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슬러에 관한 기사를 몇 개 더 발견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두 번째로 여기 온 것은 키슬러의 평전을 집필할 계획을 갖고 자료를 얻기 위해 방문한 1971년 10월이었다.
그때 키슬러에 관한 사진자료 300점 정도를 보고 그가 다양한 영역에 걸친 활동을 전개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언뜻 보기에는 무관해 보이는 각각의 작업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뉴욕에 와서 새로 발간된 책 중에서 키슬러에 관한 기사를 몇 개 더 발견했다.
『건축과 디자인­1890∼1939』3에는 1925년에 발표된 키슬러의 선언문이 실려 있었고8),『입체주의자의 영화』4에는 키슬러의 실험적인 무대설계가 돋보이는 카렐 차페크의 을 위한 무대디자인(1923)이 페르낭 레제의 영화 <발레 메카닉>(1924)에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도 키슬러의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 새로운 기록을 발견한 셈이다.
이 책들을 들고 키슬러 부인을 방문했다.


부인은 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젊어 보였다.
“아직 당신이 보지 못한 새로운 자료가 또 있다구요”라고 의기양양해 하면서, 최근에 발견한 일련의 가구사진과 <이빨의 집>이라는 주택의 에스키스를 펼쳐 보였다.
전자는 컬럼비아 대학의 건축과에서 학생을 지도하던 시절인 1930년대에 제작된 것이었다.
후자는 사람의 위턱과 아래턱, 그리고 이빨형태로부터 이미지를 발전시켜 종국에는 주택디자인으로 이미지가 변천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엔드리스 하우스>와 유사한 공간의 연출이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부인은 키슬러의 전람회가 이번에 고향인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개최된 후9) 가까운 시일 내에 서독의 베를린에서 계속될 예정이라며 기뻐했다.
부인이 의기양양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1926년 키슬러가 고향을 떠난 후 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귀향을 기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이미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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