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의 애국가 그리고 김구金九
1919년 6월 28일 내무부장에 취임한 안창호는 업무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인구조사를 행하고 국채를 발행하여 재정을 확보할 것, 인두세를 징수하고 군사에 노력할 것, 구국재정단을 조직할 것과 파리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외교에 힘쓰고, 한인관계사를 조사, 편찬하는 일을 할 것 등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그는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독립국으로서의 역사 정립을 위한 사료편찬에 착수했으며 인성학교를 정비해 공립학교로 출범시키고 정부기관지로써 <독립>을 창간해 언론, 선전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해 독립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안창호는 미주 대한인국민회로부터 2만5천 달러를 가져다가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霞飛路에 정청政廳을 차리고 매일 규칙적으로 정무를 보았습니다. 정청이란 조선시대에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전관銓官이 궁중에서 정사政事를 보던 곳으로 정무政務를 행하는 관청이란 뜻입니다. 거두들이 아직 정청에 다 모이지 않았으므로 소장파 차장들이 총장을 대리했습니다. 최창식이 비서장, 신익희가 내무차장, 윤현진이 재무차장,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가 경무국장 등이었습니다.
김구는 열여덟 살 때에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는 도유사都有司의 하나로 뽑혀 최제우에 이어 2대 교주가 된 최시형崔時亨(1827~98)을 만났습니다. 열아홉 살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했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습니다. 김구는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고 집에서 은신 중 그 해 5월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했습니다. 그는 삼남 일대를 떠돌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동녕, 이준, 전덕기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했습니다. 신민회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한 그는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1911년 1월에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했습니다.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에는 내무총장, 1924년에는 국무총리 대리, 1926년에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게 됩니다.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霞飛路에 소재한 정청政廳에서는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합창했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안창호의 작사지만, 널리 불리어져 국가를 대신하게 되자 안창호는 그것을 자기의 작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애국가를 선생님께서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안창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청이 한 큰 일 가운데 <독립신문獨立新聞> 발행과 민족 운동 거두들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미주 국민회의 송금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은 문제가 없었지만, 거두들의 회합을 성사하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안창호는 사람을 특파하거나 편지를 보내 꾸준히 거두들을 초청했습니다. 7월까지 이동휘를 마지막으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김동삼 등이 한데 모였습니다. 러시아령의 최재형은 오지 않았고, 조금 늦게 박용만이 하와이로부터 왔으며, 이승만이 온 것은 훨씬 후였습니다. 안창호가 거두들이 모이기를 기다린 것은 내각을 개조하고 독립 운동 방략을 결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각을 개조하려고 한 것은 상해에서 발표한 임시정부 외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집정관 총재로 한 명부가 세간에 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창호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고 기타 각원을 한성 정부 제도대로 함으로써 분열을 방지하고자 발의한 것입니다. 그의 안에 다르면 내무총장에 이동녕, 자신은 노동국 총판이었습니다. 안창호의 안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소장파 차장들로 그들은 이승만과 이동휘를 위해 임시정부가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3주일 동안 소장파를 각개로 설복했습니다. 독립 운동 벽두에 전선이 삼분한다면 수치라는 점과 통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불고不顧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의견이 분분하자 거두들이 각기 돌아가겠다고 분개하자 본국으로부터 망명해온 젊은이들은 “여러 선배가 모였다가 독립 운동에 관하여 아무 결말도 못 짓고 흩어진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아니하겠소. 작정 없이는 한 걸음도 상해를 못 떠나리다”하고 거두들을 위협했는데, 그 중심인물들은 한위건, 백남칠 등이었습니다. 청년들의 이런 위협을 안창호가 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거두가 있었으나, 이광수는 안창호가 “그런 방편을 쓰기에는 너무도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안창호의 안은 마침내 받아들여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정부를 개조하여 3정부 연립의 불행을 제거하고 독립 전선 통일에 우선 형식상으로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뿔뿔이 돌아간다는 고집을 버리고 상해에 머무르면서 자주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건 독립 운동 방략을 제정하는 것으로 안창호의 발의가 국무회의에서 채택되어 각 총장과 차장 그리고 기타 민간중요 인물에게 1개원 안에 방략의 사안을 제출하기로 결의한 것은 그 해 9월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지난 19년 동안의 독립 운동이 각 사람 각 지방에서 뿔뿔이 진행되었으므로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있으면 상극, 상쇄하는 불상사까지 얼어난 것을 깊이 반성하여 앞으로는 그런 일이 반복되어 민족이 분열하고 민력을 소모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준비 없는, 계획 없는 운동, 즉 즉흥적 운동”이 우리 민족의 과거의 결점이자 습관이었다면서 기록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잃어버리는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한탄했습니다. 그가 ‘독립 운동사료편찬위원회獨立運動使料編纂委員會’를 만들어 10여 명의 위원들로 하여금 합병 이래의 일본 폭정과 민족 운동의 역사 자료를 편찬하게 한 것은 이런 뜻에서였습니다.
독립 운동 방략의 대강은 임시정부 유지방법, 국내로 향한 운동방법, 재외 동포에 대한 운동방법, 국제 선전방법, 최후의 건국 방략 등이었습니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 관해 안창호는 임시정부 관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습니까? 있습니다. 대한 나라의 과거에는 황제가 하나밖에 없었지만 금일에는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입니다. 여러분이 앉은 자리는 다 옥좌이며, 머리에 쓴 것은 다 면류관이외다. 황제란 무엇입니까? 주권자를 말합니다. 과거의 주권자는 하나뿐이었으나 지금은 여러분이 모두 주권자이외다. 과거에 주권자가 하나뿐이었을 때는 국가의 흥망은 1인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인민 전체에 책임이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모두 여러분의 노복이외다. 그러므로 군주인 인민은 그 노복을 선히 인도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고, 노복인 정부 직원은 군주인 인민을 섬기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정부 직원은 인민의 노복이지만, 결코 인민 각 개인의 노복이 아니요, 인민 전체의 공복입니다. 그러므로 정부 직원은 전체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지만, 개인의 명령에 따라 마당을 쓰는 노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부의 직원을 사우社友나 사복私僕(세도가가 사사로이 부리던 일꾼)을 삼으려 하지 말고 공복을 삼으십시오. 나는 여러 사람이 국무원을 방문하여 사정私情을 논하며 사사私事를 부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크게 불가한 일이니 공사를 맡은 자와는 결코 한담을 마십시오. 오늘부터는 정부 직원이 아들이라도 아들로 알지 말고, 사위라도 사위로 알지 마십시오. 사사로운 일을 위하여 공사를 해함은 큰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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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언합니다. 장래에는 모르지만 현재는 이 이상의 내각은 얻기 어렵습니다. 이혼 못할 아내이거든 분이라도 발라놓고 기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