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 12월 테제 그리고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일본 제국이 중국을 노골적으로 침략하자 안창호는 일제에 대항하는 한, 중공동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 침략의 첨병으로 오해되어 무자비하게 구축당하는 동포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창호는 1928년 5월 중국 신문 <세계신문>과 <중앙일보>에 ‘중국혁명동지에게 고한다’는 논설을 게재해 한, 중 양 민족의 합작을 제의한 적이 있습니다.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도 중국계 신문에 한국의 혁명방략을 소개하면서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 행동을 파괴해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극단의 수단까지 써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렇게 중국과 연합해 대일항전의 역량을 배가시키고자 노력했으나 국제적 정세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코민테른 12월 테제가 작성되어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코민테른 12월 테제란, 1928년 7~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차 대회의 결정서 <식민지·반식민지국가에서의 혁명운동에 대하여>에 기초한 것으로, 정식명칭은 <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입니다.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이 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로서 약칭하여 12월 테제라고도 합니다. 그 내용에는 조선공산당은 종전과 같은 인텔리 중심의 조직방법을 버리고, 공장, 농촌으로 파고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야 하며, 민족개량주의자들을 근로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전의 코민테른이 주창한 ‘민족주의 세력과 협동해야 한다’는 방침과는 달리 좌편향적이었는데, 식민지국가에서의 민족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코민테른이 식민지 국가에서의 민족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기 때문인데, 코민테른에서는 ‘식민지 민족 부르주아는 제국주의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취할 수 없고, 혁명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 사이를 동요하다가 결국 반혁명진영으로 옮아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12월 테제가 민족 부르주아지와 유기적 관계 유지 방향에서 좌파 중심의 협동전선론으로 혁명 전략을 전환했으므로 좌파가 중심이 된 협동전선체 결성 움직임과 헤게모니 전취론이라는 전술의 등장이 좌우익 통합이라는 민족적 명분을 압도해버리면서 그간 어렵게 좌우통합의 기반을 마련하고 서로 접근해갔던 독립 운동계는 혼돈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민족적 입장에서 유일당운동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세력의 이탈이 시작되었으며 1929년 10월 26일 좌파세력들에 의해 1927년에 설립된 한국유일독립당韓國唯一獨立黨 상해촉성회上海促成會는 해체되었습니다.

일제의 적극적인 무력탄압정책과 독립운동단체의 분열로 독립 운동이 크게 약화되자 1926년 7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존립과 각 단체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연설회가 개최되었을 때 안창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반대하고 주의, 주장을 초월한 일대혁명당一大革命黨을 결성한 뒤 독립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뒤 10월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가 조직되었고, 국내에서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습니다.

1927년 3월 조직된 상해한인청년회가 유일독립당 결성을 촉구하자 이에 임시정부의 국무령 홍진이 사임하고 재야에서 촉성회발기 운동을 전개하자, 공산계에서도 동조하여 홍남표洪南杓 등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결과 4월 10일 홍진, 홍남표의 이름으로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이 발표되고, 이튿날 창립총회에서 강령을 채택하고 집행위원 홍진, 홍남표, 이동녕 등 24명이 선출되었습니다. 그 후 공산계, 비공산계 양파의 분리로 어려움을 겪다가 1927년 9월 북경촉성회로부터 상해에서 각지 촉성회의 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제의를 받고 이에 집행위원을 15명으로 줄이고 연석회의 출석대표로 홍진, 홍남표, 이동녕, 김두봉, 조소앙 등을 선발, 파견했습니다. 9월 30일 예정된 연석회의는 각지 대표의 미도착, 민족, 공산의 양분된 주장 등으로 연기되다가, 11월 22일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러나 12월 테제가 결성되면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는 1929년 10월에 해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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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반 골절pelvic fracture이 무엇입니까?

 

 

두 개의 관골hip bone(볼기뼈)와 천골sacrum(엉치뼈) 및 미골coccyx(꼬리뼈)로 구성된 골반pelvis은 척추에서 전달되어 내려오는 체중이 천골을 거쳐 양측 관골 부위에 전달되면서 체중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관절hip joint(엉덩관절)에서 양쪽 다리와 연결되어 걷기와 달리기 등의 신체동작이 가능하게 합니다. 또한 골반 안에는 내장과 방광, 여성의 경우에는 자궁과 난소 등의 중요한 장기가 위치하는데, 골반은 이런 장기가 담길 공간을 마련해주고,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손상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해줍니다.

교통사고, 추락사고, 낙반사고와 같은 강력한 외부의 힘에 의해 골반 골절pelvic fracture이 발생할 수 있는데 다른 부위의 골절이나 연부조직의 손상 및 방광과 요도 등 골반강 안의 주요기관의 손상이 동반되기 쉽습니다. 골절 부위 자체의 출혈도 많지만 주위의 크고 작은 혈관들이 손상되어 더욱 많은 출혈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다른 질환에 걸릴 확률도 높고, 부러진 뼈 조각을 맞추어 고정하는 것도 힘들며, 골반고리의 안정과 회복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치료 후에도 심한 후유증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외력 골절은 노년층에서의 낙상 또는 골 성장이 끝나지 않은 청소년기의 골 성장 부위가 당기는 힘에 의하여 골절된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골반고리를 구성하는 각각의 뼈의 골절은 있지만 골반고리의 안정은 유지됩니다. 큰 외력 골절은 교통사고나 낙반사고, 추락사고와 같은 커다란 외력에 의한 손상으로, 골반환의 두 군데 이상이 골절되어 안정을 잃을 뿐 아니라 주위의 연부조직과 내부 장기의 심각한 손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증세는 골절 부위의 동통과 부어오름, 압통 등의 국소적인 증세가 나타납니다. 골반고리의 손상이 없는 골절이나 골반고리의 손상은 있으나 금만 가 있는 골절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침상에서의 안정 등 보존적 치료가 가능합니다. 골절의 전위轉位가 심할 때는 골반 및 다리가 변형됩니다. 골절이 심한 경우에는 해면질골spongy bone로 구성되어 있는 골절 면에서 다량의 출혈과 골반강 내의 출혈이 함께 일어나 출혈성 쇼크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골반고리에 손상이 있고 뼈가 어긋난 경우에는 우선 보존적인 방법으로 뼈를 맞추는데, 뼈가 잘 맞지 않아 심각한 다리 길이의 차이 및 하지의 운동제한 등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수술을 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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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질적인 관심사: 자세와 위치


 

 


우리 자신에게 맞는 명상법을 찾다 보면 갖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런 문제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자세와 위치
우리가 눕거나 앉아서, 서 있거나 걸으면서 명상할 수 있는 네 가지 기본 위치가 있다. 네 위치 모두 각각의 장점이 있다. 이 장에서는 각각의 사례를 살펴본다.
명상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형적인 앉은 자세를 떠올린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앉는 자세가 또렷하고 고요한 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눕는다면 너무 긴장이 풀리거나 심지어 잠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서 있거나 걸으면 마음이 지나치게 산만해지거나 평온한 마음을 갖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좌법은 명상의 핵심인 평온하고 개방적이고 받아들이는 의식을 불러오는 데 도움이 된다.
동양에서는 양발을 반대쪽 허벅지에 놓는 가부좌가 전통적인 명상 위치다. 가부좌를 완전히 익히면 쉽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지만, 서양인에게 이 자세는 보통 고통스럽다. 절충안으로 한쪽 발만 반대쪽 허벅지에 놓는 반가부좌도 있다. 하지만 어렵긴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보통 의자에 앉기 때문에 책상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는 경우는 드물다. 방석 위에 책상다리로 앉거나 의자에 똑바로 앉아도 좋다. 기민한 고요함을 나타내는 자세를 취해보자. 허리를 곧추세우되 뻣뻣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은 편한 자세를 취한다. 척추의 자연스러운 만곡을 무시하고 척추뼈(추체椎體)를 일자로 펴려고 하면 너무 긴장되고 힘들어진다. 의자에 앉았다면 양발로 바닥을 짚어 안정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본래, 규칙이란 없다. 나의 경우에는 방석 위에 앉는 게 편해서 의자에 앉을 때조차 자연스럽게 양반다리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명상을 하는 동안에 편안하게 유지할 수 있고, 여유롭고 깨어 있는 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세를 찾기만 하면 된다.

마음챙김의 네 가지 토대에 대한 경전인 『사념처경四念處經』에서는 명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명상가]는 숲으로 들어가 나무 아래나 빈방에서 결가부좌를 틀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그 자신 앞에서 마음챙김을 설정한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면서 숨을 들이쉼을 알고 있다. 숨을 내쉬면서 숨을 내쉼을 알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보면 조용한 장소, 아무도 없는 곳, 아니면 적어도 방해받지 않는 곳이 명상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조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마라. 네팔의 제일 외딴 산속 동굴이라도 바람 부는 소리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완벽하게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 소리와 구급차의 사이렌이 들리는 도시에서 살거나, 수탉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시골에서 산다고 해도 그냥 내버려두고 주변 환경의 자연스러운 요인들과 다투지 마라. 대신에 주변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에 여러분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
아침에는 보통 마음이 상쾌하고 명료해서 몸과 마음이 지치는 오후 시간보다 훨씬 쉽게 집중할 수 있다. 아침에 너무 졸린다면 차나 커피를 마시면 잠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수행할 때 차를 마셨기 때문에 이를 ‘선禪의 맛’이라고 한다. 녹차나 커피를 마실 때에는 호흡을 의식하고 한 모금 한 모금 마음을 챙겨 마셔야 한다. 그러면 명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늦은 오후는 다른 이유에서 명상을 즐기기에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피곤해서 집중력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날의 걱정을 털어버리고 수면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는 낮 동안 생각하고 일하던 모든 걸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시간이다.

 

명상은 얼마나 오래 해야 하나?
누군가가 명상을 배우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을 열고 마음을 챙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의심할 것이다. 명상이 기본이다. 명상은 우리의 삶에서 마음챙김을 배우고 행복해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명상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바쁜 일상에서 어떻게 마음을 챙길 수 있을까? 명상을 통해서 마음챙김의 토대를 확립하지 않는다면 마음을 챙길 수 없다. 그러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처음 명상을 하는 사람은 2시간 동안 죽을 맛으로 명상하기보다는 5분 동안 기분 좋게 명상을 즐기는 편이 훨씬 낫다.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몇 시간씩 고된 명상을 한다. 그런 식으로 명상을 해서 깨우침을 얻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거기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6개월도 못 견디고 명상을 그만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그렇게 힘들지 않다면 우선 15분 정도 명상을 하면서 점차 시간을 늘려가라. 이 정도의 시간이면 정신적, 신체적 활동을 진정시키는 데 충분하다. 오랫동안 명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명상 수행을 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5분이 너무 힘들다면 5분이나 10분으로 시작하라. 명상을 우리에게 맞게 그리고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즐겁게 해야 한다. 명상은 경합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깨우침이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명상을 오래 하는 건 아니다. 시간이 문제라면 닭이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깨우침이 높은 존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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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내면의 평화에 대한 실험, 비불교신자들과 결과물 공유하기

 

 

 

내면의 평화에 대한 실험

일부 수행자들이 혼란스런 환경에서도 내적 평화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은 이미 수행되었습니다. 실험 결과 사람들은 더 행복하고, 파괴적인 감정에 덜 민감하며,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더 공감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수행의 방식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돈이 들지 않습니다. 무엇을 사거나 공장에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약이나 주사가 필요 없습니다.

 

비불교신자들과 결과물 공유하기

다음의 문제는 이러한 유익한 결과를 비불교신자들과 어떻게 공유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나 여타 종교의 전통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의 잠재력을 분명히 알아보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부자이건 빈자이건, 배운 자이건 배우지 못한 자이건 평화롭고 의미 있는 인생을 이끌어갈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방법을 반드시 탐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탐구의 과정에서 가장 큰 불안은 외적 원인이 아닌 불안한 감정과 같은 내적인 사건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이러한 동요의 원천을 잠식시킬 최고의 안정제는 이러한 감정을 다루는 우리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수단과 방법을 제공하는 인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방법이 중요한 이유
영적 방법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이 방법을 영적 성향이 강하지 않은 대중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 방법은 최대의 효과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 방법이 중요한 이유는 과학적, 기술적, 물질적 발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적 가치와 연민, 용서, 자족, 자기절제와 같은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결합하여 함께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매사추세츠 주, 서머빌 소재 위즈덤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1999년,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가 출간한 『새로운 인식의 눈을 뜨기Opening the Eye of New Awareness』를 재출간했으며, 14대 달라이 라마의 공식 웹사이트에 실린 메시지 『과학과 종교의 공조A Collaboration between Science and Religion』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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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민족유일당운동에 앞장서다

 

 

1927년 12월 20일에 연희전문 축구단이 원정경기를 위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민족에 대한 의무를 완수한다”는 요지의 훈화했는데, 이는 대공주의大公主義의 요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대공주의는 이념 대결이 치열해지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선 모든 것을 내버리자는 뜻에서 그 해에 안창호가 제창한 것입니다. 그의 대공주의는 사회전반의 공익을 우선으로 하고 독립 운동 단체들에 분열을 초래한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하여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 수립의 전도를 제시했습니다. 또한 대일본에 대해 비타협적 항일투쟁의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내부에서는 민족간의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우선의 통일주의를 주창하여 좌우익 양쪽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도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안창호는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 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으로 민족 내부의 전선통일을 꾀하며 분주했습니다. 1920년대 초 만주에 산재해있던 독립 운동 단체들은 효율적인 항일 독립 운동의 수행을 위해 통합의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부분적인 통합을 이뤘는데, 1922년 8월 환인현桓仁縣에서 군정서軍政署 등 일곱 개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주도 세력 간의 분열로 일부 세력들이 이듬해에 분리되면서 의군부義軍府와 참의부參議府를 각각 조직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주에 있는 독립 운동 단체들 간의 통합 운동은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1925년 대한통의부, 대한독립단 등이 중심이 되어 발족된 정의부正義府와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이 통합된 신민부新民府가 그것입니다. 이로써 삼부, 즉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이들 단체들은 일제의 세력이 강한 북간도를 제외한 전체 만주의 교포사회를 삼분하여 통치한 사실상의 정부였습니다. 그 후 한걸음 더 나아가 삼부를 포함, 좌우익의 민족 독립 운동을 합작하여 단일 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곧 민족유일당운동입니다.

1926년 10월 가장 먼저 북경에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가 창립되었고, 같은 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로 개칭했습니다. 그 후 중국 지역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계속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5월 한국유일독립당 광둥촉성회, 9월 한국유일독립당 난징촉성회 등이 창립되었습니다.

만주 지역에서는 정의부가 1927년 4월 재만在滿 독립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길림성 신안둔新安屯에서 제1회 대표자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는 정의부, 정의부 군대측軍隊側, 남만주청년총동맹,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등의 대표단 및 안창호, 이일세李一世 등 52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첫날부터 난항을 거듭했습니다. 각 단체 대표가 모인 회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회의는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참석자들은 이대로 끝낼 수 없다 하여 다시 모임을 갖고, 민족유일당운동 조직 준비기구로서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민족유일당운동 과정에서 조직 방법론은 세 가지, 즉 단체본위조직론團體本位組織論, 단체중심조직론團體中心組織論,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이 제시되었습니다. 조직 방법을 둘러싼 이 같은 의견 대립은 유일당조직의 큰 장애였습니다. 그렇지만 민족독립 운동전선의 통일은 전민족의 염원이었으므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1927년 8월 정의부는 제4회 중앙회의를 열고 신민부와 참의부의 연합을 도모하고, 유일당 조직을 조속히 결성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다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민족유일당운동의 촉진에 대한 결의는 1927년 10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 1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연합회促成會聯合會 등의 모임이 결성되어, 민족유일당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결의를 다져나갔습니다.

1928년 5월 전민족 유일당 회의가 좌·우파 18개 단체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길림성에서 개최되었는데, 유일당의 조직 방법 문제를 둘러싸고 단체본위 혹은 단체중심조직론을 주장하는 협의회 측과 개인본위론을 주장하는 촉성회 측으로 나뉘어져 서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양자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분열하여 서로 다른 장소에서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협의회와 촉성회로 분열되었지만, 협의회 측의 중심단체인 정의부는 1928년 7월 참의부와 신민부에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삼부통일회의의 개최를 제의했습니다. 회의는 같은 해 9월 정의부 대표 김동삼金東三 등 5명, 신민부 대표 김좌진金佐鎭 등 7명, 참의부 대표 심용준沈龍俊 등 3명이 참석한 가운데 길림성 신안둔에서 열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상호간 통합 방법에 따른 현격한 견해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정의부가 단체중심조직론을 제시한 반면, 신민부와 참의부는 삼부를 완전 해체하고 새로이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신민부 내 양대 세력인 민정파民政派와 군정파軍政派 간의 알력으로 인해 회의에 참석한 신민부 대표의 대표권에 이의가 제기됨에 따라 회의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표권 문제로 인해 신민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임시정부가 독립 운동 전체를 통괄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기된 것으로서, 당시 독립 운동에 있어 최대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지방색과 파벌, 방법론적 대립, 사상 대립을 극복하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좌·우단체가 통합을 모색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의는 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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