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들라크루아는 어떤 의미에서 ‘세기병’을 앓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심한 우울증에 괴로워 했으며, 공허와 목표 상실의 감정을 가졌고, 생에 대한 권태와 싸웠다.
그는 우울증 환자였으며 늘 불만에 차 있었고 미완성의 사람이었다. 그가 삶의 태도로서의 낭만주의에는 반대했지만 회화 경향으로서의 낭만주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낭만주의의 광범위한 모티브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낭만주의의 대가라는 데 불쾌해 했다.
그는 제자를 교육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고 한 번도 일반인이 참관할 수 있게 아틀리에를 연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몇 사람의 조수를 썼을 뿐 제자로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영주 같은 취향이 그로 하여금 일체의 자기폭로주의나 현학주의를 싫어하게 했으며 대중을 경멸했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은 1820년과 1830년 사이 수많은 책을 읽은 데서 이루어졌다.
그는 스탕달을 만났고, 1826년부터 노디에의 문학 동아리에 나가 빅토르 위고와 친분을 맺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그의 문학적 취향이 형성되었고 그의 일기와 편지들에 문학적 내용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는 호라티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오비디우스·베르길리우스 등을 숭배했고 고전 외에도 근대와 당대 작가들 단테·셰익스피어·타소·몽테뉴·볼테르·디드로·괴테·월터 스콧·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었다.


1822년은 들라크루아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는데, 처음으로 살롱전에 출품한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96가 받아들여졌다.
왕립 살롱전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받아들인 후 점차 대담해지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최초의 걸작이었다.
그는 살롱전에 다음과 같은 긴 원제를 달았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플레기아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 도시 디스의 성벽을 둘러싼 호수를 건넌다.
죄인들은 배에 달라붙고, 또 그 위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쓴다.
단테는 그들 가운데 피렌체 사람이 몇 명 있음을 발견한다.”


낭만주의자들이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추종한 문학이 단테와 밀턴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크롬웰』 서문에 적었다.


현대 작가들 가운데 단테와 밀턴 둘만이 셰익스피어만큼 위대하다. …
그들은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우리의 문학이 극적인 색깔을 갖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품에는 기괴한 것과 숭고한 것이 뒤섞여 있다.


들라크루아의 1858년 9월 3일 일기는 위고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호메로스와 유사한 모든 이들을 숭배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숭배한다.
우리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프랑스 현대 작가들(내가 말하는 것은 라신이나 볼테르 같은 이들이다)은 위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종류의 숭고함, 그리고 천박한 세부들을 시적으로 만들어 상상력을 매혹하는 멋진 그림으로 만드는 그 놀라운 천진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포르뱅 백작은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뤽상부르 뮤지엄에 소장하기 위해 2천 프랑을 주고 구입했다.
들라크루아는 빚쟁이들에 쫓길 때 이 그림을 그렸는데, 속히 화가로 성공하는 길만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석 달도 채 안 걸려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표류하는 인류의 처절한 이미지를 구현한 이 그림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참조하여 그린 것이다.
저주받은 인간들 몸 위의 순수한 색의 물방울은 루벤스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제리코의 그림에는 색들이 명암에 압도되어 있지만 들라크루아의 것에는 색 자체가 표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루벤스는 풍부한 색채와 양감, 관능적 형상으로 인간의 육체를 찬미한 반면,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의 기법을 사용하여 고통 받는 지옥의 장면을 묘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는 이 작품을 가리켜서 “벌 받는 루벤스”라고 했는데, 작품의 성격을 짧은 말로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루벤스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고 그의 기법을 연구했지만, 그의 미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루벤스를 존경하면서도 전체적 구성과 세부적 균형에서 미숙하다고 보았으며 약간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54년 7월 29일자 일기에 풍경화가로서 루벤스의 선천적인 자질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인물의 특질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인물과의 관계 설정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