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제리코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낭만주의 화가들은 근대의 삶을 모티브로 다루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1819년 실재 사건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재현하는 가운데 고전주의 규범을 극렬히 부정했으며 당시 정부의 무능력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메두사 호의 뗏목>91으로 고전주의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시체의 색조, 표현적 사실주의, 격렬한 붓질, 헛된 영웅주의, 이런 것들을 통해 다비드식 규범과 영원한 고귀함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1816년 7월 망명귀족 출신인 위그 뒤루아 드 쇼마레가 지휘하던 왕실 해군 소속의 메두사 호가 서아프리카로 향하던 중 블랑 곶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침몰했다.
성급히 만든 뗏목에 몸을 실은 승객과 승무원 150명은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13일 동안 대서양을 표류하다가 열다섯 명만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코레아르와 사비니라는 두 명의 생존자가 난파 당시의 상황을 글로 발표했으며 제리코는 그들의 증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메두사 호의 뗏목>을 마치 실재를 보고 그린 듯 정교하게 묘사했다.
제리코는 생존자들과 인터뷰했으며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뗏목을 만들었고 시체보관소에 가서 시체들을 습작한 후 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본래의 생각은 불안과 공포로 거의 광란의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바다의 위협에 저항하는 모습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현재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두 장의 밑그림을 포함해서 여러 장의 밑그림을 보면 그가 어떻게 구성을 달리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구성에는 삼각구도 속에 왼쪽으로부터 파도가 크게 일어나 부푼 돛을 덮치려고 하면서 대립적인 힘이 나타나 있다.
그는 들라크루아를 시체의 모델로 하여 왼쪽 하단에 두 구의 시체를 그려 넣으면서 그 중 한 구가 서서히 바다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했다.
바람은 뗏목을 왼쪽으로 밀어붙이는 반면 난파당한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절망 속에서 구조선이 오기를 기다리며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1819년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고 소개되었는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군주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작품을 가차 없이 비난했지만 위대한 역사적 작품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정치적 현안이었던 이 배의 선장인 위그 뒤루아 드 쇼마레에 대한 재판은 군주제 전체에 대한 재판이 되어버렸다.
제리코는 동시대의 역사에서 착안한 극적인 사실을 가장하여 표류하는 인류의 이미지를 관람자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죽음은 영적인 모든 것이 배제된 채 냉혹한 현실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제리코가 1812년 <말을 탄 M.D. 씨의 초상>으로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2년 후에 <돌격명령을 하는 황제 근위대 장교>92라고 제목을 바꾼 이야기는 이 장르가 이미 낭만적 변모를 거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작품은 입상했지만 기마초상의 전통적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고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말이 관람자에게서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미완성의 작품이며 구성이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외형적인 형태의 완전성에는 관심이 없었고 극적인 색과 자유로운 제스처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제리코는 일찍이 석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8세기 말 독일에서 고안된 석판화 기법이 프랑스에 도입된 것은 1816년경부터였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1800년부터 석판화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국에 머물던 제리코는 1820년과 1825년 사이 이 기술을 익혀 낭만주의 미술의 잠재적 성공에 이용했다.93
제리코 외에도 낭만주의의 주요 예술가들이 이 기술을 익혀 삽화집을 내는 등 석판화를 널리 보급했다.
데생의 생생함과 명암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석판화는 예술적 표현의 한 방법으로 재빨리 자리 잡게 되었다.
들라크루아도 이 기술을 이용하여 <파우스트>와 <햄릿>을 포함한 여러 점의 삽화를 그렸다.
도미에와 같은 캐리커처 화가와 데생 화가들에 의해서 석판화의 품격은 한층 고양되었다.


멋쟁이 신사에 뛰어난 기수로서 극적 성격이 강한 제리코의 회화는 화려하고 정력적이며 다소 병적인 그의 개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카를 베르네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화가 괴랭의 문하에서 고전적 조형법과 구성법을 익혔다.
그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티치아노·루벤스·푸생, 그리고 고대 예술가들을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기교를 익혔으며 특히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816~1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바로크 작품에 매료되었다.
제리코는 1824년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서른세 살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미술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괴랭의 또 다른 제자 들라크루아는 제리코로부터 영향을 받고 거기에서 자기 예술의 중요한 출발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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