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제 정치력을 잃어버린 우리 한국이야 어떠하겠소?

 

 

안창호의 독립 운동 방략은 실로 광범위하면서도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국내에서 신민회를 통해 주장했던 내용이었으며, 또한 청도 회의에서도 주장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10년간의 복철을 밟지 말자며 “나가자, 죽자” 대신에 “나갈 준비를 하고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것을 상해에 모인 지도자들이 일체로 동포에게 표시하자는 것이 그의 열망이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도산은 자기의 신념을 자기 개인의 명의로 발표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세월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것을 여러 동지 될 만한 사람들에게 말하여서 그들의 찬동을 구하여 그 동지 전체의 이름으로 발표되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오직 도산의 겸손만이 이유가 아니요, 발표된 남의 의견에 찬동하기를 싫어하는 우리네의 심리를 고려함이었다. 이것은 애국가의 작자가 자기임을 표시 아니 하는 것과 같은 심리에서였다.

 

안창호는 스스로 나서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래서 국무총리 대리도 아니고 내무총장도 아닌 노동국 총판이 된 그는 책상 하나를 차지할 필요도 없어서 야인野人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자유로운 처지를 기뻐했습니다.

1921년에 안창호는 미국 의원단과 회견하라는 임시정부 대표의 사명을 띠고 백영엽과 황진남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북경으로 향했습니다. 백영엽白永燁은 남경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고 중국어에 능통하며 애국심과 정의감이 강해 평소에 안창호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흥사단 단우였던 백영엽은 후에 서간도 방면 동포를 지도할 임무를 안창호에게서 받고 만주에 들어갔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복역했습니다. 출옥 후에는 봉천으로 가서 교회 일을 보았습니다. 황진남黃鎭南은 안창호 친우의 아들로 어려서 북미로 가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통하여 캘리포니아 대학 재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안창호가 상해에 올 때 수원隨員으로 대동했습니다. 안창호가 상해에 있는 동안 통역을 맡아 안창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안창호는 북경 육국반점六國飯店에서 미국 의원단과 회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백영엽의 추억에 의하면 그들 사이에는 이런 담화가 있었습니다.

안창호가 의원 대표단에게

“중국을 보신 감상이 어떠하시오?”

하고 묻자 미 의원단 대표는

“나라는 큰데 거지가 많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안창호는

“그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시오?”

하고 물으니 미 의원들은 의외의 질문에 접했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서로 돌아보다가

“정치가 나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오”

했습니다. 안창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러하오. 정치가 좋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의 정치가 좋지 못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보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우리는 단기 여행자니까. 당신은 중국 혁명 후의 정치가 좋지 못한 이유가 어데 있다고 보시오?”

하고 미 의원은 안창호에게 반문했습니다. 안창호는 대답했습니다.

“혁명 후의 중국 정부와 지사들은 좋은 정치를 하려고 애를 쓰나 밖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소. 중국이 힘 있는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는 나라가 있기 때문이오.”

안창호의 이 말에 미 의원단은 수긍했습니다. 안창호는 다시 입을 열어

“아직 독립 국가인 중국도 이러하거든, 아주 제 정치력을 잃어버린 우리 한국이야 어떠하겠소?”

하니 미 의원단은 책상을 치며

“알았소, 알았소. 아시아를 구할 길이 무엇인지를 알았소, 고맙소.”

하고 안창호와 악수했습니다.

백영엽은 그날의 광경이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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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추 디스크가 무엇입니까?

 

 

 

책상 앞에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목을 앞으로 쭉 내민 자세를 취하기 쉽습니다. 이런 자세를 오래 취하다 보면 목에 긴장을 초래하고 근육을 긴장시켜 일자목 혹은 거북이목이 되기 쉬우며, 나아가 경추 디스크cervical herniated nucleus pulpususdisc(혹은 경추 수핵 탈출증) 위험성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정상적인 목의 곡선은 C자형인데, 목을 앞으로 내민 자세는 차츰 일자목이 되게 합니다. 일자목은 디스크 자체의 충격을 흡수하기 쉽지 않고 경추 디스크를 유발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 예방이 최선입니다. 목은 10kg 이상의 무게가 되는 머리를 받치고 있는 만큼 큰 부하가 걸리게 됩니다. 목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베게는 너무 높지 않게 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에는 가능하면 눈높이에 맞춰 기기를 올려 사용하여 고개를 숙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특히 컴퓨터 작업 시 모니터를 눈높이로 하여 목을 거북이 목처럼 하지 않게 해야 경추 디스크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앉을 때에는 방바닥은 가급적 피하고 등받이 있는 의자에 앉도록 합니다. 의자에 앉을 때에는 다리를 꼬고 앉지 말고 허리를 등받이까지 밀착시켜야 합니다.

평소에 장시간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스트레칭을 하여 목 뒷부분 및 어깨 근육을 풀어주어 만성 통증이 생기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턱을 최대한 위로 당겨준 후 3초간 반대로 턱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숙여 3초 정지 5회 반복합니다. 다음엔 좌우로 스트레칭을 해주는데 통증이 없는 범위까지 목을 왼쪽 오른쪽으로 이완시켜주는 것입니다. 목을 왼쪽으로 돌리고 바로 오른쪽에 돌리는 것이 아니라 3초 머물다 돌려야 합니다. 서서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추 디스크는 경추와 경추 사이에 있는 디스크disc(추간판) 사이로 내부의 수핵이 빠져나와 신경근nerve root이나 척수spinal cord를 누르는 질환입니다. 척수란 척추 내에 위치하는 중추신경의 일부분으로 감각, 운동신경들이 모두 포함합니다. 목에서부터 목척수, 등척수, 허리척수, 엉치척수로 구분되며 엉치뼈Sacrum(혹은 천골)까지 척추의 몸통뼈 뒤를 따라 아래로 내려갑니다.

경추 디스크는 나이가 증가함에 따라 수분이 감소하여 퇴행성 변화를 일으켜서 탄력성이 상실되어 굳어지고 추간판 벽에 균열이 발생하여 내부의 굳어진 수핵이 빠져나와 경추 디스크가 생기기도 하고 외상에 의해 생기기도 합니다. 증상은 뒷목 및 어깨 상부의 통증이 보통이며, 디스크 탈골이 발생한 부위에 따라 어깨와 팔의 통증이나 약화가 발생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척수에 손상을 주어 다리의 힘이 약해지거나 마비가 생기기도 합니다.

치료방법은 초기에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적절히 시행합니다. 환자의 90% 정도는 약물치료나 물리치료로 6개월 내 증상이 호전되지만, 증상의 호전이 없는 경우 신경차단술이나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야 합니다. 수술적 치료 전에 흔히 뼈주사라고 하는 신경차단술을 시행하기도 합니다. 신경차단술은 통증을 유발하는 신경에 주사를 통해 직접 약을 주입하는 방법으로 이는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기보다는 통증완화, 염증완화가 목적입니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할 경우 3개월에 한 번 정도만 시술이 가능합니다. 수술적 치료는 앞으로 목을 절개해서 해당 디스크를 제거하고 뼈를 하나로 유합하는 방법, 인공 디스크를 삽입하는 방법이 있으며, 최근에는 내시경을 이용해 빠져나온 수핵만을 제거하는 내시경 수술방법이 개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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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민족의 운명은 힘으로 결정된다

 

 

 

안창호가 민족의 운명이 힘으로 결정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민족 각 개인의 덕력德力, 지력知力, 체력體力의 총화를 의미했습니다. 그가 급진적인 독립운동가들과 의견을 달리 했던 이유는 정치력이나 경제력이나 병력兵力 같은 것은 개인의 힘의 조직이며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개인이 덕력, 지력, 체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독립을 위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로 보았습니다.

안창호는 자연계의 모든 현상이 힘의 인과관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사人事의 성쇠흥망盛衰興亡도 임의 인과관계이므로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독립을 광복하여 이를 유지하는 것도 민족 각 개인이 힘을 양성하여 이를 조직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자연계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듯이 인류의 역사에도 우연이란 없으므로 우리가 우연으로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회란 힘 있는 자에게는 늘 오는 것이나 힘 없는 자에게는 기회가 소용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우리 스스로 교육하고 수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다음에 오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예비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안창호를 비전론자非戰論者이며 점진론자漸進論者라고 비난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을 이름) 이래로 우리는 언제나 싸우자 싸우자 하였소. 그러나 싸울 힘을 기르는 일은 아니하였소. 그러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싸우자는 소리뿐이요. 싸우는 일이 있을 수 없었소.

 

안창호의 독립관은 각 개인의 힘과 힘의 조직에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각자의 자아혁신을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자기 수련은 우선은 각 개인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 수련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으로 승화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하여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 또한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이 닿는 범위를 위하여 사랑하고 돕고 일하라. 이것이 인생의 바른 길이다.

안창호는 자아 혁신의 기초를 도덕적 개조에 두었습니다. 그는 자아 혁신의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민족성 분석分析, 즉 자아반성이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이 반성해야 할 것으로 허위의 폐습에 젖은 것을 꼽았습니다. 거짓말과 거짓 행실이 민족성의 타락의 원인으로 본 것입니다. 그 두 가지 때문에 나라를 잃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거짓말이 난무하다보니 서로가 서로의 말을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말로는 그러더라마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있나” 등등의 말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억측하게 만들어 단결이 되지 못합니다. 안창호는 민족이 단결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국민 될 자격을 상실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안창호는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갑신정변甲申政變 이래로 만민공도회, 독립협회 등 여러 결사운동이 있었으나 어느 것이고 3년의 명맥을 지탱하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주요 원인이 거짓말로 서로 믿지 못한 데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맹세했습니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국민의 아버지로서의 임금)의 수讐(원수怨讐)는 불공대천不共戴天(한 하늘 아래서는 같이 살 수가 없는 원수)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

 

안창호는 “한인의 말은 믿을 수가 있다” 하고 외국인에게 신뢰받게 되는 날이 우리 민족이 사는 날이라고 확언했습니다. 그가 민족성의 타락에서 발견한 또 다른 병통은 공담공론空談公論이었습니다. 남에 대한 비평이었습니다. 빈말로만 떠들고 실천 실행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남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극언極言을 하기도 했는데, 이조 500년의 역사가 공담공론의 역사였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조 500년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위대한 유산이 적고 오직 갑론을박甲論乙駁과 그로 해서 참무讒誣(참소讒訴와 무고誣告), 탄핵, 비방, 살육殺戮(육살戮殺)의 빈축嚬蹙(남들로부터 받는 비난이나 미움), 산비酸鼻(몹시 슬프고 애통함)할 기록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공담공론에서 나올 필연한 산물이 쟁론爭論과 모해謀害 밖에 없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공론가의 특징은 남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은 숨기고 남에게는 잘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너나 잘 하세요”라고 들을 법한 일입니다. 남은 애써 했더라도 왜 더 잘하지 못했느냐며 그렇게 해서 쓰겠느냐고 나무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잘못은 다 남에게 있고 자신은 흠담이나 하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안창호는 경술국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러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자가 누구요? 그것은 나 자신이요.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내 조국에 조아爪牙(손톱과 어금니)를 박게 하였으며 내가 왜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기를 허용하였소? 그러므로 망국의 책임자는 곧 나 자신이오.

 

안창호는 상해에서 1919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여 동포가 서로 투쟁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되는 것이 ‘아아 나 때문이로구나’ 하고 왜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놈이 죽일 놈이요, 저놈이 죽일 놈이라고만 하고 가만히 앉아 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안창호는 책임을 전가하는 일을 비굴한 자의 소행으로 보았고, 또한 민족을 분열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결함이 거짓과 공론임을 파악한 그는 이런 악습을 제거하기 위해 무실역행務實力行, 즉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을 대책으로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사상의 편린이라고 생각됩니다.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하는 것을 습관이 되게 하면 곧 성性이 되어서 법열法悅, 즉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와 같은 묘미와 쾌감에 마음이 쏠리어 취하다시피 되는 기쁨을 느끼게 되고 밖으로는 만나는 사람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아서 그들의 의지할 바가 될 수 있으므로 지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란 바로 지성의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안창호는 자신을 방문하는 애국의 정열이 있는 성급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하거든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중생의 질고를 어여삐 여기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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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성 간경병fatty cirrhosis이 무엇입니까?

 

 

 

간세포내의 중성지방의 저류에 수반해서 생기는 지방성 간경병fatty cirrhosis은 광범위한 간세포 파괴의 결과로 섬유조직의 증식과 재생성 결절 형성의 특징을 보이며, 2차적으로 간 내 혈관의 변형 및 간 기능의 저하가 초래됩니다. 간경병증은 바이러스에 의한 간염의 악화, 술, 비만, 당뇨병 등으로 인해 발생한 만성 지방간의 악화 등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간의 섬유화는 서서히 진행되어 상당한 경과가 있더라도 간 기능 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각증상이 없습니다. 증상은 온 몸이 나른하고 식욕이 없으며 헛배가 부르며 구역감이 생기고 설사 혹은 변비로 고통을 호소하는 것으로 만성간염의 증세와 매우 유사합니다. 오줌이 진해지고 황달jaundice이 생기기도 합니다. 복수가 차서 개구리의 배처럼 배가 부풀어 오르기도 합니다.

황달은 혈색소(헤모글로빈)와 같이 철분을 포함하고 있는 특수 단백질이 체내에서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황색의 담즙색소(빌리루빈)가 몸에 필요 이상으로 과다하게 쌓여 눈의 횐자위(공막)나 피부, 점막 등에 노랗게 착색되는 것을 말합니다. 빌리루빈은 체내에 들어온 물질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독성 물질이며, 보통은 간에서 해독작용을 거친 후 담즙으로 배설됩니다. 빌리루빈이 체내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다하게 생성되거나, 생성된 빌리루빈이 몸 밖으로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기 때문에 황달이 생기는 것입니다.

황달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소변의 색깔이 짙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혈액으로 넘쳐 나오는 빌리루빈이 소변으로 배설되기 때문이며, 빌리루빈으로 인해 소변이 진한 갈색을 띠게 됩니다. 이후 피부에 색소침착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눈의 횐자위(공막)이 황색으로 변하는 것이 발견됩니다. 가끔 당근이나 오렌지를 많이 섭취하여 손발이 노랗게 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비타민 A의 전구물질인 카로틴carotene이 피부에 침착되어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 경우에 피부는 황색을 띠고, 각막이나 소변 색은 보통 정상이므로 황달과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황달이 발생하면 경우에 따라 대변 색이 연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담즙이 배출되는 통로가 막혀 배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담즙이 대변에 섞여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변에 흰색 물감이나 비지 같은 물질이 섞여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담즙이 전혀 분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입니다. 황달이 생기면 경우에 따라 피부 가려움증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는 빌리루빈 자체가 원인은 아니고 담즙으로 배설되어야 할 어떤 화학물질이 피부의 신경말단을 자극하여 발생한다고 추정되며, 증상 완화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를 시행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황달이 호전되어야 증상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황달이 피로감, 식욕부진, 구역질 등의 증상과 동반 되는 경우는 급성 간염을 의심해야 합니다. 복통, 발열 등과 함께 황달이 나타난다면 염증(담도염)을 의심해볼 수 있으며 전신쇠약, 체중감소와 함께 서서히 황달이 나타나는 경우에는 간이나, 주위 장기에 종양의 발생 가능성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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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누구인가?

 

 

 

안창호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면 과연 몇 사람이 그에 관해서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애국지사, 웅변가, 교육자, 신민회, 청년학우회, 재미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상해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사하신 분, 이 정도가 전부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그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의 사상일 것입니다.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충의용감忠義勇敢을 그의 사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의 사상을 알기에는 자료가 충분치 않습니다.

우선 안창호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한 점의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길준처럼 잠시 친일 행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사람도 있고, 이광수처럼 열심히 안창호를 도와 독립 운동에 이바지하다가 친일로 돌아선 사람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초지일관初志一貫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에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고 살았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60 평생에 누구를 속인 일이 없고, 누구에게라도 야속하게 언행하거나 부정한 행위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안창호입니다. 그를 접한 사람은 모두 그에게서 사랑과 우정을 느꼈습니다. 생전에 그를 원망하거나 비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현인이요 군자였습니다. 그의 인격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몸소 표면에 나서 지도자의 칭호를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발견됩니다. 미국 내 국민회를 설립하고서도 최초의 회장이 되지 않았고, 합병 전 본국에 돌아와 신민회와 청년학우회를 설립하고서도 자신은 이면에서 활동했으며, 대성학교를 설립하고서도 교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상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 언론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그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연설을 많이 하고 친지들과 담화를 많이 했다지만 그의 사상의 편린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더욱이 그의 말이 듣는 이들의 마음에 박혔더라도 기록으로 남지 않아 우리는 그의 사상을 아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의 서간이나 설화를 필기해두는 것이 매우 위험했던 시대였으므로 그의 사상이 글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안창호는 속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대성학교 학생 하나가 그의 결석 이유서에 다른 사람의 도장을 찍고 손가락으로 비벼서 글자의 획을 불분명하게 하여 자신의 도장인 것처럼 속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직원 전체의 반대로 물리치며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성학교는 속이는 학생을 용납할 수 없소. 원컨대 우리나라가 속이는 한, 국민이 용납하지 아니할 날이 오게 하고 싶소.” 그는 그 학생을 출학 처분했습니다.

안창호는 민족의 각원이 서로 믿게 되는 날이 우리나라의 독립이 완성되는 때이며,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 민족의 일언일동一言動을 참이라고 믿게 되는 날이 우리가 세계개조世界改造에 공헌하는 때이며, 세계 각국과 각 민족이 서로 속이지 아니하고 서로 믿게 되는 날이 세계에 참되고 오래 갈 화평이 오는 때라고 말했습니다.

안창호를 만난 사람은 그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생애를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행합일은 참 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은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통해 엄청난 양의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러나 실행이 따르지 않으면 그 지식은 사회에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책에 있는 지식이 실체의 그림자라면 안창호의 지식은 실체 그 자체였습니다. 행동하는 지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식인이 그의 말을 들으면 그들도 책에서 학교에서 이미 배운 것에 불과하지만, 마치 금시초문今時初聞인 듯한 인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의 말에는 행동이 뒤따르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굳은 신념과 결심을 하게 디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행동에 나서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지성으로 터득한 지식을 지성으로 설복하는 곳에 그의 웅변이 있었고 감화력이 있었습니다.

현인으로서 그리고 군자로서의 안창호의 인격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와 30년 혹은 40년을 함께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그가 성낸 기색을 보았거나 크게 웃거나 근심에 잠긴 것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품성이나 지식, 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수양修養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안창호는 수양의 규범이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신병이나 피로로 심신이 여상如常(한결같음)치 못함을 자각할 때에는 사람 대하기를 피하였고, 부득이 접견하도라도 한훤寒喧(춥고 더움을 말하여 서로 인사함) 한담뿐이지 책임 있는 말을 아니하였다. 그는 연설을 하거나 회의에 임석하거나 의견을 토로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자기 의견에 스스로 반대도 하여보고 찬성도 하여보고 또 보첨補添(깁고 덧붙임)도 절충도 하여보아서 그야말로 천사만려千思萬慮(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걱정함), 좌사우탁左思右度(왼편에서 생각하고 오른편에서 미루어 생각함)으로 그 이상 더할 수 없다는 신념에 도달하기 전에는 발언치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한번 발언된 그의 의견은 아무리 여러 사람이 여러 각도로 반대하더라도 그에게는 언제나 예비한 답변이 있어서 그로 하여금 논적論敵(논쟁이나 논전의 적수)의 미움을 받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의 도덕적 검속檢束에 있어서도 그는 독창적이었다. 그는 성경을 읽었고 유교 경전도 읽어 어디서나 그의 양식을 구하였지마는 어느 한 곳에 기울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무슨 도덕률이든지 자기의 양심과 이성의 비판을 거쳐서 자기의 도덕률에 편입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기록이 넉넉지 않아 안창호의 사상을 모두 알 길은 없더라도 부분적으로는 그가 한 말에서 발견할 수 있고, 이광수가 전하는 대로 혹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스스로도 더 이상 나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 그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늘 최선을 다해 말했습니다. 듣는 사람이 감동한 데는 그런 성실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오랫동안 활동한 이광수의 증언을 통해서 다행하게도 그의 인간됨 혹은 인격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인격의 품위가 어느 정도까지 고양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그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광수의 안창호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이 고행 수련의 결과임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그는 의복, 식사, 거처에 모두 자율적인 규구規矩(지름이나 선의 거리를 재는 도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집하는, 이른바 도덕가의 교주고슬膠柱鼓瑟(비파나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놓으면 음조를 바꾸지 못하여 한 가지 소리밖에 내지 못하듯이,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전혀 없거나 규칙에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도덕이 인생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인생이 도덕을 위하여 있지 아니하다는 것과, 도덕이란 결코 별다른 일이 아니라 개인으로서는 인성人性, 즉 생리적, 심리적 자연에 합하고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는 그 공동체의 약속과 복리에 위반됨이 없다는 것이라고 믿었다. 동시에 그는 도덕이 예의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예의는 각 개인의 반복실행反復實行에 의하는 습관형성력習慣形成力이 아니면 자리 잡힐 수 없는 줄을 알았다. 그는 사람이 도덕으로 행동을 검속檢束함은 사람이 기예技藝를 습득함과 마찬가지어서 학습하는 동안의 괴로움이 있으나 습득된 뒤엔 평안함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일상생활로 하여금 예의 형성의 수련을 쌓았다. 예를 들면 그는 행주좌와行住坐臥(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이 네 가지 동작을 불교에서는 사위의四威儀라 하여 각각 지켜야 할 규칙이나 제약이 정해져 있음을 뜻하며, 평소平素를 이릅니다)에 몸을 단정히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앉을 때에 허리를 굽히지 아니하고 설 때에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아니하고 걸으을 걸을 때에도 팔다리를 일률一律맞춰 놀리고 고개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생리학적으로 좋을뿐더러 심리학적으로도 섭심정심攝心正心(마음을 가다듬어 흩어지지 않게 하고 마음을 곧고 바르게 가짐)의 공효가 있다고 그는 말하였다. 단좌端坐(단정하게 앉음)를 공부하여본 이는 경험이 있으려니와 단좌와 정보正步(바른 걸음)가 함 안 드는 습관이 되기에는 상당한 고행과 세월을 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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