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이 망치와 낫을 그린 것은
1971년 들어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갑자기 밀월관계처럼 진전되고 있었다.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으로 원정 게임을 하러 가고 이듬해에는 외교수완이 아주 탁월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 이후 철의 장막이 걷히고 자본주의의 상징 코카콜라가 중국에 상륙해 중국 사람들도 이제 코카콜라를 마시기 시작했다.
워홀은 1972년 닉슨의 초상화(그림 164)를 제작했다.
대통령선거 시기에 닉슨의 얼굴 밑에 다른 대통령후보 ‘맥가번을 찍으시오’라는 문구를 적은 초상화를 만들어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이 시기에 워홀도 중국에 관심을 가졌다. 워홀은 “중국에 관한 글을 아주 많이 읽었다”고 하면서 모택동의 초상화(그림 166)를 실크스크린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가 선전용으로 사용하는 모택동의 사진을 드로잉하여 과거에 제작한 초상화들과 달리 좀 더 회화적으로 제작했다.
워홀은 모택동의 초상화로 벽지도 만들어 실크스크린과 함께 파리 갈리에라 미술관(Mus럆 Galliera)에서 소개했다(1974. 2. 23~3. 18).
모택동의 초상화를 제작한 후 워홀은 정치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1976년에는 〈정물〉(그림 168)이라는 제목으로 망치와 낫을 제작했다.
그해는 미국 독립 2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공산주의는 미국이 적대하는 이념이었다.
워홀이 망치와 낫을 그린 것은 소련의 상징 망치와 낫이 벽의 낙서처럼 보였으며, 그것들 역시 팝 이미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산업노동자와 농민들의 단합을 꾀하기 위해서 그러한 상징을 국기에 사용했지만 워홀에게는 그들의 국기가 팝의 성상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국기의 2차원적 망치와 낫을 입체감이 나도록 묘사하여 3차원이 되게 했다.
모택동의 초상화와 ‘망치와 낫’은 1977년 1월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되었다.
그 무렵 〈해골〉(그림 169)을 제작하기도 했다.
공장에 자주 왔으며 워홀과 함께 파리에도 갔던 커트론에 의하면 워홀이 파리의 고물상에서 해골을 구입했다고 한다.
해골을 뉴욕으로 가지고 온 워홀은 커트론에게 해골을 카메라로 찍으라고 해 커트론은 흑백사진으로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워홀이 왜 해골에 색을 칠했는지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인터뷰에서 해골을 파시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재스퍼 존스의 그림에도 해골이 등장했는데 존스가 워홀의 그림에서 이미지를 구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워홀은 저격당했을 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해골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워홀은 레스토랑에서 친구 트루만 카포테와 함께 식사하면서 죽음에 관해 대화했다.
카포테가 죽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하자 워홀은 “아냐,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도 없지”라고 말했다.
워홀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상화도 세 점 제작했다.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에 초대받았을 때 그는 카터의 초상화를 선물했다(그림 167).
그의 실크스크린 초상화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므로 초상화 의뢰를 받는 일이 잦았으며, 1만 달러를 받고 정당의 전당대회를 위한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77년부터 직업 운동선수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 워홀은 먼저 열 명을 선정했는데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그림 172), 농구선수 카림 아보덜, 축구선수 펠레, 승마선수 윌리 슈메이커, 테니스 선수 크리스 에버트, 피겨스케이트 선수 도로시 해밀, 야구투수 탐 시버, 하키 선수 로드 길버트, 미식축구선수 심슨, 골프 선수 잭 니클라우스였다.
워홀은 글러브나 공 등 운동기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운동선수들 중 절반은 오른쪽 얼굴 모습을 찍었고, 힘 있는 표현주의 방법으로 색칠한 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나중에 워홀은 풍경화를 그리듯이 사람의 몸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듬해에는 각 선수들을 여섯 가지 다른 모습으로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