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내각을 조직하여 일본과 협력케 함이 어떠하냐
이광수는 안창호의 석방에 노력한 사람이 최석하崔錫夏(1866~1929)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동경 명치대학 법과 출신으로 일본어에 능했던 최석하는 “외교적 재능이 있어서 이토 통감시대 이래로 일본측과 교섭하여 오던 경력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데라우치는 최석하에게 “안창호 내각을 조직하여 일본과 협력케 함이 어떠하냐”고 물었고, 이에 최석하는 “자기가 그대로 힘쓸 터이니 각 헌병대에 구금된 안창호 등을 즛기 성박하기를 청했다. 데라우치는 곧 아키라이시 모토지로에게 안창호 등의 석방을 명하였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최석하는 원동 이갑의 집에 도산 등 주요 인물을 모으고 데라우치의 의향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밤이 깊도록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의론이 많았다. 최석하는 일본의 진의가 반드시 한국을 합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 잘하면 일본과 충돌하지 아니하고도 국맥國脈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여, 일본 측의 최초요 최후의 제안인가 싶은, 민간 지사와 손잡자는 의도를 거절할 것이 아니라 하여 도산의 결의를 재촉하고, 이갑은 최석하와는 다른 견지에서 역시 호기물실好機勿失을 주장하였다.”
안창호는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어 일본의 제안에 응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단정적으로 반대하며 그 이유를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데라우치가 통감으로 온 것은 “가장 언정이순言正理順(말이 바르고 사리가 바름)하게, 가장 세계에 비난을 적게 받고 한국 병탄의 목적을 달하자는 것이다. ... 이제 민간 지사에게 정권을 준다는 것은 백성의 원망의 과녁이 된 귀족계급-일본의 허수아비라는 친일파의 속에서 말고, 애국지사라 하여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민간인 정권으로 그 손에서 주권의 양여를 받자는 혼담魂膽(혼백魂魄과 간담肝膽)이니, 우리가 이제 정권을 맏는 것은 그 술책 속에 빠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비록 권모權謀로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정권을 손에 가진 우리가 꿋꿋하게, 강경하게 자주 독립을 견지하여 한사코 항거하면 좋지 아니하냐 하는 이론에 대하여 도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원동 이갑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정권에 욕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데라우치가 ‘안창호 내각’을 만들겠다는 의향에 그 속마음이 불순하다는 걸 알면서도 정권을 잡고 싶어 최석하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듯 했으나, 안창호는 정권을 받는 날이 일본의 수족이 되는 기밖에 없다는 점을 강력하게 지적했습니다. 안창호는 “우리가 음모로서 음모를 대하고, 아부로서 아부를 항抗한다면 우리 민간 지사라는 것도 결국 이완용, 손병준 배輩와 가릴 것이 없는 무리가 되어버리지 아니하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안창호의 주장에 수긍을 하면서도 최후 일전의 호기를 놓치는 듯한 생각에 매우 아쉬워했습니다. 안창호는 최후의 단안을 내렸습니다. “우리 애국자에게 남은 길이 오직 하나 있다. 그것은 눈물을 머금고 힘을 길러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망국의 비운을 당한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니, 힘이 없어 잃은 것을 힘이 없는 대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내에 있을 수 있는 자는 국내에서, 국내에 있을 수 없는 자는 해외에서 수양, 단결, 교육, 산업으로 민력을 배양하는 것이 조국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말에 “만좌가 느껴 울었다”고 적었습니다.
이리하여 망명할 일이 결정되었습니다. 데라우치에게는 며칠 동안 고려할 여유를 청한 뒤 안창호, 이갑, 이동녕, 이시영, 유동열, 이동휘, 이종호, 신채호, 조성환 등이 망명할 준지를 했습니다. 안창호, 이동녕은 러시아의 연해주, 이동휘는 북간도, 이시영, 최석하는 서간도, 조성환은 북경, 이렇게 각각 해외에 가서 활동할 구역을 분담하고, 국내에 남아있을 사람들로는 서울에 전덕기, 평양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황해도에 김구로 하고, 이종호李鍾浩(1885~1932)는 해외로 나가서 하는 모든 사업의 자본을 대기로 했습니다. 이종호는 1907년에 보성학교普成學校(고려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인 할아버지 이용익李容翊가 죽자 뒤를 이어 보성학교의 제2대 교주가 된 인물입니다. 당시 일제통감부는 학부學部를 통해 보성학교를 관립화 혹은 예속화하려고 학교 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으나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뒤로도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안중근사건安重根事件 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헌병대에 수금되었다가 데라우치의 속셈으로 잠시 풀려났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할아버지가 상해의 덕화은행에 예금해놓은 거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창호가 염두에 두었던 한국의 우방은 중국과 미국이었습니다. 이갑, 이동휘 등은 러시아를 중요시했으나 안창호는 러시아를 위험시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가 과거에 한국에 대하여 군사기지를 강요한 전력이 있거니와, 러시아의 전통적인 태평양 진출책의 기지로 가장 요긴한 목표가 한반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세력이 꺾이는 날이 있다면 그대에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수중에 넣으려 할 자는 바로 러시아라고 안창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창호는 이동휘, 이시영, 조성환을 중국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재미 동포와 미국에 올 유학생과 미국 국민과의 친교를 위해 일하기로 했습니다. 이갑은 그의 지론인 친러, 친독론도 있고 해서 유럽에 머물기로 했으며, 이종호는 상해나 청도靑島(산둥 반도 남쪽에 위치한 항만도시)에 있으면서 재정과 연락을 맡기로 했습니다.
이광수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모양으로 조각회의가 변하여 망명과 국내, 해외 신민회운동, 즉 독립 운동의 부서를 분담하는, 비장하나마 건설적인 회의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안창호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1910년 4월 7일 행주를 출발해 인천을 경유하여 황해도 장연長淵에 이르러 거기서 중국인 소금상선을 타고 청도로 향했고, 그 밖의 동지들도 변장하거나 밀행하여 국경을 탈출 청도에서 안창호와 상봉하기로 했습니다.
안창호의 거국가는 1910년 5월 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소개된 후 국외 동포사회로 급속히 퍼져 만주 및 미주 등지에서 발간된 <애국창가집>에 실려 국내외 민족사립학교에서 애창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거국가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에 반항을 장려한다고 지목해 이를 부르지 못하게 탄압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 가게 하니
간다 한들 영 갈쏘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너와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때도 있을지오
시베리아 만주 들로
다닐 때도 있을지라
나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든지
너를 생각할 터이니
너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때에는
빈주먹만 들고 가나
이후 성공하는 날엔
기를 들고 올 것이니
악풍 폭우 심한 이때
부대부대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이광수는 “이 노래는 진실로 작자의 뼈를 깎아 붓을 삼고, 가슴을 찔러 피로 먹을 삼아서 조국의 강산과 동포에게 보내는 하소연이요 부탁이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