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민족유일당운동에 앞장서다
1927년 12월 20일에 연희전문 축구단이 원정경기를 위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민족에 대한 의무를 완수한다”는 요지의 훈화했는데, 이는 대공주의大公主義의 요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대공주의는 이념 대결이 치열해지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선 모든 것을 내버리자는 뜻에서 그 해에 안창호가 제창한 것입니다. 그의 대공주의는 사회전반의 공익을 우선으로 하고 독립 운동 단체들에 분열을 초래한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하여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 수립의 전도를 제시했습니다. 또한 대일본에 대해 비타협적 항일투쟁의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내부에서는 민족간의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우선의 통일주의를 주창하여 좌우익 양쪽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도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안창호는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 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으로 민족 내부의 전선통일을 꾀하며 분주했습니다. 1920년대 초 만주에 산재해있던 독립 운동 단체들은 효율적인 항일 독립 운동의 수행을 위해 통합의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부분적인 통합을 이뤘는데, 1922년 8월 환인현桓仁縣에서 군정서軍政署 등 일곱 개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주도 세력 간의 분열로 일부 세력들이 이듬해에 분리되면서 의군부義軍府와 참의부參議府를 각각 조직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주에 있는 독립 운동 단체들 간의 통합 운동은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1925년 대한통의부, 대한독립단 등이 중심이 되어 발족된 정의부正義府와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이 통합된 신민부新民府가 그것입니다. 이로써 삼부, 즉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이들 단체들은 일제의 세력이 강한 북간도를 제외한 전체 만주의 교포사회를 삼분하여 통치한 사실상의 정부였습니다. 그 후 한걸음 더 나아가 삼부를 포함, 좌우익의 민족 독립 운동을 합작하여 단일 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곧 민족유일당운동입니다.
1926년 10월 가장 먼저 북경에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가 창립되었고, 같은 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로 개칭했습니다. 그 후 중국 지역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계속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5월 한국유일독립당 광둥촉성회, 9월 한국유일독립당 난징촉성회 등이 창립되었습니다.
만주 지역에서는 정의부가 1927년 4월 재만在滿 독립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길림성 신안둔新安屯에서 제1회 대표자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는 정의부, 정의부 군대측軍隊側, 남만주청년총동맹,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등의 대표단 및 안창호, 이일세李一世 등 52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첫날부터 난항을 거듭했습니다. 각 단체 대표가 모인 회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회의는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참석자들은 이대로 끝낼 수 없다 하여 다시 모임을 갖고, 민족유일당운동 조직 준비기구로서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민족유일당운동 과정에서 조직 방법론은 세 가지, 즉 단체본위조직론團體本位組織論, 단체중심조직론團體中心組織論,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이 제시되었습니다. 조직 방법을 둘러싼 이 같은 의견 대립은 유일당조직의 큰 장애였습니다. 그렇지만 민족독립 운동전선의 통일은 전민족의 염원이었으므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1927년 8월 정의부는 제4회 중앙회의를 열고 신민부와 참의부의 연합을 도모하고, 유일당 조직을 조속히 결성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다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민족유일당운동의 촉진에 대한 결의는 1927년 10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 1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연합회促成會聯合會 등의 모임이 결성되어, 민족유일당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결의를 다져나갔습니다.
1928년 5월 전민족 유일당 회의가 좌·우파 18개 단체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길림성에서 개최되었는데, 유일당의 조직 방법 문제를 둘러싸고 단체본위 혹은 단체중심조직론을 주장하는 협의회 측과 개인본위론을 주장하는 촉성회 측으로 나뉘어져 서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양자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분열하여 서로 다른 장소에서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협의회와 촉성회로 분열되었지만, 협의회 측의 중심단체인 정의부는 1928년 7월 참의부와 신민부에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삼부통일회의의 개최를 제의했습니다. 회의는 같은 해 9월 정의부 대표 김동삼金東三 등 5명, 신민부 대표 김좌진金佐鎭 등 7명, 참의부 대표 심용준沈龍俊 등 3명이 참석한 가운데 길림성 신안둔에서 열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상호간 통합 방법에 따른 현격한 견해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정의부가 단체중심조직론을 제시한 반면, 신민부와 참의부는 삼부를 완전 해체하고 새로이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신민부 내 양대 세력인 민정파民政派와 군정파軍政派 간의 알력으로 인해 회의에 참석한 신민부 대표의 대표권에 이의가 제기됨에 따라 회의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표권 문제로 인해 신민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임시정부가 독립 운동 전체를 통괄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기된 것으로서, 당시 독립 운동에 있어 최대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지방색과 파벌, 방법론적 대립, 사상 대립을 극복하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좌·우단체가 통합을 모색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의는 있다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