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키슬러에 관한 모놀로그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모놀로그(monologue)’라는 용어의 시간적 성질에는 엔드리스(Endless)한 구석이 있다.
‘엔드리스’는 ‘끝이 없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경우 시간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무한하다’는 의미에 가까워진다.
‘엔드리스’는 ‘구석이 없는’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공간적인 의미가 강조된다.
키슬러는 상자형의 건축을 감옥과 같은 것이라며 거부했다.
상자에는 꼭 가장자리라든가 모퉁이가 있다.
따라서 상자형 건물에는 천장, 벽, 바닥이 있다. 이같이 경계를 지니고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천장, 벽, 바닥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연속된 상황’ 속에서 의미를 잃는다는 데 주목했다.
이 같은 생각을 구체화한 ‘엔드리스’는 단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건축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엔드리스 하우스>를 통해 증명했다.


앞서의 인용에서 키슬러가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여성의 신체를 ‘엔드리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종종 비유적으로 또는 야유적으로 4각의 상자형 건축을 ‘수컷의 건축’이라고 부르고 <엔드리스 하우스>를 ‘암컷의 건축’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키슬러가 사용했던 용어를 나열해보면, 소묘에 의한 회화 시리즈와 목조에 의한 환경조각에 붙여졌던 ‘갤럭시(Galaxy)’, 주로 극장 및 무대설계에 사용했던 ‘공간(Space)’-<공간주택 Space House>은 거주공간을 위한 것임-, 그리고 ‘유니버설’은 ‘공간무대(Raumb웘ne)’의 또 다른 명칭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극장공간의 기능이 ‘만능적(Universal)’이라는 점-이른바 ‘토털 시어터(Total Theatre)’ 개념10)과 같이-에 주목해 명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 나열된 용어들은 키슬러가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실천한 테마의 주요개념이기도 하다.


은하계에는 많은 천체가 있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궤도와 운동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하나하나의 별들은 주위의 다른 별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생과 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을 묵묵히 걷고 있다.
그가 ‘갤럭시’라고 부른 일련의 작품은 그의 우주관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이 같은 은하계의 구성원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은하계도, 건축도, 조각도, 인간의 신체도, 양상의 차이는 있으나 결국은 같은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건축, 조각, 회화 등의 예술작품도 가능한 한 우주공간의 형성원리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건축의 주요 양식 중 하나인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이 아니라 ‘우주양식(Universal Style)’쯤 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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