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제 정치력을 잃어버린 우리 한국이야 어떠하겠소?
안창호의 독립 운동 방략은 실로 광범위하면서도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국내에서 신민회를 통해 주장했던 내용이었으며, 또한 청도 회의에서도 주장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10년간의 복철을 밟지 말자며 “나가자, 죽자” 대신에 “나갈 준비를 하고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것을 상해에 모인 지도자들이 일체로 동포에게 표시하자는 것이 그의 열망이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도산은 자기의 신념을 자기 개인의 명의로 발표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세월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것을 여러 동지 될 만한 사람들에게 말하여서 그들의 찬동을 구하여 그 동지 전체의 이름으로 발표되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오직 도산의 겸손만이 이유가 아니요, 발표된 남의 의견에 찬동하기를 싫어하는 우리네의 심리를 고려함이었다. 이것은 애국가의 작자가 자기임을 표시 아니 하는 것과 같은 심리에서였다.
안창호는 스스로 나서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래서 국무총리 대리도 아니고 내무총장도 아닌 노동국 총판이 된 그는 책상 하나를 차지할 필요도 없어서 야인野人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자유로운 처지를 기뻐했습니다.
1921년에 안창호는 미국 의원단과 회견하라는 임시정부 대표의 사명을 띠고 백영엽과 황진남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북경으로 향했습니다. 백영엽白永燁은 남경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고 중국어에 능통하며 애국심과 정의감이 강해 평소에 안창호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흥사단 단우였던 백영엽은 후에 서간도 방면 동포를 지도할 임무를 안창호에게서 받고 만주에 들어갔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복역했습니다. 출옥 후에는 봉천으로 가서 교회 일을 보았습니다. 황진남黃鎭南은 안창호 친우의 아들로 어려서 북미로 가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통하여 캘리포니아 대학 재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안창호가 상해에 올 때 수원隨員으로 대동했습니다. 안창호가 상해에 있는 동안 통역을 맡아 안창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안창호는 북경 육국반점六國飯店에서 미국 의원단과 회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백영엽의 추억에 의하면 그들 사이에는 이런 담화가 있었습니다.
안창호가 의원 대표단에게
“중국을 보신 감상이 어떠하시오?”
하고 묻자 미 의원단 대표는
“나라는 큰데 거지가 많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안창호는
“그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시오?”
하고 물으니 미 의원들은 의외의 질문에 접했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서로 돌아보다가
“정치가 나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오”
했습니다. 안창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러하오. 정치가 좋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의 정치가 좋지 못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보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우리는 단기 여행자니까. 당신은 중국 혁명 후의 정치가 좋지 못한 이유가 어데 있다고 보시오?”
하고 미 의원은 안창호에게 반문했습니다. 안창호는 대답했습니다.
“혁명 후의 중국 정부와 지사들은 좋은 정치를 하려고 애를 쓰나 밖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소. 중국이 힘 있는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는 나라가 있기 때문이오.”
안창호의 이 말에 미 의원단은 수긍했습니다. 안창호는 다시 입을 열어
“아직 독립 국가인 중국도 이러하거든, 아주 제 정치력을 잃어버린 우리 한국이야 어떠하겠소?”
하니 미 의원단은 책상을 치며
“알았소, 알았소. 아시아를 구할 길이 무엇인지를 알았소, 고맙소.”
하고 안창호와 악수했습니다.
백영엽은 그날의 광경이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하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