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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응답 계속 │ 39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3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4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5 누가 들 나귀를 놓아 자유케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6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7 들 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8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9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11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12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13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털이 빠진 날개를 펴고 어쩔 줄 모르며 좋아하는 타조를 보아라)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땅에 알을 낳아 놓고는 땅의 온기만 받도록 버려 두지 않느냐?)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밟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들짐승이 깨뜨리건 말건 걱정도 하지 않는다)

16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 찌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제 새끼가 아닌 듯이 쪼아 대고
낳느라고 고생한 일이 허사가 되는 것쯤 연두에도 없다)

17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 함이니라
(이렇게 타조에게서 지혜를 빼앗은 이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애당초 타조에게 슬기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18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그런데 그것이 한 번 날개 치며 내달으면
말과 기마병을 한꺼번에 놀려 주지 않느냐?)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 찌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안하고

25 나팔 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펄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데 거하며

29 거기서 움킬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육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좲 해설 좳

하나님께서는 산양과 사슴의 번식에 관한 불가사의를 말씀하시고 새끼들이 성장하면 어미 곁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나 자신이 모두 먹여 살리신단고 말씀하셨다(1-4절).
들나귀는 자유로운 동물로 상징되고 있다(5-8절).
들나귀(wild ass)는 가축된 나귀(ass)와는 대조가 되며, 이 구절을 직역하면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나귀란 뜻인데 이런 비유는 노예가 자유로워지는 것으로도 사용되었다(신명기 15:12-13).
하나님께서는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보살피시며 자유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들나귀와는 달리 들소는 가축의 노예생활을 한 적이 없는 동물로 대표되고 있다(9-12절).
들소는 사람에게 정복되지 않고 자유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동물로 묘사되었다.
들소(buffalo)는 신과 왕들의 사냥에서 이따금 잡힌 적이 있으며 고대 시리아에서는 잡히는 경우가 잦았다.


타조는 자연계를 연구한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난 알들을 몇 그룹들로 나누고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가슴에 품는다고 한다(14절).
타조(ostrich)는 따로 사는 둥지가 없기 때문에 알들을 모래에 덮어둔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타조는 자식에게 감정이 매마른 동물이라고 한다(16절).
그러나 근래 학자들은 이런 사고는 근거가 없다고 일축한다.
당시 사람들은 어리석은 타조를 가리켜서 저주받은 동물이라고 했다(17절).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각자에 알맞는 지혜를 주셨으며 동물들은 각각 지혜에 맞도록 생존하면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섭리 안에 있다고 믿었다.
비록 타조가 어리석고 날 수는 없지만 달릴 때는 말과도 같은 속력을 낸다(18절).


전투에 사용되는 말은 영기가 있는 것들로 전쟁터에서 보고 듣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모르며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만든다(19-25절).
유대인은 말보다는 나귀와 소를 농작에 사용하였다.
말은 또한 이방인들의 종교로 상징되어 저주를 받은 적이 있다(신명기 17:16, 여호수아 11:6).
말은 전쟁에서 전차를 끄는 동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전투에 참가한 말들은 힘센 까닭에 전투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말 자신 전쟁의 처절함을 즐기고 전쟁에 참여하려는 욕망도 있으므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매와 독수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늘 높이 나를 수 있는 동물로 상징되었다(26-30절).
잠언의 저자는 독수리가 하늘로 오르는 길은 자연계의 가장 신비한 것이라고 했다(잠언 30:19).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욥의 지혜를 새와 동물과 관련시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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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응답 계속 │ 40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 찌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4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 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6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 찌니라

8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9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 찌니라

11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너의 분노를 폭발시켜 보아라. 건방진 자가 보이거든 짓뭉개 주어라)

12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거드럭거리는 자가 보이거든 꺾어 버려라.
불의한 자는 짓밟아 버려라)

13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 찌니라
(한꺼번에 땅 속에 묻어 버려라. 딸굴 속에 묻어 버려라)

14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알아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 있으리라고)

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 찌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16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17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18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가릿대는 철장 같으니

19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은 자가 칼을 주었고

20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니라

21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밭 가운데서 못 속에 엎드리니

22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둘렀구나

23 하수가 창일한다 할 찌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 찌라도 자약하니

24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좲 해설 좳

본문의 절에 대한 순서가 혼란되어 있다.
6-7절은 38장 1-3절과 같다. 4-5절은 2절에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야, 대답하여라”라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욥의 응답이다.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말이 더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한번 말씀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두 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욥은 완전히 하나님께 굴복하고 말았다.


‘베헤못’이 개역성경에는 하마(behemoth)로 기록되었는데 25절의 레비아단과 마찬가지로 전설 속 지중해나 나일 강에 서식하던 상상의 원시동물이다(15절).
개역성경에는 레비아단을 악어(crocodile)로 해석되어 있다.
악어는 낚시로 잡을 수 있으나 레비아단은 낚시로 잡을 수 없는 혼돈의 괴물이다.


25절 이하는 문장이 혼란스럽다.
욥은 하나님의 도전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분과 협상하기를 바라서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였다(4-5절).
하나님의 우주의 태초와 신비스러운 섭리에 관한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하나님께서 시위하시는 신비스러운 우주의 운행을 통해서 자신이 무력해짐을 고백하였다(아모스 7:2).


38장 3절을 반복하며 욥의 도전을 새롭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논란의 적으로 삼으셨다(7절).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자신의 말에서 나타나도록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불의하다는 욥의 공소 사실을 아예 무시하셨다(8절).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의 문제에 관해 직접적인 응답을 하셨는데 욥이 주장하는 순전함이 거짓이라고 반박하신 것이 아니라 욥이 자신의 순전함을 내세워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나무라셨다.


전장에서 욥은 자신은 순전하다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불의해야 한다는 가정론을 편 적이 있다.
이런 욥의 도전에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신의 순전함을 믿어 그가 그 이상의 것도 주장했다고 나무라신 것인데 이는 욥이 자신의 인간적인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불의한 존재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신의 온전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필요한 일인가 하고 문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신의 순전함을 성취하려고 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권능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이룩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9절).
‘하나님의 팔’이란 말은 당시 하나님의 능력과 공정한 법칙을 상징한 것이었다(출애굽기 15:16, 시편 89:13, 98:1).
하나님께서는 욥이 신과 같은 행동을 취하려고 한다면 자기의 처사를 불의하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권한으로 불의한 자들을 징벌함으로써 나타내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10-13절).
만일 욥이 불의한 자들을 진압하여 온전한 정의를 구축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욥을 신에 가까운 영웅으로 인정하여 상대할 값어치가 있는 적으로 인정하여 주겠다고 말씀하셨다(14절).


전장에서 욥이 중재자가 나타나서 불의한 방법에 의한 고난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희망했는데(9:33, 10:7, 16:21), 위와 같은 권능을 욥이 나타낼 수 있다면 그는 중재자 없이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15절부터 24절까지 원시동물에 관해 쓰여져 있는데 유대어로 Behemoth를 직역하면 원생이지만 새 영어성경(New English Bible)은 악어라고 표기하였다(15절).
일부 신학자들은 하마라고 주장한다.
이 구절에서 원생에 관하여 전설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왜 이 원생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지 독자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이것은 욥에게 인간의 존재가 거의 무의미하다는 점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려고 이 같은 둔한 악어 또는 하마를 하나님께서 예로 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그가 집요하게 추궁한 문제들을 웃으면서 모두 내버리게 하시려는 것 같다.
이 장에서 언급된 원생은 그 모양이 하마나 악어를 연상하게 한다(16-18절).
힘센 꼬리는 파괴력을 가진 우수한 무기로 표현되고 있으며 거대한 몸집은 모든 외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이 원생은 우주가 혼돈하던 당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만들어 낸 솜씨 있는 작품이다(19절).


20절은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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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응답 계속 │ 41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2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3그것이 어찌 네게 연속 간구하겠느냐
유순한 말로 네게 이야기하겠느냐

4 어찌 너와 계약하고 영영히 네 종이 되겠느냐

5 네가 어찌 새를 놀리는 것 같이 그것을 놀리겠으며
네 소녀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6 어찌 어부의 떼가 그것으로 상품을 삼아 상고들 가운데 나눌 수 있겠느냐

7 네가 능히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로 그 머리를 찌를 수 있겠느냐

8 손을 그에게 좀 대어 보라 싸울 일이 생각나서 다시는 아니하리라


라틴어 성경에는 40장 25절부터 32절이 41장 1-8절에 해당하고 개역성경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공동번역 성경에는 25-32절이 40장에 해당하고 41장은 개역성경 9절부터 1절로 시작된다.
괄호 안의 구절 25-32절은 공동번역 성경의 구절이고 1-8절은 같은 내용의 개역성경의 구절이다.


1 (25) 너는 낚시로 레비아단을 낚을 수 있느냐?
그 혀를 끈으로 맬 수 있느냐?

2 (26) 코에 줄을 꿰고
턱을 갈고리로 꿸 수 있느냐?

3 (27) 그가 너에게 빌고 빌며
애처로운 소리로 애원할 성싶으냐?

4 (28) 너와 계약을 맺고
종신토록 너의 종이 될 듯싶으냐?

5 (29) 너는 그를 새처럼 노리개로 삼아 가지고 놀 수 있느냐?
끈을 매어 계집아이들 손에 잡혀 줄 수 있느냐?

6 (30) 어부들이 값을 매기고
상인들이 골라 살 수 있느냐?

7 (31) 너는 그 살가죽에 창을,
머리에 작살을 꽂을 수 있느냐?

8 (32) 손바닥으로 만져만 보아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리라.


개역성경은 9절부터 34절까지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진다.


9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

10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12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

13 누가 그 가죽을 벗기겠으며
그 아가미 사이로 들어가겠는고

14 누가 그 얼굴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 두루 있는 이가 두렵구나

15 견고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라
서로 연함이 봉한것 같구나

16 이것, 저것이 한데 붙었으니
바람도 그 사이로 들어가지 못하겠고

17 서로 연하여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18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광채가 발하고
그 눈은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으며

19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며

20 그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솥이 끓는 것과 갈대의 타는것 같구나

21 그 숨이 능히 숯불을 피우니
불꽃이 그 입에서 나오며

22 힘이 그 목에 뭉키었고 두려움이 그 앞에서 뛰는구나

23 그 살의 조각들이 서로 연하고 그 몸에 견고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24 그 마음이 돌 같이 단단하니 그 단단함이 맷돌 아래짝 같구나

25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도 두려워하며 경겁하여 창황하며

26 칼로 칠 찌라도 쓸데없고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구나

27 그것이 철을 초개 같이,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니

28 살이라도 그것으로 도망하게 못하겠고
물매 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여기우는구나

29 몽둥이도 검불 같이 보고 창을 던짐을 우습게 여기며

30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와륵 같으니
진흙 위에 타작 기계 같이 자취를 내는구나

31 깊은 물로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로 젖는 향기름 같게 하고

32 자기 뒤에 광채 나는 길을 내니
사람의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 같구나

33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34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개역성경 9절이 1절이 되고 26절로 마친다.
괄호 안의 구절은 개역성경의 구절이다.


1 (9) 그 앞에서는 아무도 이길 가망이 없어
보기만 해도 뒤로 넘어진다.

2 (10) 건드리기만 하여도 사나와져
아무도 맞설 수가 없다.

3 (11) 누가 그와 맞서서 무사하겠느냐?
하늘 아래 그럴 사람이 없다.

4 (12) 그 무지무지한 다리 이야기를 어찌 빼놓으랴!
그 당당한 억센 체구를 어찌 말하지 않겠느냐?

5 (13) 그 겉옷 앞자락을 누가 헤칠 수 있으며
겹으로 입은 그 갑옷을 누가 젖힐 수 있는냐?

6 (14) 누가 그 턱을 벌릴 수 있느냐?
줄지어 선 저 무서운 이빨,

7 (15) 방패 사이사이로 고랑진 등가죽에
단단한 돌인장으로 봉인한 것 같은 저 등,

8 (16) 바람도 틈탈 수 없도록
서로서로 맞닿아 있고

9 (17) 서로서로 얽혀 있으니
떨어질 리도 없다.

10 (18) 재채기 소리에 불이 번쩍하고
그 눈초리는 새벽 여신의 눈망울 같구나.

11 (19) 아가리에서 내뿜는 횃불,
퉁겨나오는 불꽃을 보아라.

12 (20) 연기를 펑펑 쏟는 저 콧구멍은
차라리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구나.

13 (21) 목구멍에서 이글이글 타는 숯불,
입에서 내뿜는 저 불길을 보아라.

14 (22) 목덜미엔 힘이 도사려 있어
그 앞에서 절망의 그림자가 흐느적일 뿐,

15 (23) 뗄 수 없이 마구 얽혀
피둥피둥한 저 살덩어리를 보아라.

16 (24) 바위같이 단단한 심장,
맷돌 아래짝처럼 튼튼한 염통,

17 (25) 한번 일어서면 신들도 무서워
혼비백산하여 거꾸러진다.

18 (26) 칼로 찔러 보아도 박히지 않고
창이나 표창, 화살 따위로도 어림없다.

19 (27) 쇠를 지푸라기인 양 부러뜨리고
청동을 썩은 나무인 양 비벼 버린다.

20 (28) 아무리 활을 쏘아도 달아날 생각도 하지 않고
팔맷돌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구나.

21 (29) 몽둥이는 검불처럼 여기며
절렁절렁 소리내며 날아드는 표창 따위에는 코웃음친다.

22 (30) 뱃가죽은 날카로운 질그릇 조각과 같아
타작기가 할퀸 땅바닥처럼 지나간 흔적을 남기며

23 (31) 깊은 물웅덩이를 솥처럼 끓게 하고
바닷물을 기름가마처럼 부글거리게 하는구나.

24 (32) 번쩍 길을 내며 지나가는 저 모습,
흰 머리를 휘날리며 물귀신 같이 지나간다.

25 (33) 지상의 그 누가 그와 겨루랴.
생겨날 때부터 도무지 두려움을 모르는구나.

26 (34) 모든 권력가가 그 앞에서 쩔쩔매니,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


좲 해설 좳

41장 전체가 (공동번역 성경으로는 40장 25-32절과 41장 1-26절) 괴물 레비아단의 이야기인데 욥을 혼돈시키는 장이다.
말하자면 미천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레비아단에 대해서 불가항력이라는 것이다.
레비아단을 새 영어성경(NEB)은 고래(whale)로 명명하고 있으며 1절부터 6절까지를 39장 뒤에 편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의 신비스러운 삶을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을 강조하셨다.
레비아단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잡을 수도 없고 길들일 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레비아단을 정복해서 다스릴 수 있으시다는 것이다.


38장-41장에서 욥이 깨달은 바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2,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마치 개미 한 마리와 온 우주가 비교될 수 없는 것과 같다.

3,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은 인간이 헤아릴 수가 없다.
온 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먹이를 끌고 가는 개미에 비교할 수 없다.

4, 인간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비교될 수 없다.

5, 창조주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신다.


새 영어성경은 1-6절을 39장 후반에 편집했으며 7-34절이 먼저 소개된다.
레비아단에 관한 신화가 전개된다.
가나안 신화에는 레비아단이 일곱 개 머리가 달린 뱀으로 나타난다.
이 원생을 바알과 아나트(Anat)가 사살하였다.
레비아단에 관해서는 이사야 27:1에 언급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머리가 많은 이 원생을 사살하셨다(시편 74:12-13). 레비아단은 혼돈시대를 상징하는 원생들 중 하나이다(창세기 1:2).


10-11절, 어느 누구도 레비아단을 잡으려다 생존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이 구절은 모호하다.
레비아단이 내뿜는 불길 앞에 절망의 그림자가 흐느적일 뿐이란 표현은 절망의 고뇌와 비교할 만하다(13-17절, 9:34, 13:21).


18-21절에서 그림자처럼 묘사되는 것은 실제적 서술이라기보다는 신화에 사용되는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레비아단은 신비한 실재 이상의 괴물로서 욥이 체험한 모든 고뇌와 절망은 레비아단과 같아서 하나님만이 진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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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마당

결론: 욥의 회개와 하나님의 축복 │ 42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 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 함이니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좲 해설 좳

1-6절의 욥의 응답으로 욥기는 사실상 결론이 났다.
이후 구절들은 훗날 누군가에 의해 삽입되었음이 분명하다.
이후의 구절들은 오히려 이 책의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다.
인과응보 신학으로 마쳐졌기 때문이다.
삽입한 사람은 욥의 비참함을 물질로 보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욥은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는데 하나님의 실재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은 최상선(最上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 점을 강조하였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하나님께서는 전장에서 고대의 놀라운 사건들을 욥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스스로 영광되셨으며, 욥의 질문에 대부분 대답하지 않으시고 욥 스스로 자신에게서 창조주의 모습을 보도록 하셨다(1절).
욥은 하나님을 보자 자신이 무지하기 짝이 없는 피조물로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인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실재적 절대자이심을 알게 되었다.
욥은 자신이 무와도 같다고 인식하였는데 이는 그가 무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과정에 있음을 깨달은 말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가 무한하시다는 점을 깨달았다(2절).
그는 거듭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다(3절).


4절은 2절 시작에 삽입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못 편집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욥은 하나님 뵙기를 갈망한 적이 있었는데(19:26) 궁극적으로 뵙는 체험을 했다(5절).
뉘우친다는 그의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욥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태도를 바꾼 것이다(6절).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과 실재로 가능한 절대자로서의 존재에 대해 자신이 무에 가까운 피조물로서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변화라 할 것이다.


별도로 추간된 7-17절에는 욥이 첫 장에 소개된 대로 온전하고 신실한 신앙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마지막 매듭을 둘로 나눠서 고찰할 수 있는데 첫째, 10-17절로 욥이 다시 행복을 되찾는 점이며 둘째, 7-9절로 욥과 친구들의 관계가 시적으로 매듭지어지는 점이다.
이런 매듭은 2장 11-13절에 나타난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온 친구들의 방문에 대한 매듭이다.


욥의 순전함은 하나님에 의해서 공공연하게 증거되었으며 세 친구들은 반대로 위선자들로 규정을 받고 말았다.
욥이 중재자가 되어 친구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들 가운데 대변자와도 같은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는데 이런 직접적인 대화는 당시 신화에 흔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욥과 달리 그들이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셨다.
욥은 솔직하게 말했지만 친구들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만한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비난은 성난 욥의 간청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전통주의 신학의 가르침보다 욥의 혁신적 신학이 더욱 옳았음을 의미한다.


8-9절, 과거에 욥이 대제사장처럼 대신해서 기도와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 것과(1:4-5)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의 종으로서 욥은 세 친구들을 위한 번제의 역할을 맡았다.
이는 이사야가 53장에서 말한 고난 받는 종과도 같은 역할이다.
당시 사람들은 동물을 잡아 불에 태워서 연기로 하나님께 바쳤다.


욥에게 물질적 축복이 내려진 것은 욥이 받은 고뇌와 고통에 대한 배상이다.
11절은 아마 본래 전설에서 친구들 대신 동생과 누이 그리고 친지들이 위로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끝맺는데 불필요한 구절로 여겨진다.
욥이 다시 받은 물질적 축복은 첫 재산의 두 배이다(1:2-3).


140세까지 살았다는 욥의 장수는 위대한 부권의 가장들과 같다(창세기 25:8).
욥의 재산이 두 배로 는 것과 마찬가지로 욥의 수명도 평균수명 70살의 두 배로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균수명이란 일반인들의 평균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말한다.
새 영어성경의 10절 참조에는 욥의 아들들도 두 배로 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에 나타난 셉투아진트(Septuagint) 전설에는 욥이 에돔 왕국을 건설한 창시자로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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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꿈인가 비극인가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결론으로 말하면 우리의 인생을 상징한 욥의 인생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구원이 가능한 비극을 묘사한 것이지 도무지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욥에게 절망에서 헤어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있음을 드러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욥의 지혜와 용기를 배우기 바랐다.
또한 우리가 욥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뵙고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욥과 마찬가지로 우주를 섭리하는 하나님의 대 드라마에서 고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권한다.
비극에서 이런 교훈을 얻지 못하면 비극은 쓰레기 문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고래로 인생의 참 진실을 말한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거의 비극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3대 비극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은 인생이 비극이라는 점을 말하려고 한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비극도 마찬가지로 인생이 비극임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인생의 비극을 노래하였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을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6-8)

성서 중에서 인생의 비극을 가장 심각하게 표현한 것은 『욥기』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다.
인생이 비극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서 23:46)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인생을 비극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은 인생의 비극을 꿈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죽음을 깊은 잠에 빠지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셰익스피어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비극을 꿈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죽음을 잠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생을 한 무대 또는 방황하는 그림자로 생각하였다.

우리는 꿈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템피스트).
우리들의 작은 생을 마치는 것은 잠이다 (햄릿).

인생은 방황하는 그림자, 가엾은 배우, 출연하는 동안은 무대를 활보하지만 그 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보가 짓거리는 이야기 같이 (맥베드).

이 사람은 똑똑하기 때문에 바보 역을 할 수 있다.
어릿광대를 잘 연기하려면 그 나름대로 지혜가 필요하다.
똑똑한 바보가 어릿광대노릇을 하는 것은 볼 만해도, 점잖은 어른이 바보의 흉내를 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十二夜).

인생이 꿈이라면 깨어 있는 현실이 있을 테고 그림자라면 실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인생이 바보들만 모인 곳이라면 진실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생이 무대라면 연극을 연출하는 무대감독이 있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죽음은 잠에서 깨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그것이 죽음이었다.
나는 죽어서 잠을 깬 것이다.
그렇다 죽음은 잠을 깨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

동양에도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 있다.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장자는 말하였다.

나는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나는 지금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장자).

1.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비극
신화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민족이나 집단의식에서 전해지는 전설이다.
신화는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무의식의 논리이다.
신화는 빙산과 같아서 수면에 나타난 부분보다도 물속에 잠겨진 훨씬 더 큰 부분이다.
『푸로메데우스』와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들을 살펴봄으로써 욥의 비극과 비교하여 보자.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타이탄(Titan) 거신족(巨神族) 중 한 신으로 인간을 돌보지 않는 제우스와 늘 불화하였다.
제우스는 정의의 신이기 때문에 생태계의 파손을 막기 위하여 죽어 가는 인간에게도 불을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인류는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어둠 속에서 맹수에 쫓겨야 했고, 불이 없어 음식을 익혀 먹지 못했으므로 병으로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참한 광경들을 본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멸망을 염려해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하늘에 있는 제우스 궁전으로부터 불을 훔친 후 지상으로 내려 와 인류에게 불을 나누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법, 수를 세고, 글을 쓰는 법, 가축을 기르고 길들이는 법, 배를 만들어서 항해하는 법 등을 가르쳤으므로 인류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 문화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멸망에서 건져 낸 인류의 은인이었지만 제우스의 분노를 사서 삼만 년 동안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제우스는 그를 고카사스 산정 바위 위에 밧줄로 묶어 매달아 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독수리 보내 매일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간은 다시 자랐으며 낮이 되면 독수리가 와서 다시 간을 쪼아 먹곤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장래에 관한 운명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우스는 전령의 신 헤루메스를 시켜 그 비밀을 가르쳐 주면 용서하여 주겠다고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항복하지 않았다.
힘센 장사로 이름난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Heracles)가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활에 화살을 당겨 독수리를 쏘아 떨어뜨렸다.
그리고 밧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를 풀어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 화해하고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다.
이 비극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Aischylos) 작품 『얽혀 매달린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유감스럽게도 후편인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는 유실되어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제우스는 정의의 신이요 프로메테우스는 사랑의 신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신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주기를 금한 이유는 인류가 불로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면 하루를 노동하여 일 년 동안 먹을 수 있으므로 결국 인류는 나태해지고 말아서 타락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은 쉬지 않고 타 번져서 피조물인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다.

호메로스 작품 『일리아드』에 보면 제우스는 공의의 신이기 때문에 트로이 전쟁 때에도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만을 사랑했으므로 무서운 형벌을 받아가면서도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한계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 불을 주고 먹고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인생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르쳐 주지 못하였다.
예수의 말씀처럼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인간은 불과 기술을 사용하여 집을 짓고, 무기를 만들어 서로 싸우며, 동물을 죽이고, 생태계를 파괴하였다.
인간은 나태해지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제우스는 만물의 신이므로 자연과 동물이나 식물을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였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처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만을 편애하여 인류를 구원한 구세주처럼 보이지만 영혼을 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이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Oidipus)란 사람은 그리스의 테베(Thebai)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 왕자가 태어날 때 왕은 왕자의 장래에 관한 점을 쳤는데 그의 신탁은 다음과 같았다.
왕자는 장차 그의 친아비를 살해하고 친어미와 결혼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신하를 시켜 이 어린 왕자를 산중에 데려가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는 차마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창으로 발뒤꿈치를 찌른 후 버렸다.
그곳을 지나가던 목동이 아이의 미목(眉目)이 수려함을 보고 데리고 가서 자기 나라 고린도(Corinth) 왕에게 바쳤다.

아이는 그때부터 고린도 왕세자로 성장하였다.
성년이 된 후 이 왕자는 자신의 장래에 관한 점을 쳐보았다.
그때 나온 신탁도 역시 같은 신탁이었다.
이 무서운 신탁, 곧 자신의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운명을 피하려고 오이디푸스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고 만다.

오이디푸스가 고린도를 떠나 테베로 가는 도중 그는 일대의 기사들과 충돌하여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는 기사들을 모조리 사살했는데 사실 기사들은 그의 생부 테베의 왕과 호위병들이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 성으로 갔는데 성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있어서 길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수수께끼를 주어 풀지 못할 경우 잡아먹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는데 오이디푸스는 지혜가 탁월했으므로 수수께끼를 무난히 푼 후 스핑크스를 처치하여 시민들에게 평안을 회복시켜 주었다.

왕을 잃은 테베 사람들은 지혜롭고 용맹스런 테베의 은인 오이디푸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전 왕의 비는 오이디푸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왕비는 실은 그의 생모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생겼으며 정치는 국내외로 태평하였고 번성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괴이한 병이 유행하여 국민을 괴롭혔다.
오이디푸스 왕은 신전에 나가 신탁을 받아 보았다.
신탁에 의하면 전왕을 살해한 흉악무도한 자가 나라에 있으므로 그를 찾아 처벌하여 전왕의 영혼을 위로해야 재앙이 물러간다.
왕은 범인을 찾아내기 위하여 다시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 갔는데 흉악무도한 범인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
오이디푸스 자신은 모르고 한 일이었으며 자신은 가장 순결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청천병력이었다.

전에 왕자를 버린 늙은 신하를 찾아 증인으로 대질 심문을 하니 그 신하의 말이 발뒤꿈치에 흉터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과연 왕의 발뒤꿈치에는 흉터가 있었다.
자신은 모르고 한 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두 눈을 파서 영원히 보지 못하는 눈을 어둠 속에 던지고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영원히 자신의 나라를 떠나고 만다.
그는 알지 못하고 지은 무서운 죄를 속제하기 위하여 미래를 운명에 맡기고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떠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현명한 사람이었으며 선의의 정치를 편 훌륭한 왕이었다.
오이디푸스를 살해하지 않고 살려 준 신하, 어린 아이를 고린도 왕에게 바친 목동, 아이를 잘 양육해 준 고린도의 왕 그들 모두 선의에서 행동한 것으로 이 비극에는 악인이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선의로 행동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비극을 선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결국 인생은 이렇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 자신 속에 있는 억센 본능과 충동 앞에서 이성과 양식은 무력하게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성공이 없는 자멸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알고 짓는 죄도 있지만 알지 못하고 짓는 죄도 있다.
우리가 산다는 것 행동하는 것은 모두 모르고 짓는 죄라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원죄라고 한다.

2. 셰익스피어의 비극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하여 제기한 궁극적인 인간의 문제였다.
죽느냐, 사느냐, 정의냐, 사랑이냐 하는 문제로 햄릿의 비극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왕자 햄릿에게 선왕 부친의 망령이 꿈에 나타나 자신을 살해한 자는 현재의 왕 햄릿의 삼촌이라고 알려 준다.
햄릿은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원수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로다”라고 말하는 순간 병풍 뒤에서 이를 엿듣고 있던 자가 원수인 삼촌, 왕으로 알고 칼로 찔렀는데 그 사람은 왕이 아니라 친구 호레이쇼의 아버지이며 애인 오필리아의 아버지였다.
여기서 햄릿의 비극은 더욱 커진다.

왕은 자신과 왕비 앞에서 왕자 햄릿과 호레이쇼가 결투를 하게 만든다.
호레이쇼의 칼에는 독이 묻어 있었는데 결투하는 도중 호레이쇼는 칼을 떨어뜨렸으므로 햄릿은 칼을 바꾸어 잡았다.
잠간 휴식을 명령하고 왕은 두 사람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 마시도록 했다.
햄릿의 잔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왕비가 이를 알아차리고 아들의 잔을 대신 마시고 쓰러졌다.
햄릿은 독이 묻은 칼로 왕을 찔러 죽이고 독이 묻은 상처로 두 사람도 같이 죽게 된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악당들이다.
인간은 누구 한 사람도 믿어서는 안 된다. 지금 올 것이라면 후에는 오지 않고, 후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올 것이다.
만일 지금 오지 않더라도 불원간 반드시 올 것이다.
“각오가 전부이다” (햄릿, 오필리아에게).

아! 이 단단한 육체가 녹아서 흐르고 이슬로 화해 버렸으면 그렇지 않다면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자살을 금하는 계명을 만드시지 않으셨더라면!
오! 하나님 이 세상의 되어지는 일이 모두 무엇인가 근심으로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3막 1장).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다시 말해서 정의의 칼을 들어 악인을 제거하느냐,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참고 사느냐, 어느 편이 고귀한 삶일까?
무정한 운명의 화살을 가만히 참고 맞을 것인가, 아니면 끝장을 낼 것이냐 하며 고민한다.

햄릿에서는 복수가 미덕이라고 생각하여 복수만이 부친에 대한 경건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복수를 부정하는 악덕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속삭인다.
햄릿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정벌의 사자로 거룩한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부친의 죽음에 복수하여 하나님의 엄격한 정의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수행하겠다고 생각한 햄릿은 모세의 십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고민한다.
더욱이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해치울 것이냐? 용서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로 부상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오필리아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만하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을 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식이라는 놈이 나를 겁쟁이로 만든다.”

햄릿은 정의를 행하는 자도 처벌받는 상대자와 마찬가지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행동은 거칠게 하더라도 그 목적을 최후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햄릿은 임종하면서 “다음은 침묵!”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침묵은 결코 공허한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침묵이다.
“할 말이 없다.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자” 하는 침묵이다.
친구 호레이쇼는 죽으면서 “주여! 우리는 천사의 노래소리에 보호되어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
『욥기』와 『파우스트』를 구원이 있는 비극이라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햄릿, 오델로, 리어 왕, 맥베드는 안타깝게도 구원이 없는 비극으로 마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는 정의가 있지만 사랑이 부족하다.

정의를 위한 것이다.
정의 때문이다.
나의 혼이여!
그러나 그 죄가 무엇인지, 오! 밝은 별들이여!
그것만은 말하지 말아다오.
정의 때문이다. (오델로)

세계는 무대이다.
누구나 다 각기 맡은 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맡은 역은 슬픈 역을 맡았을 뿐이다. (베니스 상인)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 날 모 월간지에 셰익스피어를 4류 시인이라고 혹평하였다.
프랑스의 로만로랑이 이에 항의하여 세계적인 위대한 시인에 대해 모욕이 아닌가 하고 서신으로 질문하였다.
톨스토이는 답신에서 예술의 진실 된 조건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울의 말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도 예술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의 비극들은 구원이 없는 것들이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비극작품들은 구원이 없는 비극으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16-17 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산 시인이므로 그의 작품도 르네상스적이었다.

악이 멸망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신은 악을 사랑하시고 기르신다.
웬일인지 무법한 사악한 자들을 일부러 명부에서 끌어내서 선인과 정의로운 사람들을 차례 차례로 지상에서 어둠의 세계로 쫓아낸다.
신의 위업을 찬양하려 해도 신 자신이 사악일진대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좋겠는가?
신의 무엇을 찬양하란 말인가?
비열한 인간이 고결한 사람보다 잘 되고, 정직한 자가 손해를 보며, 정직하지 못한 자가 이기는 세상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비로구데테스)

보라! 우리들만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무대에서는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장면들보다 더욱 비참한 광경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 당신의 원대로)

3.『파우스트』는 『욥기』를 모방한 패러디
괴테는 독일이 낳은 기재(奇才)로 83해를 살았는데(1749-1832) 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파우스트』는 필생의 대작으로 꼽힌다.
『파우스트』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중세 독일에는 “파우스트 박사”라고 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적인 인물은 항상 인생문제를 고민하며 주술과 마술로 민중을 웃기기도 하고 놀래게도 했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독일 국민 신앙과 그리스의 자연주의 철학에서 방황하다 『욥기』를 모방하여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여 성취한 작품이다.

엑크만의 저서 『괴테와의 대화』에서 괴테는 『파우스트』의 구성이 『욥기』와 유사한 점이 많고 『욥기』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욥은 순진한 인간으로 고난을 통해 인생을 체험하고 믿음으로 써 구원에 이르렀고, 파우스트는 방황하는 인생을 살며 향락에 빠져 무서운 죄를 범하지만 올바른 길을 잊지 않고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구원에 이른다.
욥은 소극적이지만 파우스트는 적극적이요 모험적이다.

『파우스트』의 구성
『파우스트』는 헌사, 무대의 서곡, 천상의 서곡, 비극 제1부, 비극 제2부로 구성되었고, 많은 장면들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헌사에서 인생 문제를 고민하는 파우스트의 독백이 있으며, 무대의 서곡에는 무대감독과 시인 그리고 어릿광대의 논쟁이 벌어지고, 천상의 서곡에는 라파엘, 가브리엘, 미하엘 세 천사가 천지창조를 찬양하는 노래가 있다.
이어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가 출현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한다.
욥과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하나님의 선택된 종으로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나님의 하인으로 등장한다.

주님 : 파우스트를 아는가?
메피스토펠레스 : 그 박사 말씀인가요?
주님 : 그는 나의 종이니라.
메피스토펠레스 : 그는 이상한 놈이지요.
하늘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별을 취하려하고 지상에서는 가장 즐거운 향락을 누리려고 하지요.
주님 : 그는 지금 혼미 속에서 나를 섬기고 있지만 나는 머지않아 그를 맑고 밝은 곳으로 인도하리라.
정원사도 어린 나무들이 싹이 트면 꽃과 열매가 미래에 올 계절을 단장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법이다.
메피스토펠레스 :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그놈을 끌어내어 주님을 배반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 좋다.
그가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을 해도 좋다.
그러나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매느니라.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에 쫓길지라도 올바른 길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욥기』에서 사단은 천상회의에만 등장하고 제2장 이후에는 사라지고 말지만 『파우스트』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유혹한다.
비극 제1부 밤의 장면에서 파우스트는 “아! 나는 철학, 의학, 법학, 그리고 신학까지 열심히 공부했으나 나는 전보다 더 영리해진 것이 없다. 덕분에 선생님이니, 박사님이니 하고 학생들에게 10여 년 동안 올렸다, 내렸다 하며 끌려 다녔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뿐이다.”라고 하며 독백한다.
그는 이렇게 고민하다가 독배를 들고 자살하려고 한다.
그 순간 부활절의 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며 “예수께서는 살아 나셨다”라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와 교회 찬양대의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파우스트는 들었던 독배를 내던지고 거리로 나간다.
이때부터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빠져 들기 시작한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으로 순진한 처녀 그레트헨과 사귀게 된다.
그녀는 파우스트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시나요”라고 묻는다.
파우스트는 “하나님이란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고 인간은 감정만이 전부다”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당신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시는 군요”라고 말하며 섭섭해 한다.
그레트헨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 몰래 정을 통했는데 어머니에게 먹인 수면제가 지나쳐서 어머니는 죽고, 그녀의 오라비는 파우스트와 결투에서 파우스트의 칼에 맞아 죽는다.
그녀는 미쳐서 파우스트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를 강물에 던져 죽인 죄로 사형수가 되고 만다.
파우스트는 그녀를 감옥으로 찾아 가 탈옥을 권고했지만 그레트헨은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겠다고 말하며 거절한다.

비극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정치에 뛰어들기도 하며 마술적인 방법으로 수천 년 전 그리스 철학 세계를 방황하다가 스파르타의 왕비인 미녀 헤레나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는다.
그는 세상 모든 향락에 빠졌으나 항상 올바른 길을 가려고 노력한다.
파우스트가 죽은 후에 메페스토는 자기가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만 하늘로부터 천사들이 내려와서 파우스트의 영을 데리고 천국으로 올라간다.
사랑의 화신 그레트헨이 나와서 영접하는데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파우스트를 성모 마리아에게 소개하고 속죄를 빌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라고 고전주의자 괴테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애독하였는데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섭리하신다.
세계의 본질은 사랑이며 우주만물은 사랑으로 서로 조화를 이룬다.
『욥기』에도 사단은 하나님의 협조자로 욥을 시험하며, 『파우스트』에서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나님의 하인으로 등장하여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파우스트를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괴테는 시인 바이론(Byron)을 사랑했는데 그의 작품에 사랑이 결여된 것이 유감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제자 엑크만이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묻자 그는 “셰익스피어는 온 세계를 무대로 하여도 좁을 것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렇지만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유감이다.
은쟁반에 금사과가 놓여져야 하는데 은쟁반에 놓여진 것은 금사과가 아니라 감자뿐이라고 말하였다.

『파우스트』는 『욥기』의 패러디(parody)이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자신이 산 인생을 『욥기』를 모방하여 자신을 정당화시킨 작품이다.
그는 인본주의를 강조하여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죄 있는 세상에서 헤매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구원하신다는 기독교의 사랑의 승리를 강조하였다.

괴테를 가장 존경한 토마스 만은 괴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만의 작품 『魔의 山』은 괴테의 패러디였으며, 작중 인물 파우스트 박사는 니체의 패러디이다.
그 외에 토스토에프스키, 톨스토이, 니체, 앙드레 지드 등도 괴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칸트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절망의 길로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체험하나 이를 극복하고 순수한 경건성을 다시 얻게 되는 경험적 변신론자(辯神論者)라고 말하였다.
괴테도 파우스트를 통하여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변신론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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