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토가 화가로 데뷔한 것은


이탈리아 시인과 예술가들을 경악시킨 조토의 회화방법은 여백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것과 사물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한 것 그리고 자연주의 색채를 구사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자연주의 색채는 빛의 밝기에 따라서 변하는 색을 나타낸 것을 말한다.
파두아Padua의 스크로베니 예배당Scrovegni Chapel에서 처음으로 자연주의 색채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오래 닫혀 있던 빛과 색의 관계를 부순 것이다.
그의 구성을 보면 그가 일상생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주의 깊게 관찰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인 사물들, 동물과 식물들, 그가 묘사하려고 한 인물의 의상에서 이런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평소에 돋보기를 끼고 사물을 확대해서 본 듯 했고 세상을 새로운 방법으로 읽어나가면서 자신의 관점들을 믿을 만한 풍경과 사실주의에 기초한 구성적인 공간 안에 담아냈다.


조토가 화가로 데뷔한 것은 아시시Assisi에 있는 상 프란체스코San Francesco의 바실리카 상단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에피소드들을 프레스코로 장식하면서부터였는데 1290년경이다.
중세 전통에 의하면 예술가가 데뷔하기 전에 스승의 작업장에서 한동안 훈련과정을 갖는다.
조토가 플로렌스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치마부에의 작업장에서 그의 회화방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280년대 초로 아마 15세 때쯤이었을 것이다.
조토의 초기 그림을 보면 치마부에의 회화적 언어가 구사되었음을 보는데 조토가 오랫동안 그로부터 수학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1290년대 플로렌스는 예술의 중심지였다.
조토는 산타 트리니타Santa Trinita 성당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성당의 장식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새로운 고딕 주제의 장식과 모자이크에 감동을 받아 그 이미지를 머리 속에 깊이 담아두었다가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지옥의 장면을 모자이크의 이미지를 따라서 모방하기도 했다.
그는 플로렌스 밖의 도시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투스카니아 사람들이 거주하던 피사Pisa와 시에나Siena에 관심이 있었으며 시에나의 고딕 두오모Duomo의 구조물과 내부 장식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두치오Duccio의 그림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니콜라Nicola와 조바니 피사노Giovanni Pisano 형제의 조각들에도 관심이 있었다.
니콜라는 1260년에 이미 피사에서 활발하게 작업했는데 그의 조각은 그리스인의 조각을 라틴의 조각으로 바꾸는 혁명적인 작업이었다.
피사노 형제의 조각을 통해서 조토는 명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조토는 십대 때 한동안 로마에 머물었는데 로마에 자주 간 치마부에를 따라 갔던 것 같으며 1285년과 1288년 사이에 머물었다.
조토는 치마부에의 조수로 그곳에서 작업한 것 같은데 그의 작업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 아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치마부에와 더불어 플로렌스의 회화를 대표했는데 그는 1282년에 로마에 안주했다.
1290년대 로마는 건축 붐이 고조에 도달했을 때였다.
1277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니콜라스 3세(Nicholas III(1277-80년 재위)는 로마를 기독교 국가의 수도로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재건하고 새로운 건축물을 짓도록 했다.
그는 라테란 궁내 대성당의 프레스코를 보수하도록 했고 신축한 예배당에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를 장식하도록 했다.
상파울로San Paolo의 바실리카에 있는 낡은 프레스코를 피에트로 카발리니Pietro Cavallini가 보수했고 같은 해 1285년 아놀포가 제단 위 닫집 모양의 차양Canopy에 그림을 그렸다.
니콜라스 3세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첫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니콜라스 4세(Nicholas IV(1288-92년 재위) 때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는 라테란을 보수하면서 1291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야코포 토리티Jacopo Torriti로 하여금 바실리카의 앱스에 모자이크를 장식하도록 했다.
니콜라스 4세는 교황에 즉위하던 해 산타 마리아 마기오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의 묵은 때를 벗기는 대청소 작업을 명하면서 토리티로 하여금 앱스에 프레스코를 그리게 했고(1296년에 완성) 필립포 루수티Filippo Rusuti로 하여금 정면에 모자이크를 장식하도록 했다.
아놀포 디 캄비오는 1290년에 제단을 장식했다.
스무 살도 채 안된 조토는 로마에서 현대화 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고전주의를 탐구하여 새로운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로마의 화가들로부터 조토는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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