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상제와 하느님

 

공자 이전의 중국 고문서에는 상제, 제, 하늘, 천명과 같은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 간에도 다소 차이가 있긴 하나 인간 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신의 본체가 있다는 믿음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 신은 인간을 벗어나 존재하는 본체다.
중국의 선조는 하느님과 천명을 믿었고 고문서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상서』에서는 주재하는 하늘을 제, 상제라 불렀다. 천, 제, 상제는 통용이나 병용할 수 있으며 주재성을 띠는 외재적 본체로 상제, 황천皇天, 황천상제皇天上帝, 호천昊天 등으로도 불린다. 명칭은 다르지만 이들 용어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공자의 11대손으로 중국 전한 무제 때의 학자 공안국孔安國은 “제는 또한 하늘이다”라고 했다. 『월령』3 에서는 “유사에게 명하여 제帝에게 기우제를 지낼 때 성대한 음악을 사용하여 곡식이 풍성하도록 빌게 했다”라고 했고, 정현은 “상제에게 기우제를 지낸다. 하늘의 다른 명칭이자 호천에 속한다. 원구에서 제사를 지내 하늘의 높은 위치를 존중한다”라고 했다.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집해에는 정현의 말을 인용해 “넓은 하늘의 상제를 천황대제라고 부른다.” 또한 “제가 하늘이다”라고 했다. 『중용』에는 “교사4 의 예는 그래서 상제를 섬기고 종묘의 예는 그래서 선조에게 제사 지낸다”라고 한 부분이1 9번이나 나온다.
『시경』에서도 상제의 개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상제가 심히 신령스러우니 스스로 가까이 하지 말지어다, 상제가 심히 신령스
러우니 스스로 병 되게 하지 말지어다(「울류菀柳」).
상제가 위엄으로 세상에 임하여 세상을 살펴보고 백성의 고통을 살폈다(「황의
皇矣」).
후직은 모르는 체하고 상제도 강림하지 않아…… 넓은 하늘의 상제가 나를 도
망치게 했다. 넓은 하늘의 상제는 나를 도와주지 않는구나. 신명을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면 원망과 성을 내지 않을 것이로다(「운한雲漢」).
상제는 황제다(「집경執競」).

이와 같은 사실들로 볼 때 하늘은 외재적 존재자의 특성을 지닌 개념이었으므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사유방식이 성숙해지고 천인합일사상을 체계적으로 형성하면서, 하늘을 경외하는 마음이 서서히 약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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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식 세계질서를 위협하는 “유대인 모략”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저자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세계질서를 두고 벌이는 경쟁입니다. 티비는 이슬람 원리주의 이론과 행동철학을 다듬고 체계화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이집트인 사이드 쿠틉Sayyid Qutb(1906~66)이 저서『유대인과의 전투Our Battle against the Jews』를 통해서 이슬람주의자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모략에 집착하도록 만들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슬람 이데올로기화’와 ‘이슬람 혁명’이론의 주창자인 쿠틉은 오늘날 이집트를 비롯한 무슬림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티비는 쿠틉의 문헌에서 비롯되어 이슬람교에 밴 반유대사상은 한때 범아랍 민족주의가 수용했던 유대인혐오증과 종교색을 띤 기존의 것과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슬람교의 반유대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유대인의 야심이 묻어나도록 날조된 『시온주의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에서 비롯된 사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반미주의와 융합되어 유대인이 뉴욕과 워싱턴에서 세상을 장악하리라는 믿음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주의가 그리는 이슬람세계의 질서는 “세계의 유대인” 을 위협하고 그들로부터 위협받기도 하는 것처럼 비쳐졌다는 것이 티비의 논지입니다.

티비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유대인을 “세계의 원수” 로 규정하는데, 그 기원을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세계질서를 둘러싼 경쟁의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5백만~1천만 명에 이르는 회원 수를 가진 세계 최대, 최고最高의 이슬람주의 단체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s이 1928년에 창설될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도 않은 데다 그와 관련된 분쟁도 벌어지지 않았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교에 대항한 “유대인의 모략” 과 스스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슬람주의식 유대인혐오증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비롯되었으니 그것이 일단락되면 곧 사그라질 것이라는 견해는 어불성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의 이슬람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산 알-반나Hasan al-banna가 영국 식민통치시기인 1928년 '진정한 이슬람 가치의 구현과 확산'을 목표로 수에즈의 이스마일리야에서 설립한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입니다. 티비는 무슬림 형제단의 역사를 감안해볼 때, 정치색을 띤 이슬람교는 중동 분쟁과 관계없이 유대인을 문제 삼아왔지만, 그럼에도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는 팔레스타인・민족주의와 이슬람・보편주의식 반유대사상이 융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슬람주의자가 남긴 역사 문헌에 따르면,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세계적 대전”은 622년 메디나 정치조직체Medina polity가 창설되었을 때부터 개시된 셈입니다. 쿠틉은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초대 “이슬람교 국가” 를 건설했을 때 “유대인들”이 이를 반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이슬람교가 포위되었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슬람주의자들은 이를 약 1400년간이나 지속된 전쟁에서 불거진 “모략” 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아니라 쿠틉과 그의 추종자들이 규정한 “악” 을 처단하는 데 있습니다. 티비는 그것이 반유대주의의 본질이며, 여기에는 공포증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슬람주의가 대량학살 이데올로기로 발전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근대의 반유대사상은 1905년 초,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아랍 기독교인들이 중동에 퍼뜨린 것인데, 그 이후에는 종교와 무관한 아랍・무슬림 민족주의자들에게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전통 이슬람 문화나 종교와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방세계의 작가 및 전문가들이 전통적인 유대공포증과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혼동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의 중심인물들이 수용한) 범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혼용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양대 반유대사상이 종교와 무관한 것과 종교색을 띤 것으로 대별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비티의 주장입니다. 그는 유대공포증은 앙심에, 반유대주의는 대량학살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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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애국가 그리고 김구金九

 

 

 

1919년 6월 28일 내무부장에 취임한 안창호는 업무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인구조사를 행하고 국채를 발행하여 재정을 확보할 것, 인두세를 징수하고 군사에 노력할 것, 구국재정단을 조직할 것과 파리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외교에 힘쓰고, 한인관계사를 조사, 편찬하는 일을 할 것 등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그는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독립국으로서의 역사 정립을 위한 사료편찬에 착수했으며 인성학교를 정비해 공립학교로 출범시키고 정부기관지로써 <독립>을 창간해 언론, 선전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해 독립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안창호는 미주 대한인국민회로부터 2만5천 달러를 가져다가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霞飛路에 정청政廳을 차리고 매일 규칙적으로 정무를 보았습니다. 정청이란 조선시대에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전관銓官이 궁중에서 정사政事를 보던 곳으로 정무政務를 행하는 관청이란 뜻입니다. 거두들이 아직 정청에 다 모이지 않았으므로 소장파 차장들이 총장을 대리했습니다. 최창식이 비서장, 신익희가 내무차장, 윤현진이 재무차장,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가 경무국장 등이었습니다.

김구는 열여덟 살 때에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는 도유사都有司의 하나로 뽑혀 최제우에 이어 2대 교주가 된 최시형崔時亨(1827~98)을 만났습니다. 열아홉 살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했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습니다. 김구는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고 집에서 은신 중 그 해 5월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했습니다. 그는 삼남 일대를 떠돌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동녕, 이준, 전덕기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했습니다. 신민회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한 그는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1911년 1월에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했습니다.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에는 내무총장, 1924년에는 국무총리 대리, 1926년에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게 됩니다.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霞飛路에 소재한 정청政廳에서는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합창했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안창호의 작사지만, 널리 불리어져 국가를 대신하게 되자 안창호는 그것을 자기의 작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애국가를 선생님께서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안창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청이 한 큰 일 가운데 <독립신문獨立新聞> 발행과 민족 운동 거두들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미주 국민회의 송금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은 문제가 없었지만, 거두들의 회합을 성사하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안창호는 사람을 특파하거나 편지를 보내 꾸준히 거두들을 초청했습니다. 7월까지 이동휘를 마지막으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김동삼 등이 한데 모였습니다. 러시아령의 최재형은 오지 않았고, 조금 늦게 박용만이 하와이로부터 왔으며, 이승만이 온 것은 훨씬 후였습니다. 안창호가 거두들이 모이기를 기다린 것은 내각을 개조하고 독립 운동 방략을 결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각을 개조하려고 한 것은 상해에서 발표한 임시정부 외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집정관 총재로 한 명부가 세간에 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창호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고 기타 각원을 한성 정부 제도대로 함으로써 분열을 방지하고자 발의한 것입니다. 그의 안에 다르면 내무총장에 이동녕, 자신은 노동국 총판이었습니다. 안창호의 안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소장파 차장들로 그들은 이승만과 이동휘를 위해 임시정부가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3주일 동안 소장파를 각개로 설복했습니다. 독립 운동 벽두에 전선이 삼분한다면 수치라는 점과 통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불고不顧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의견이 분분하자 거두들이 각기 돌아가겠다고 분개하자 본국으로부터 망명해온 젊은이들은 “여러 선배가 모였다가 독립 운동에 관하여 아무 결말도 못 짓고 흩어진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아니하겠소. 작정 없이는 한 걸음도 상해를 못 떠나리다”하고 거두들을 위협했는데, 그 중심인물들은 한위건, 백남칠 등이었습니다. 청년들의 이런 위협을 안창호가 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거두가 있었으나, 이광수는 안창호가 “그런 방편을 쓰기에는 너무도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안창호의 안은 마침내 받아들여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정부를 개조하여 3정부 연립의 불행을 제거하고 독립 전선 통일에 우선 형식상으로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뿔뿔이 돌아간다는 고집을 버리고 상해에 머무르면서 자주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건 독립 운동 방략을 제정하는 것으로 안창호의 발의가 국무회의에서 채택되어 각 총장과 차장 그리고 기타 민간중요 인물에게 1개원 안에 방략의 사안을 제출하기로 결의한 것은 그 해 9월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지난 19년 동안의 독립 운동이 각 사람 각 지방에서 뿔뿔이 진행되었으므로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있으면 상극, 상쇄하는 불상사까지 얼어난 것을 깊이 반성하여 앞으로는 그런 일이 반복되어 민족이 분열하고 민력을 소모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준비 없는, 계획 없는 운동, 즉 즉흥적 운동”이 우리 민족의 과거의 결점이자 습관이었다면서 기록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잃어버리는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한탄했습니다. 그가 ‘독립 운동사료편찬위원회獨立運動使料編纂委員會’를 만들어 10여 명의 위원들로 하여금 합병 이래의 일본 폭정과 민족 운동의 역사 자료를 편찬하게 한 것은 이런 뜻에서였습니다.

독립 운동 방략의 대강은 임시정부 유지방법, 국내로 향한 운동방법, 재외 동포에 대한 운동방법, 국제 선전방법, 최후의 건국 방략 등이었습니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 관해 안창호는 임시정부 관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습니까? 있습니다. 대한 나라의 과거에는 황제가 하나밖에 없었지만 금일에는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입니다. 여러분이 앉은 자리는 다 옥좌이며, 머리에 쓴 것은 다 면류관이외다. 황제란 무엇입니까? 주권자를 말합니다. 과거의 주권자는 하나뿐이었으나 지금은 여러분이 모두 주권자이외다. 과거에 주권자가 하나뿐이었을 때는 국가의 흥망은 1인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인민 전체에 책임이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모두 여러분의 노복이외다. 그러므로 군주인 인민은 그 노복을 선히 인도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고, 노복인 정부 직원은 군주인 인민을 섬기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정부 직원은 인민의 노복이지만, 결코 인민 각 개인의 노복이 아니요, 인민 전체의 공복입니다. 그러므로 정부 직원은 전체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지만, 개인의 명령에 따라 마당을 쓰는 노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부의 직원을 사우社友나 사복私僕(세도가가 사사로이 부리던 일꾼)을 삼으려 하지 말고 공복을 삼으십시오. 나는 여러 사람이 국무원을 방문하여 사정私情을 논하며 사사私事를 부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크게 불가한 일이니 공사를 맡은 자와는 결코 한담을 마십시오. 오늘부터는 정부 직원이 아들이라도 아들로 알지 말고, 사위라도 사위로 알지 마십시오. 사사로운 일을 위하여 공사를 해함은 큰 죄입니다.

...

나는 단언합니다. 장래에는 모르지만 현재는 이 이상의 내각은 얻기 어렵습니다. 이혼 못할 아내이거든 분이라도 발라놓고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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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삼각근deltoid muscle에 통증이 생길까요?

 

 

어깨 곡선을 만드는 근육인 삼각근deltoid muscle은 위팔을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어깨의 곡선을 만들어주는 대부분이 삼각근입니다. 어깻죽지에 있는 근육으로 복장뼈의 윗부분과 어깨의 끝을 연결하는 빗장뼈clavicle(쇄골)의 바깥부와 견갑골scapula의 배측면에 있는 견갑극肩甲棘과 견봉肩峰으로부터 바깥쪽으로 뻗어 위팔뼈humerus(상완골) 중앙의 외연外緣으로 이어지는 근육입니다. 삼각근의 전측연前側緣에는 가슴의 앞쪽, 위쪽을 광범위하게 덮고 있는 큰 부채꼴 모양의 대흉근pectorialis major(큰가슴근)과의 경계가 되는 대흉근구大胸筋溝가 있습니다. 이 근육은 전부, 중부, 후부에서의 작용이 각기 달라, 중부는 상완을 수평으로 들고, 전부는 전방으로, 후부는 후방으로 잡아당깁니다.

팔을 옆으로 벌릴 때 어깨부위에 통증이 있을 경우 삼각근을 의심해야 합니다. 삼각근으로 인한 통증은 멀리 퍼져나가지 않고 손상부위의 표면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삼각근이 어깨의 다른 근육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다른 어깨의 근육에 무리를 주어 만성적인 어깨통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통증은 오래되었다면 관절선 위치에서 내측 측부 인대에 압통을 유발하는 염증이 있어서 그런 경우이거나 단순히 근막동통증후군myofascial pain syndrome이 오래 지속되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목이 뻐근하고 뒤통수가 당긴다면 근막동통증후군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경부(목) 통증을 유발하는 가장 흔한 원인이며 통증이나 자율신경 증상이 나타납니다. 근막동통증후군은 근육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의 통증 유발점이 갑작스럽게 근육에 스트레스가 가해지거나 근육이 과도하게 긴장될 경우 조직이 손상되고 근육세포 내의 칼슘 농도 조절에 이상이 발생하면서 생기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치료방법은 휴식과 마사지, 온열치료를 하는 것이며, 통증이 심하면 타이레놀 등과 같은 진통제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근막동통증후군의 환자는 해당 근육 부위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통증이 일시적으로 경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증이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가벼운 마사지, 온열치료 등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 호전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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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과학과 종교의 연합

 

분노, 공포, 증오와 같은 파괴적인 감정으로 인해 전 세계적인 커다란 문제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일간신문을 보고 이러한 감정의 파괴적인 힘을 암울하게 상기하는 가운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 감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불안한 감정은 언제나 인간의 조건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이 감정과 씨름해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교와 과학이 힘을 모은다면 이 감정에 대처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과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한 발견

이러한 생각으로 저는 1947년부터 과학자 집단과 지속적인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양자물리학과 우주론에서부터 연민과 파괴적인 감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탐구해왔습니다. 저는 과학적인 발견이 우주론과 같은 지식 분야를 깊이 이해시키는 한편 불교의 설명은 때로 과학자들에게 전공 분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과학뿐 아니라 종교를 위해서도 유익했습니다.

 

 


불교적 가르침의 타당성
불교는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발견한 사실과 측정을 통해 실제 상황이라고 증명한 내용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과학의 기여
일반적으로 말해 과학은 그동안 물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놀라운 수단이었습니다. 과학은 아직 밝혀내야 할 것들이 많지만 현 시대에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내면의 경험에 있어선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깊이 탐색하는 불교
그에 반해 고대 인도의 사상인 불교는 마음의 작용을 깊이 탐구합니다. 수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에서 실험을 시도해왔고, 그들의 지식을 기초로 한 수행의 결과 중대하고도 놀랄 만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자와 불교학자들이 더욱 활발히 논의하고 합동으로 연구한다면 인간의 지식을 넓히는 데 유용할 수 있습니다.

 

행복과 내적 평화의 중요성
인간이 생존하는 데 행복과 내적 평화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과 그들의 아이들의 인생은 불행하고, 대단히 위험하며, 짧아질 공산이 큽니다. 2001년 9월 11일의 비극은 증오에 이끌린 현대 기술과 인간 지능이 엄청난 파괴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했습니다. 물질적인 발전은 분명히 행복과 편안한 생활에 얼마간 기여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더 깊은 단계의 행복을 성취하려면 내적 발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인간 가치에 대한 우리의 기본 감각이 강력하고 새로운 물질적 발전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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