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사가 된 워홀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1965년 5월 워홀은 소나벤드 화랑에서 열릴 전시회를 위해 파리로 갔다.
소나벤드가 워홀의 일행을 위해 비행기 표를 사서 보냈다.
소나벤드 화랑은 2차 세계대전 기간 피카소가 살던 집 근처에 있었고 워홀은 피카소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피카소를 좋아하면서 “피카소의 모습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가 마티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고 피카소에 관해 말할 때도 그저 “좋다” 또는 “대단하다”라고만 말했는데 과연 그가 대가들의 미학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워홀은 자신이 회화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 미쳐 있었고,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 매료되어 “미국 영화가 최고다.
미국 영화는 분명하고 실제 같으며 영상이 놀랍도록 훌륭하다.
미국 영화는 말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다.
말을 적게 할수록 더 완벽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할리우드로 가서 제작자들을 만났지만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은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워홀이 파리에서 돌아오자 친구들이 공장에서 ‘가장 훌륭한 50인 Fifty Most Beautiful People’ 깜짝 파티를 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마다 워홀은 누가 들어오는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았는데, 유명가수 주디 갈란드,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차례로 들어왔다.
모두 워홀이 우상처럼 여기던 스타들인데 그들이 워홀의 파티에 참석한 걸 보면 워홀이 유명인사가 된 것이 분명했다.

이 시기에 워홀과 에디가 뉴욕의 가장 이상적인 연인으로 알려졌다.
워홀의 영화 <음탕한 계집>(1965), <레스토랑>(1965), <부엌>(1965) 등에 출연한 에디는 <부엌>에 관해 “아주 비논리적인 영화로 성격과 동기가 없는 완전히 웃기는 영화다”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쓴 타벨은 “내가 할 일은 무의미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으며, 의미 없는 말을 쓰는 것이었다.
...
앤디가 ‘줄거리를 없애라!’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성격 없는 배역들을 등장시켜야 했다”고 했다.
워홀과 에디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잦았고 함께 파티에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T셔츠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고 파티에 간 적도 있었다.
워홀은 말했다.
“사람들은 에디가 나를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바랬던 것이 아니라 에디가 바랬던 것으로 내게도 놀라운 일이다.”
잡지 <에스콰이어>가 워홀에게 인생의 동반자로 누굴 꼽겠느냐고 묻자 워홀은 “에디다. 그녀는 나보다 더 내게 잘 해준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1965년 9월 에디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워홀이 스타로 알려진 만큼 자신은 유명하지 못하다면서 투덜거렸고 워홀과 헤어져야겠다고 말했다.
에디의 친구들은 워홀과 헤어지면 배우로서의 인기가 하락할 것이라면서 워홀 옆에 바짝 붙어있으라고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워홀은 에디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는데, 에디는 자신이 워홀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워홀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에디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워홀의 다음 영화에 에디의 역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빴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주일에 5-6백 달러를 지불하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워홀은 아직 본전을 못 건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에디를 주인공으로 쓰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영화에 몰두하면서도 틈이 나면 워홀은 그림을 제작했다.
캠벨 수프통조림도 다시 수십 점 제작했는데, 그중 한 점은 캠벨사의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전기의자도 여러 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지만 밝은 색을 사용한 것 외에는 새로운 시도가 없었다.
1965년 10월 펜실베이니아 대학 현대미술관 관장 그린이 주최한 자신의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워홀은 친구들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갔다.
에디와 워홀은 주로 밤에 다투었고 낮에는 태연하게 연인처럼 행동했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중적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전시회 하루 전 날 많은 사람들이 워홀을 만나기 위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TV 카메라맨이 라이트를 들이댔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리는 바람에 그림에 부딪치기도 했다. 관장 그린은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림을 망치든지 도난이라도 당할 것 같아 관리인에게 벽에 걸린 작품들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워홀에게 몰려와 사인을 요구했고 워홀은 두어 시간 사인을 해주다가 뒷문으로 달아났다.
워홀은 나중에 술회했다. “별난 전시회였다.
미술관에 그림은 없고 사람들만 있었다. 1960년대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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