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은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1930년대 한국화에 관한 담론으로 제기된 민족적 감성의 구현으로서의 향토미와 전통계승을 인상주의 양식을 변형시켜 완성한 사람이 박수근(1914~65)이다.
그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처음 선전 제11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한 1932년부터였으며 이 시기에 많은 일본 유학파가 귀국하여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유학파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양화 기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
그는 1936년에 <일하는 여인>, 1939년에 <여일>을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했지만 획기적이거나 창의적인 작품이 못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는 1940년에 선전에 <맷돌하는 여인>을 출품하고 1943년까지 매해 출품하여 입선했는데 모티프는 농가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열두 살 때 밀레의 <만종> 복사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는 밀레와 마찬가지로 농가에서 벌어지는 노동의 신성함을 주로 그렸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박수근은 원근과 입체감을 배제하고 직선을 사용하여 대상을 단순화하고 평면화했다.
피트 몬드리안이 추상 조형을 위해 자연의 모든 선을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집약했듯이 그도 주로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대상을 단순화하여 조형의 미만 받아들였다.
그의 화면에서는 모든 사물은 상징성을 지니며 동등한 위치를 점하는데 이런 특징은 1960년대 초반 이후의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미술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유행 양식과는 무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이런 무관성이 고유한 그의 양식으로 인정받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인물과 대상만을 회화적 구성 요소로 사용하면서 배경을 무시했으며 서양의 양식인 원근법을 따르지 않았으며 인물과 주변 환경물인 나무, 초가집 등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추상화했다.
대상과 대상의 주변을 모두 화강암의 표면처럼 마티에르의 질감으로 고르게 했다.
그는 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문지르는 프로타주 기법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프로타주 기법에 의한 고르고 거친 화면이 그가 추구한 공간을 배제시킨 평편한 회화세계가 되었다.
그는 캔버스에서의 프로타주의 효과를 물감을 엷게 타서 칠하고 겹겹이 덧칠하는 방법으로 성취했다.
균형적인 질감을 통일하기 위해 그는 수차례에 걸쳐 칠하고 또 칠했으며 젯소가 발라진 캔버스 위를 모노톤 물감으로 골고루 칠했다.
화면이 어느 정도 칠해졌을 때 붓으로 데생을 하고 그 위에 다시 붓과 나이프로 색을 칠하여 두터운 재질감의 화면이 되게 했다.
그의 그림에 X레이를 투시한 결과 물감 층이 8~10층이나 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그림은 일견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짧은 붓질에 의한 것과 유사해 보이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의한 영롱한 빛이 발하는 대기를 묘사한 데 반해 박수근은 화면 전체를 고르고 거칠게 해서 빛의 역할을 무시했으며 따라서 볼륨을 없앴고 외곽선으로 형태만을 취했다.
재질감이 주는 느낌을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극대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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