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꿈인가 비극인가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결론으로 말하면 우리의 인생을 상징한 욥의 인생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구원이 가능한 비극을 묘사한 것이지 도무지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욥에게 절망에서 헤어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있음을 드러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욥의 지혜와 용기를 배우기 바랐다.
또한 우리가 욥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뵙고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욥과 마찬가지로 우주를 섭리하는 하나님의 대 드라마에서 고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권한다.
비극에서 이런 교훈을 얻지 못하면 비극은 쓰레기 문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고래로 인생의 참 진실을 말한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거의 비극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3대 비극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은 인생이 비극이라는 점을 말하려고 한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비극도 마찬가지로 인생이 비극임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인생의 비극을 노래하였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을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6-8)
성서 중에서 인생의 비극을 가장 심각하게 표현한 것은 『욥기』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다.
인생이 비극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서 23:46)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인생을 비극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은 인생의 비극을 꿈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죽음을 깊은 잠에 빠지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셰익스피어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비극을 꿈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죽음을 잠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생을 한 무대 또는 방황하는 그림자로 생각하였다.
우리는 꿈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템피스트).
우리들의 작은 생을 마치는 것은 잠이다 (햄릿).
인생은 방황하는 그림자, 가엾은 배우, 출연하는 동안은 무대를 활보하지만 그 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보가 짓거리는 이야기 같이 (맥베드).
이 사람은 똑똑하기 때문에 바보 역을 할 수 있다.
어릿광대를 잘 연기하려면 그 나름대로 지혜가 필요하다.
똑똑한 바보가 어릿광대노릇을 하는 것은 볼 만해도, 점잖은 어른이 바보의 흉내를 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十二夜).
인생이 꿈이라면 깨어 있는 현실이 있을 테고 그림자라면 실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인생이 바보들만 모인 곳이라면 진실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생이 무대라면 연극을 연출하는 무대감독이 있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죽음은 잠에서 깨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그것이 죽음이었다.
나는 죽어서 잠을 깬 것이다.
그렇다 죽음은 잠을 깨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
동양에도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 있다.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장자는 말하였다.
나는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나는 지금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장자).
1.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비극
신화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민족이나 집단의식에서 전해지는 전설이다.
신화는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무의식의 논리이다.
신화는 빙산과 같아서 수면에 나타난 부분보다도 물속에 잠겨진 훨씬 더 큰 부분이다.
『푸로메데우스』와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들을 살펴봄으로써 욥의 비극과 비교하여 보자.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타이탄(Titan) 거신족(巨神族) 중 한 신으로 인간을 돌보지 않는 제우스와 늘 불화하였다.
제우스는 정의의 신이기 때문에 생태계의 파손을 막기 위하여 죽어 가는 인간에게도 불을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인류는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어둠 속에서 맹수에 쫓겨야 했고, 불이 없어 음식을 익혀 먹지 못했으므로 병으로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참한 광경들을 본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멸망을 염려해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하늘에 있는 제우스 궁전으로부터 불을 훔친 후 지상으로 내려 와 인류에게 불을 나누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법, 수를 세고, 글을 쓰는 법, 가축을 기르고 길들이는 법, 배를 만들어서 항해하는 법 등을 가르쳤으므로 인류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 문화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멸망에서 건져 낸 인류의 은인이었지만 제우스의 분노를 사서 삼만 년 동안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제우스는 그를 고카사스 산정 바위 위에 밧줄로 묶어 매달아 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독수리 보내 매일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간은 다시 자랐으며 낮이 되면 독수리가 와서 다시 간을 쪼아 먹곤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장래에 관한 운명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우스는 전령의 신 헤루메스를 시켜 그 비밀을 가르쳐 주면 용서하여 주겠다고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항복하지 않았다.
힘센 장사로 이름난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Heracles)가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활에 화살을 당겨 독수리를 쏘아 떨어뜨렸다.
그리고 밧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를 풀어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 화해하고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다.
이 비극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Aischylos) 작품 『얽혀 매달린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유감스럽게도 후편인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는 유실되어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제우스는 정의의 신이요 프로메테우스는 사랑의 신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신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주기를 금한 이유는 인류가 불로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면 하루를 노동하여 일 년 동안 먹을 수 있으므로 결국 인류는 나태해지고 말아서 타락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은 쉬지 않고 타 번져서 피조물인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다.
호메로스 작품 『일리아드』에 보면 제우스는 공의의 신이기 때문에 트로이 전쟁 때에도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만을 사랑했으므로 무서운 형벌을 받아가면서도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한계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 불을 주고 먹고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인생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르쳐 주지 못하였다.
예수의 말씀처럼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인간은 불과 기술을 사용하여 집을 짓고, 무기를 만들어 서로 싸우며, 동물을 죽이고, 생태계를 파괴하였다.
인간은 나태해지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제우스는 만물의 신이므로 자연과 동물이나 식물을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였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처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만을 편애하여 인류를 구원한 구세주처럼 보이지만 영혼을 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이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Oidipus)란 사람은 그리스의 테베(Thebai)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 왕자가 태어날 때 왕은 왕자의 장래에 관한 점을 쳤는데 그의 신탁은 다음과 같았다.
왕자는 장차 그의 친아비를 살해하고 친어미와 결혼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신하를 시켜 이 어린 왕자를 산중에 데려가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는 차마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창으로 발뒤꿈치를 찌른 후 버렸다.
그곳을 지나가던 목동이 아이의 미목(眉目)이 수려함을 보고 데리고 가서 자기 나라 고린도(Corinth) 왕에게 바쳤다.
아이는 그때부터 고린도 왕세자로 성장하였다.
성년이 된 후 이 왕자는 자신의 장래에 관한 점을 쳐보았다.
그때 나온 신탁도 역시 같은 신탁이었다.
이 무서운 신탁, 곧 자신의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운명을 피하려고 오이디푸스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고 만다.
오이디푸스가 고린도를 떠나 테베로 가는 도중 그는 일대의 기사들과 충돌하여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는 기사들을 모조리 사살했는데 사실 기사들은 그의 생부 테베의 왕과 호위병들이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 성으로 갔는데 성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있어서 길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수수께끼를 주어 풀지 못할 경우 잡아먹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는데 오이디푸스는 지혜가 탁월했으므로 수수께끼를 무난히 푼 후 스핑크스를 처치하여 시민들에게 평안을 회복시켜 주었다.
왕을 잃은 테베 사람들은 지혜롭고 용맹스런 테베의 은인 오이디푸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전 왕의 비는 오이디푸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왕비는 실은 그의 생모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생겼으며 정치는 국내외로 태평하였고 번성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괴이한 병이 유행하여 국민을 괴롭혔다.
오이디푸스 왕은 신전에 나가 신탁을 받아 보았다.
신탁에 의하면 전왕을 살해한 흉악무도한 자가 나라에 있으므로 그를 찾아 처벌하여 전왕의 영혼을 위로해야 재앙이 물러간다.
왕은 범인을 찾아내기 위하여 다시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 갔는데 흉악무도한 범인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
오이디푸스 자신은 모르고 한 일이었으며 자신은 가장 순결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청천병력이었다.
전에 왕자를 버린 늙은 신하를 찾아 증인으로 대질 심문을 하니 그 신하의 말이 발뒤꿈치에 흉터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과연 왕의 발뒤꿈치에는 흉터가 있었다.
자신은 모르고 한 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두 눈을 파서 영원히 보지 못하는 눈을 어둠 속에 던지고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영원히 자신의 나라를 떠나고 만다.
그는 알지 못하고 지은 무서운 죄를 속제하기 위하여 미래를 운명에 맡기고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떠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현명한 사람이었으며 선의의 정치를 편 훌륭한 왕이었다.
오이디푸스를 살해하지 않고 살려 준 신하, 어린 아이를 고린도 왕에게 바친 목동, 아이를 잘 양육해 준 고린도의 왕 그들 모두 선의에서 행동한 것으로 이 비극에는 악인이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선의로 행동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비극을 선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결국 인생은 이렇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 자신 속에 있는 억센 본능과 충동 앞에서 이성과 양식은 무력하게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성공이 없는 자멸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알고 짓는 죄도 있지만 알지 못하고 짓는 죄도 있다.
우리가 산다는 것 행동하는 것은 모두 모르고 짓는 죄라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원죄라고 한다.
2. 셰익스피어의 비극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하여 제기한 궁극적인 인간의 문제였다.
죽느냐, 사느냐, 정의냐, 사랑이냐 하는 문제로 햄릿의 비극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왕자 햄릿에게 선왕 부친의 망령이 꿈에 나타나 자신을 살해한 자는 현재의 왕 햄릿의 삼촌이라고 알려 준다.
햄릿은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원수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로다”라고 말하는 순간 병풍 뒤에서 이를 엿듣고 있던 자가 원수인 삼촌, 왕으로 알고 칼로 찔렀는데 그 사람은 왕이 아니라 친구 호레이쇼의 아버지이며 애인 오필리아의 아버지였다.
여기서 햄릿의 비극은 더욱 커진다.
왕은 자신과 왕비 앞에서 왕자 햄릿과 호레이쇼가 결투를 하게 만든다.
호레이쇼의 칼에는 독이 묻어 있었는데 결투하는 도중 호레이쇼는 칼을 떨어뜨렸으므로 햄릿은 칼을 바꾸어 잡았다.
잠간 휴식을 명령하고 왕은 두 사람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 마시도록 했다.
햄릿의 잔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왕비가 이를 알아차리고 아들의 잔을 대신 마시고 쓰러졌다.
햄릿은 독이 묻은 칼로 왕을 찔러 죽이고 독이 묻은 상처로 두 사람도 같이 죽게 된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악당들이다.
인간은 누구 한 사람도 믿어서는 안 된다. 지금 올 것이라면 후에는 오지 않고, 후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올 것이다.
만일 지금 오지 않더라도 불원간 반드시 올 것이다.
“각오가 전부이다” (햄릿, 오필리아에게).
아! 이 단단한 육체가 녹아서 흐르고 이슬로 화해 버렸으면 그렇지 않다면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자살을 금하는 계명을 만드시지 않으셨더라면!
오! 하나님 이 세상의 되어지는 일이 모두 무엇인가 근심으로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3막 1장).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다시 말해서 정의의 칼을 들어 악인을 제거하느냐,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참고 사느냐, 어느 편이 고귀한 삶일까?
무정한 운명의 화살을 가만히 참고 맞을 것인가, 아니면 끝장을 낼 것이냐 하며 고민한다.
햄릿에서는 복수가 미덕이라고 생각하여 복수만이 부친에 대한 경건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복수를 부정하는 악덕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속삭인다.
햄릿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정벌의 사자로 거룩한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부친의 죽음에 복수하여 하나님의 엄격한 정의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수행하겠다고 생각한 햄릿은 모세의 십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고민한다.
더욱이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해치울 것이냐? 용서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로 부상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오필리아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만하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을 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식이라는 놈이 나를 겁쟁이로 만든다.”
햄릿은 정의를 행하는 자도 처벌받는 상대자와 마찬가지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행동은 거칠게 하더라도 그 목적을 최후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햄릿은 임종하면서 “다음은 침묵!”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침묵은 결코 공허한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침묵이다.
“할 말이 없다.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자” 하는 침묵이다.
친구 호레이쇼는 죽으면서 “주여! 우리는 천사의 노래소리에 보호되어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
『욥기』와 『파우스트』를 구원이 있는 비극이라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햄릿, 오델로, 리어 왕, 맥베드는 안타깝게도 구원이 없는 비극으로 마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는 정의가 있지만 사랑이 부족하다.
정의를 위한 것이다.
정의 때문이다.
나의 혼이여!
그러나 그 죄가 무엇인지, 오! 밝은 별들이여!
그것만은 말하지 말아다오.
정의 때문이다. (오델로)
세계는 무대이다.
누구나 다 각기 맡은 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맡은 역은 슬픈 역을 맡았을 뿐이다. (베니스 상인)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 날 모 월간지에 셰익스피어를 4류 시인이라고 혹평하였다.
프랑스의 로만로랑이 이에 항의하여 세계적인 위대한 시인에 대해 모욕이 아닌가 하고 서신으로 질문하였다.
톨스토이는 답신에서 예술의 진실 된 조건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울의 말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도 예술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의 비극들은 구원이 없는 것들이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비극작품들은 구원이 없는 비극으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16-17 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산 시인이므로 그의 작품도 르네상스적이었다.
악이 멸망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신은 악을 사랑하시고 기르신다.
웬일인지 무법한 사악한 자들을 일부러 명부에서 끌어내서 선인과 정의로운 사람들을 차례 차례로 지상에서 어둠의 세계로 쫓아낸다.
신의 위업을 찬양하려 해도 신 자신이 사악일진대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좋겠는가?
신의 무엇을 찬양하란 말인가?
비열한 인간이 고결한 사람보다 잘 되고, 정직한 자가 손해를 보며, 정직하지 못한 자가 이기는 세상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비로구데테스)
보라! 우리들만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무대에서는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장면들보다 더욱 비참한 광경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 당신의 원대로)
3.『파우스트』는 『욥기』를 모방한 패러디
괴테는 독일이 낳은 기재(奇才)로 83해를 살았는데(1749-1832) 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파우스트』는 필생의 대작으로 꼽힌다.
『파우스트』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중세 독일에는 “파우스트 박사”라고 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적인 인물은 항상 인생문제를 고민하며 주술과 마술로 민중을 웃기기도 하고 놀래게도 했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독일 국민 신앙과 그리스의 자연주의 철학에서 방황하다 『욥기』를 모방하여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여 성취한 작품이다.
엑크만의 저서 『괴테와의 대화』에서 괴테는 『파우스트』의 구성이 『욥기』와 유사한 점이 많고 『욥기』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욥은 순진한 인간으로 고난을 통해 인생을 체험하고 믿음으로 써 구원에 이르렀고, 파우스트는 방황하는 인생을 살며 향락에 빠져 무서운 죄를 범하지만 올바른 길을 잊지 않고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구원에 이른다.
욥은 소극적이지만 파우스트는 적극적이요 모험적이다.
『파우스트』의 구성
『파우스트』는 헌사, 무대의 서곡, 천상의 서곡, 비극 제1부, 비극 제2부로 구성되었고, 많은 장면들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헌사에서 인생 문제를 고민하는 파우스트의 독백이 있으며, 무대의 서곡에는 무대감독과 시인 그리고 어릿광대의 논쟁이 벌어지고, 천상의 서곡에는 라파엘, 가브리엘, 미하엘 세 천사가 천지창조를 찬양하는 노래가 있다.
이어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가 출현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한다.
욥과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하나님의 선택된 종으로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나님의 하인으로 등장한다.
주님 : 파우스트를 아는가?
메피스토펠레스 : 그 박사 말씀인가요?
주님 : 그는 나의 종이니라.
메피스토펠레스 : 그는 이상한 놈이지요.
하늘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별을 취하려하고 지상에서는 가장 즐거운 향락을 누리려고 하지요.
주님 : 그는 지금 혼미 속에서 나를 섬기고 있지만 나는 머지않아 그를 맑고 밝은 곳으로 인도하리라.
정원사도 어린 나무들이 싹이 트면 꽃과 열매가 미래에 올 계절을 단장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법이다.
메피스토펠레스 :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그놈을 끌어내어 주님을 배반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 좋다.
그가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을 해도 좋다.
그러나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매느니라.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에 쫓길지라도 올바른 길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욥기』에서 사단은 천상회의에만 등장하고 제2장 이후에는 사라지고 말지만 『파우스트』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유혹한다.
비극 제1부 밤의 장면에서 파우스트는 “아! 나는 철학, 의학, 법학, 그리고 신학까지 열심히 공부했으나 나는 전보다 더 영리해진 것이 없다. 덕분에 선생님이니, 박사님이니 하고 학생들에게 10여 년 동안 올렸다, 내렸다 하며 끌려 다녔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뿐이다.”라고 하며 독백한다.
그는 이렇게 고민하다가 독배를 들고 자살하려고 한다.
그 순간 부활절의 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며 “예수께서는 살아 나셨다”라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와 교회 찬양대의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파우스트는 들었던 독배를 내던지고 거리로 나간다.
이때부터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빠져 들기 시작한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으로 순진한 처녀 그레트헨과 사귀게 된다.
그녀는 파우스트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시나요”라고 묻는다.
파우스트는 “하나님이란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고 인간은 감정만이 전부다”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당신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시는 군요”라고 말하며 섭섭해 한다.
그레트헨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 몰래 정을 통했는데 어머니에게 먹인 수면제가 지나쳐서 어머니는 죽고, 그녀의 오라비는 파우스트와 결투에서 파우스트의 칼에 맞아 죽는다.
그녀는 미쳐서 파우스트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를 강물에 던져 죽인 죄로 사형수가 되고 만다.
파우스트는 그녀를 감옥으로 찾아 가 탈옥을 권고했지만 그레트헨은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겠다고 말하며 거절한다.
비극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정치에 뛰어들기도 하며 마술적인 방법으로 수천 년 전 그리스 철학 세계를 방황하다가 스파르타의 왕비인 미녀 헤레나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는다.
그는 세상 모든 향락에 빠졌으나 항상 올바른 길을 가려고 노력한다.
파우스트가 죽은 후에 메페스토는 자기가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만 하늘로부터 천사들이 내려와서 파우스트의 영을 데리고 천국으로 올라간다.
사랑의 화신 그레트헨이 나와서 영접하는데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파우스트를 성모 마리아에게 소개하고 속죄를 빌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라고 고전주의자 괴테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애독하였는데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섭리하신다.
세계의 본질은 사랑이며 우주만물은 사랑으로 서로 조화를 이룬다.
『욥기』에도 사단은 하나님의 협조자로 욥을 시험하며, 『파우스트』에서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나님의 하인으로 등장하여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파우스트를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괴테는 시인 바이론(Byron)을 사랑했는데 그의 작품에 사랑이 결여된 것이 유감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제자 엑크만이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묻자 그는 “셰익스피어는 온 세계를 무대로 하여도 좁을 것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렇지만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유감이다.
은쟁반에 금사과가 놓여져야 하는데 은쟁반에 놓여진 것은 금사과가 아니라 감자뿐이라고 말하였다.
『파우스트』는 『욥기』의 패러디(parody)이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자신이 산 인생을 『욥기』를 모방하여 자신을 정당화시킨 작품이다.
그는 인본주의를 강조하여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죄 있는 세상에서 헤매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구원하신다는 기독교의 사랑의 승리를 강조하였다.
괴테를 가장 존경한 토마스 만은 괴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만의 작품 『魔의 山』은 괴테의 패러디였으며, 작중 인물 파우스트 박사는 니체의 패러디이다.
그 외에 토스토에프스키, 톨스토이, 니체, 앙드레 지드 등도 괴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칸트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절망의 길로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체험하나 이를 극복하고 순수한 경건성을 다시 얻게 되는 경험적 변신론자(辯神論者)라고 말하였다.
괴테도 파우스트를 통하여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변신론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