건너집을 적시는 비를 바라보다가 강남 저 멀리에까지 비에 젖는 것을 바라보니 2차원의 집에서 3차원의 집으로 옮겨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3차원은 입체라는 걸 새삼 알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곳 단지에는 카메라가 모두 125대가 설치되어 있다는 걸 입주 등록하러 갔다가 알았습니다.

누구라도 단지 내에 들어서면 125대 카메라의 감시의 대상이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범죄 예방이 목적이겠지만,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1975)이 생각났습니다.

감시의 방법과 처벌의 종류를 파헤쳐서 감옥의 탄생에서 정점을 이룬 책입니다.

역사적으로 감옥과 처벌의 내적, 외적 변화가 사법제도와 권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가 푸코의 저작 의도였습니다.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철학자 푸코는 사회에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간적 장치가 아니라 이성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온 장소로서 인간에 대한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억압적 수단의 필연적 산물로 보았습니다.

 

푸코는 <광기狂氣와 비이성非理性―고전시대에서의 광기의 역사>(1961)로 이미 유명해졌는데, 광기를 이성 중심의 서구 문화가 포용하지 않고 배척한 인간적 특성임을 알고 중세시대부터 19세기까지 감금된 광기에 대해 방대한 자료의 추적을 통해 그 개념 형성과 변화 과정을 밝혔습니다.

그가 언급하는 광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멀쩡하지만 권력자가 사회에 그냥 방치해두는 것이 사회에 해롭다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그런 존재입니다.

게으른 사람, 부랑자, 걸인 등이 광기의 소유자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권력이 어떻게 사악하게 사용되었는지를 더불어 알게 해줍니다.

푸코의 자료 수집은 방해합니다.

그는 수많을 구슬들을 수집하여 목걸이를 만들어 우리의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매우 놀랍고 치를 떨게 만드는 그런 목걸이입니다.

 

 

125대 카메라의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서 제가 처벌이 두려워서 떨고 있는 건 아닙니다.

광기狂氣로 말하면 없는 편이 아니지만 진보한 사회에서 사는 행운으로 사회에서 배척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믿고 안심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명사회가 감시 아래 건설된다는 것이 매우 비문명적이라는 생각으로 푸코가 잠시 머리에 떠오른 것뿐입니다.

이상적인 사회라면 감시도 필요 없는 자율적인 사회입니다.

해라 하지마라 하는 규율보다 칸트가 말한 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이는 마음속의 도덕률이 더 빛을 발하는 사회일 것입니다.

 

 

카메라는 이 아파트 단지에만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도 우리는 카메라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전철을 갈아탈 때에도, 건물 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쓰레기를 버릴 때에도, 버스 안에서도, 택시 안에서도, 골목길을 걸을 때에도, 심지어 사우나 안에서도 우리는 카메라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도로 전체가 블랙박스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런 감시체제 안에서도 범죄는 늘 발생합니다.

다시금 이상적인 사회가 자율적인 사회라고 생각됩니다.

 

 

전망 좋은 아파트로 이주한 후 125대 카메라가 감시하는 단지 내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푸코가 머리에 떠올라 이상적인 사회 운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내 책상은 창문 바로 옆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서 발아래 강변북로와 서강대교를 달리는 차들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특유의 차량 색깔은 흰색과 연한 회색입니다.

그리고 검정색이 유난히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126번째의 카메라가 되어 열심히 도로를 감시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수많은 차들이 나의 카메라의 감시 아래 남쪽으로 북쪽으로 그리고 여의도쪽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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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내각을 조직하여 일본과 협력케 함이 어떠하냐

 

 

 

이광수는 안창호의 석방에 노력한 사람이 최석하崔錫夏(1866~1929)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동경 명치대학 법과 출신으로 일본어에 능했던 최석하는 “외교적 재능이 있어서 이토 통감시대 이래로 일본측과 교섭하여 오던 경력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데라우치는 최석하에게 “안창호 내각을 조직하여 일본과 협력케 함이 어떠하냐”고 물었고, 이에 최석하는 “자기가 그대로 힘쓸 터이니 각 헌병대에 구금된 안창호 등을 즛기 성박하기를 청했다. 데라우치는 곧 아키라이시 모토지로에게 안창호 등의 석방을 명하였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최석하는 원동 이갑의 집에 도산 등 주요 인물을 모으고 데라우치의 의향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밤이 깊도록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의론이 많았다. 최석하는 일본의 진의가 반드시 한국을 합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 잘하면 일본과 충돌하지 아니하고도 국맥國脈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여, 일본 측의 최초요 최후의 제안인가 싶은, 민간 지사와 손잡자는 의도를 거절할 것이 아니라 하여 도산의 결의를 재촉하고, 이갑은 최석하와는 다른 견지에서 역시 호기물실好機勿失을 주장하였다.”

안창호는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어 일본의 제안에 응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단정적으로 반대하며 그 이유를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데라우치가 통감으로 온 것은 “가장 언정이순言正理順(말이 바르고 사리가 바름)하게, 가장 세계에 비난을 적게 받고 한국 병탄의 목적을 달하자는 것이다. ... 이제 민간 지사에게 정권을 준다는 것은 백성의 원망의 과녁이 된 귀족계급-일본의 허수아비라는 친일파의 속에서 말고, 애국지사라 하여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민간인 정권으로 그 손에서 주권의 양여를 받자는 혼담魂膽(혼백魂魄과 간담肝膽)이니, 우리가 이제 정권을 맏는 것은 그 술책 속에 빠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비록 권모權謀로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정권을 손에 가진 우리가 꿋꿋하게, 강경하게 자주 독립을 견지하여 한사코 항거하면 좋지 아니하냐 하는 이론에 대하여 도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원동 이갑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정권에 욕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데라우치가 ‘안창호 내각’을 만들겠다는 의향에 그 속마음이 불순하다는 걸 알면서도 정권을 잡고 싶어 최석하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듯 했으나, 안창호는 정권을 받는 날이 일본의 수족이 되는 기밖에 없다는 점을 강력하게 지적했습니다. 안창호는 “우리가 음모로서 음모를 대하고, 아부로서 아부를 항抗한다면 우리 민간 지사라는 것도 결국 이완용, 손병준 배輩와 가릴 것이 없는 무리가 되어버리지 아니하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안창호의 주장에 수긍을 하면서도 최후 일전의 호기를 놓치는 듯한 생각에 매우 아쉬워했습니다. 안창호는 최후의 단안을 내렸습니다. “우리 애국자에게 남은 길이 오직 하나 있다. 그것은 눈물을 머금고 힘을 길러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망국의 비운을 당한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니, 힘이 없어 잃은 것을 힘이 없는 대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내에 있을 수 있는 자는 국내에서, 국내에 있을 수 없는 자는 해외에서 수양, 단결, 교육, 산업으로 민력을 배양하는 것이 조국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말에 “만좌가 느껴 울었다”고 적었습니다.

이리하여 망명할 일이 결정되었습니다. 데라우치에게는 며칠 동안 고려할 여유를 청한 뒤 안창호, 이갑, 이동녕, 이시영, 유동열, 이동휘, 이종호, 신채호, 조성환 등이 망명할 준지를 했습니다. 안창호, 이동녕은 러시아의 연해주, 이동휘는 북간도, 이시영, 최석하는 서간도, 조성환은 북경, 이렇게 각각 해외에 가서 활동할 구역을 분담하고, 국내에 남아있을 사람들로는 서울에 전덕기, 평양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황해도에 김구로 하고, 이종호李鍾浩(1885~1932)는 해외로 나가서 하는 모든 사업의 자본을 대기로 했습니다. 이종호는 1907년에 보성학교普成學校(고려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인 할아버지 이용익李容翊가 죽자 뒤를 이어 보성학교의 제2대 교주가 된 인물입니다. 당시 일제통감부는 학부學部를 통해 보성학교를 관립화 혹은 예속화하려고 학교 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으나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뒤로도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안중근사건安重根事件 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헌병대에 수금되었다가 데라우치의 속셈으로 잠시 풀려났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할아버지가 상해의 덕화은행에 예금해놓은 거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창호가 염두에 두었던 한국의 우방은 중국과 미국이었습니다. 이갑, 이동휘 등은 러시아를 중요시했으나 안창호는 러시아를 위험시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가 과거에 한국에 대하여 군사기지를 강요한 전력이 있거니와, 러시아의 전통적인 태평양 진출책의 기지로 가장 요긴한 목표가 한반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세력이 꺾이는 날이 있다면 그대에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수중에 넣으려 할 자는 바로 러시아라고 안창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창호는 이동휘, 이시영, 조성환을 중국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재미 동포와 미국에 올 유학생과 미국 국민과의 친교를 위해 일하기로 했습니다. 이갑은 그의 지론인 친러, 친독론도 있고 해서 유럽에 머물기로 했으며, 이종호는 상해나 청도靑島(산둥 반도 남쪽에 위치한 항만도시)에 있으면서 재정과 연락을 맡기로 했습니다.

이광수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모양으로 조각회의가 변하여 망명과 국내, 해외 신민회운동, 즉 독립 운동의 부서를 분담하는, 비장하나마 건설적인 회의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안창호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1910년 4월 7일 행주를 출발해 인천을 경유하여 황해도 장연長淵에 이르러 거기서 중국인 소금상선을 타고 청도로 향했고, 그 밖의 동지들도 변장하거나 밀행하여 국경을 탈출 청도에서 안창호와 상봉하기로 했습니다.

안창호의 거국가는 1910년 5월 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소개된 후 국외 동포사회로 급속히 퍼져 만주 및 미주 등지에서 발간된 <애국창가집>에 실려 국내외 민족사립학교에서 애창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거국가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에 반항을 장려한다고 지목해 이를 부르지 못하게 탄압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 가게 하니

간다 한들 영 갈쏘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너와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때도 있을지오

시베리아 만주 들로

다닐 때도 있을지라

나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든지

너를 생각할 터이니

너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때에는

빈주먹만 들고 가나

이후 성공하는 날엔

기를 들고 올 것이니

악풍 폭우 심한 이때

부대부대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이광수는 “이 노래는 진실로 작자의 뼈를 깎아 붓을 삼고, 가슴을 찔러 피로 먹을 삼아서 조국의 강산과 동포에게 보내는 하소연이요 부탁이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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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소한 것에도 자존심이 상할까?

 

 

 

자존심自尊心이란 영어로 pride, self-respect, self-esteem으로 표기하는데 사전적 정의는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면 평소가 갖고 싶어 했던 명품 백을 친구가 들고 나왔을 때에 “얘, 그거 너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하고 추켜세우는 말을 해주는 것이 친구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태도입니다. 속으로 “도대체 그게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그 명품보다 더 값비싼 명품을 사서 그 친구 앞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공격적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자들의 자존심에는 관계가 존재합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사소한 자존심에도 목숨을 겁니다. 남자는 친구를 위해서 여자를 포기하는데 이런 행동에 이면에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넌 자존심도 없냐?” 하고 말하면 거의 모든 남자는 화를 냅니다. 남자의 자존심은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는 여자의 자존심과는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의 자존심이 다른 이유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 자존심의 목적은 관계에 있습니다. 주변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남들의 시선 혹은 남들에게서 인정받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간절해서 스스로를 포기하기조차 합니다. 이에 반해 남자의 자존심은 자신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남자는 자기의 영역에 누군가가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남과 어울리기보다는 홀로 지내는 것이 편합니다. 혼자 서기 위해서 자존심을 세웁니다. 남자를 가장 잘 다루는 방법은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자존심만 지켜주면 의리라는 미명하에 목숨가지 겁니다.

자존심은 성격에 따라 다릅니다. 강박적인 성격의 사람은 사소한 문제에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한번 자존심이 상하면 상대 때문에 또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의 언행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자존심을 챙깁니다. 그래서 강박적인 성격의 사람을 대하게 되면 피곤해집니다. 반대로 의존적인 성격은 자존심을 부리겠다고 매번 마음을 먹으면서도 상대가 조금만 거절의 의중을 드러내면 혹은 그럴까봐 두려워서 자존심을 포기합니다. 그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자존심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불안정한 성격, 예를 들면 경계하는 성격, 연극적 성격, 반사회적 성격, 나르시시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목숨을 거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무모한 행동이라도 합니다. 특히 나르시시즘 성격을 가진 사람의 자존심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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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과 안중근安重根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조약안을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체결 조인했습니다. 이 조약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혹은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라 하는데 칠조七條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사전에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고용할 것.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을 폐지할 것.

 

일본 제국은 조약의 후속조치로 행정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국인 대신 밑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고, 경찰권을 위임하도록 했으며, 경비를 절약한다는 이유로 한국군대를 해산했습니다. 이광수는 한국군대를 해산하기 전부터 일본 제국이 한국에 한국 군대보다도 수배나 되는 일본군을 국내 각지에 수비대라 하여 배치했으며, 헌병과 경찰이 물샐틈없이 경계망을 펴놓았다고 했습니다. “언론기관도 엄중한 검열을 받아서 오직 영국인 베델裵說의 <대한매일신보>와 영문 <서울 프레스>만이 자유로웠다”고 했습니다.

정미칠조약 이후의 상황을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민간 지사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큰 단결도 없고 다른 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개인 개인으로 도끼를 메고 상소를 하거나 순국적 자살을 하는 일이었다. 과연 이러한 일을 하는 이는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의 애국적 도의심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대세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 밖에 할 수 있는 일은 당로 대관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군대 해산에 동의한 군부대신 이병무는 자기 집 침실에서 암살을 당하였다.

 

정미칠조약 이후 안중근安重根(1879~1910)은 국망의 상황에 분노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했습니다.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은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했습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 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을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안중근은 1908년 6월 의병부대를 이끌고 1차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했습니다. 그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의 2차 국내 진공작전은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고 10여 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했습니다.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했는데,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한 그가 지닌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그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샀으며,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온갖 고초 끝에 안중근은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본거지로 귀환하여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했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안중근은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중근은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했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했습니다.

안중근은 10월 26일 새벽 하얼빈 역으로 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햇습니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걷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기다렸던 안중근이 앞으로 뛰어나가며 이토에게 세 발의 총탄을 명중시키자 이토가 쓰러졌습니다. 그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해 세 발을 더 발사했는데,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태에 바졌습니다. 러시아군에 체포될 때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를 연호했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이용하여,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출발에 기여한 계태랑桂太郎(가쓰라 다로, 1848~1913) 일본 수상은, 육군대신이자 군벌의 거두인 테라우치 마사타케를 한국 통감으로, 야마카다 아리모토의 아들 야마카다 이자부로를 부통감으로, 육군 소장 아키라이시 모토지로는 경무총감으로 한국에 파견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아키라이시 모토지로는 서울에 부임한 즉시 한국의 명사들을 초연하여 그들의 의향을 타진하는 한편 다수의 밀정을 놓아 민간 유지들의 행동을 염탐하였다. 그리하여 친일파, 배일파의 명부를 작성하여서 7월 하순경에 벌써 민간 유지의 헌병대 검속이 시작되었으니, 안창호는 개성 헌병대에, 이갑, 이동휘, 유동열 등은 용산 헌병대에 유치되었다. 아키라이시의 판단으로는 서북인, 그 중에서도 군대 출신이요, 안창호 일파라고 지목되는 자를 탄압함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안중근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제는 블라디보스톡 <대동공보>사에서 의거를 모의한 증거를 포착하고 <대동공보>의 주필 이강을 포함한 공립협회 파견 원동위원들이 관여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공립협회의 지도자인 안창호를 안중근의 배후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안창호가 개성 헌병대에 수금되었을 때에는 남녀 학생들이 밤에 헌병대 주위에서 애국가, 안창호가 지은 창가를 불렀고, 혹은 전화로 안창호에게 창가를 불러 들려준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그 해 말 석방되었다가 이듬해 초에 다시 소환되는 등 일제의 요주의 경계 인물로 부각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안창호와 신민회 회원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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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는 일종의 돌연변이입니까?

 

 

 

보통 종양tumor이라 하면 신체 조직의 자율적인 과잉 성장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덩어리를 의미하며, 양성종양benign tumor과 악성종양malignant tumor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양성종양이 비교적 성장 속도가 느리고 전이metastasis되지 않는 데 반해 악성종양은 주위 조직에 침윤하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신체 각 부위에 확산되거나 전이되어 생명을 위협하게 됩니다. 따라서 악성종양을 암과 동일한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체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cell는 정상적으로는 세포 자체의 조절 기능에 의해 분열 및 성장하고, 수명이 다하거나 손상되면 스스로 사멸하여 전반적인 수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이러한 세포 자체의 조절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정상적으로는 사멸해야 할 비정상세포들이 과다 증식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 주위 조직 및 장기에 침입하여 덩어리mass를 형성하고 기존의 구조를 파괴하거나 변형시키는데, 이러한 상태를 암cancer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암이란 단어는 라틴어 캔크룸cancrum에서 온 것으로 원래 게crab라는 뜻입니다. 암세포cancer cells는 게처럼 굴을 잘 파서 다른 조직에 침투합니다. 암세포는 살기등등殺氣騰騰한 망나니 세포입니다. 암세포는 거의 영구적으로 분열하는, 조절능력을 상실한 미치광이 수포세포입니다. 간세포는 간에, 골수세포는 뼈 속에, 손바닥 세포는 손바닥에 자리 잡고 대대로 살아가지만, 피부에 생긴 암세포는 림프관이나 혈관을 타고 폐는 물론이고 뇌에까지도 가며, 큰창자의 암세포는 간으로 가고 간의 것은 위로 가며 ... 한 마디로 천방지축天方地軸입니다. 정상인 조직세포가 어떤 원인으로 무제한 증식하여 그 생체의 생활현상이나 주위의 조직상태 등에 관계없이 급속한 발육을 계속하여 마침내는 생명을 끊게 하는 악성의 신생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세포입니다. 정상세포에 비해 다소 변화되어 있는데, 핵은 염색체가 많고, 핵의 원형질에 대한 비가 크며, 핵소체를 가지고, 자주 핵분열상核分裂像을 나타냅니다. 이를 이형성異型性이라 하며 이형성이 강한 것이 암세포의 특징입니다.

암세포는 다른 세포와는 달리 분열이 쉬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에 양분인 포도당, 아미노산 등을 과소비합니다. 에너지를 많이 얻을 수 있는 완전분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분 섭취를 위해 많은 양을 끊임없이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과소비 세포이며, 일종의 기생세포입니다.

암세포는 일종의 돌연변이mutation이기 때문에 예방이 불가능하고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전환되는 첫 번째 과정은, 세포 속의 핵물질의 하나인 DNA염기의 변화로 돌연변이突然變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 유전자를 활성화시키거나, 정상 유전자DNA를 자르고 들어가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게 됩니다. 염색체의 자리바꿈이나 암 억제유전자의 손실 등도 원인이 되어, 일단 암세포가 되면 이것들은 분열을 시작하고 일정한 잠복기를 거친 다음에 이행, 침투를 시작합니다.

암세포가 생기는 원인 중 첫 번째는 바이러스virus입니다. 바이러스는 가장 작은 미생물로 생세포에 기생하여 증식하는 여과성 병원체입니다. DNA 또는 RNA 중 하나를 유전체로 가지며 감염세포 내에서만 증식하는 감염성 미소구조체입니다. 라틴어로‘독’을 의미하는데 후에 전환하여 병원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암세포가 생기는 원인 중 두 번째는 방사선에 의한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유발되는 것입니다. 주로 골수, 유방, 감상선 등에 암을 일으킵니다. 병원이나 원자력발전소의 방사선 취급자들에게서 이런 암이 발견됩니다.

암세포가 생기는 원인 중 세 번째는 자외선을 많이 받을 경우로 눈동자의 속이 희게 보이는 백내장cataract뿐 아니라 피부암의 제1원인이 됩니다. 백내장白內障은 눈의 수정체가 흐려져서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병을 말합니다.

암세포가 생기는 원인 중 네 번째는 발암물질carcinogen이 DNA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발암물질 대부분이 돌연변이 물질이 됩니다. 암의 70-80%가 화학적 돌연변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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