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현
김정현(1915~76)은 1915년 7월 2일(음력)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에서 한학자 김상용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성장기를 시골에서 보냈다.
마을에서 십리길 거리의 구림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제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6살 때 회화를 독학하기로 결심한 후 광주로 가서 7년 동안 서양화를 배우며 주로 수채화를 그렸다.
그는 28살 때인 1942년 제21회 선전에 <채석장>을 출품하여 동양화부에서 입선했고, 이듬해에는 <기영 機影>, 1944년의 마지막 선전 제23회에는 <맥청 麥晴>이 거듭 입선하여 화단에 진출했다.
이 시기에 그는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누구의 사사함을 받지 않는 가운데 저명한 화가의 작풍을 스스로 선택하여 독학하면서 미술잡지와 전문 서적의 독서를 통해 미술에 관한 지식을 키웠다.
그는 선전에 처음 입선 한 후 동경으로 가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가와타바 미술학교 일본화과에 등록하고 처음으로 정기 수학했다.
그가 그곳에서 수학한 기간은 1년이었다. 언제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44년 선전에 출품할 때에는 광주에 돌아와 있었다.
해방 후 1946년 그는 목포여자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1955년경 서울로 이주했다.
그는 광주의 고명한 산수화가 허백련을 찾아가 사사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답적인 형식과 관념적 표현의 종래적인 산수화 범주의 수묵화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950년대 이후 나타난 향토적인 수묵담채 실경의 먹붓 구사와 먹색의 전통적 표현 및 깊이는 허백련에게서 배운 사의의 전통적 남종화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전통 수묵화에 농채로써 치밀하고 세심하게 꽃이나 새 등을 선명하게 결합시키거나 조화시켰다.
절충적인 수묵채색화 수법의 활용은 독특한 그의 양식으로 진전되었다.
6·25동란을 고향에서 겪고 1955년 봄 서울로 올라와 첫 개인전을 갖고 정착했다.
그의 첫 개인전 출품 작품들은 <춘란>, <설촌>, <맥풍>, <녹우>, <흑산도 풍경>, <낙화암> 등으로 사생풍의 기법과 전통 산수화의 심의적 수법이 혼용 혹은 절충되고 채색표현이 수반된 선명한 채색화의 화조 그림들이었음이 당시의 한 평문에서 알 수 있다.
화가이면서 비평에서도 활동한 김영기는 “모티프와 구도가 참신하다”면서 “고정된 재래의 전통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작가”라고 적었다.
1955년 제5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맥풍 麥風>은 개인전에 소개한 것을 출품한 것인지 동일한 제목으로 다시 그려서 출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작시기가 1954년으로 되어 있다.
한창 익어가는 보리밭 풍경을 여문 보리이삭을 황금빛 극채색으로 그리고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소용돌이 회오리바람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바람을 과장하여 자신의 강한 욕구를 표현했다. 보통 보리밭에는 종다리가 깃을 치지만 여기서 회오리바람과 함께 원을 그리며 나는 두 마리 새는 제비로 보인다.
이 작품은 입선에 그쳤고 이듬해에 출품한 작품들도 입선에 머물자 그는 1960년까지 출품하지 않았다.
그는 1961년에 추천작가로 우대되어 다시 출품하면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왕성하게 활약했다.
1957년 연말에 화단의 뚜렷한 존재로 중견화가의 자리를 구축한 김기창, 이유태, 김영기, 허건, 박내현, 천경자 등이 한국화의 창조적인 새로운 방향 추구를 다짐한 백양회白陽會를 결성할 때 김정현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창작이 존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창립회원으로 매년 백양회전에 참여했다.
1961년 국전 당국이 새로운 운영제도로 종전의 초대작가·추천작가를 추천작가로 단일화하고 그 대상 작가의 폭을 넓히려고 했을 때 주위의 강력한 추천으로 김정현은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그해 국전의 동양화부 심사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국전에는 심사위원으로서 <조양 朝陽>을 출품했다.
이듬해 제11회 국전에도 심사위원으로서 출품했다. 1960년대 김정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임간 林間>으로 춘春·추秋 2부작이다.
이것들은 여태까지 볼 수 없던 농담변화를 통한 수묵표현의 추상화였다.
수묵으로 서양 양식의 표현으로 나타난 이 작품은 그의 독자적 창의성을 보여준 것으로 이경성은 ‘김정현론’에서 그의 창의적인 작품의 특징을 “구도가 서양화적이라는 점과 소재의 다양성, 그리고 색채의 부조화 속의 조화 등”으로 언급하면서 김정현이 서양화를 연구했음을 지적했다.
60세에 접어든 1974년 10월 서울 고옥당 화랑에서 여덟 번째 개인전을 열었을 때 신문기자의 방문을 받고 그는 자신의 의욕과 희망을 피력했다.
“나는 비교적 다작한 편이나, 작품다운 작품은 1년에 5~6점 제작하기가 힘들다.
앞으로 여유가 있다면 5~6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일생을 정리할 대작을 남겨 보고 싶다.”
그러나 그는 2년 후 지병이던 고혈압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