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것은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프랑스의 최고 화가라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26살에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국내 치안사령관이라는 막중한 권력을 가졌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10년만에 그는 실질적으로 프랑스 군대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만난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비드와 정식으로 교신한 것은 1797년 봄과 여름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면서 다비드에게 자신과 함께 동행하여 전투장면을 그려줄 것을 청했지만 다비드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것은 1797년 12월 10일 파리에서였다.
전승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을 정부가 공식 축하하는 축하연에서였다.
나폴레옹은 다비드를 꼭 만나기를 원했으므로 집정부 간사에게 다비드와 함게 식사하도록 자리 배정을 지시했다.
다비드 역시 나폴레옹을 만나기를 원했던 터라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했다.
식사 도중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 초상을 그리겠다고 했고 나폴레옹은 쾌히 승낙했다.
이 날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사람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그를 가리켜 "프랑스 최고의 화가"라고 극찬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 30살에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제1통령에 올랐고 35살에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막강했고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비드는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또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황제와 황후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그린 것은 다비드가 프랑스 최고의 화가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21살 연상인 다비드를 다루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많은 장군들이 부를 축적했듯이 다비드도 부를 탐닉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앞서 다비드에게 그날의 장면을 네 개의 캔버스에 그릴 것을 공식으로 청했으나 다비드가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고 다비드는 두 점만을 그렸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정치가로서 존경했지만 그를 통해 그림값을 터무니없이 올려 받으려고 했다.
나폴레옹도 다비드를 존경했지만 그림값을 지나치게 청구할 때는 다른 화가들에게 의뢰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프랑스 화가가 그린 가장 큰 작품들 중 하나였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고나식에는 200여 명이 공원되었는데 다비드가 묘사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와 동일했다.
과연 다비드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1812년에 그린 <서재에서의 나폴레옹>은 혈기왕성하고 매끈하고 날렵한 몸매의 운동선수와도 같은 영웅이 아니라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모습의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작품을 보고 매우 만족해 하며 다비드에게 말했다.
"선생이 날 제대로 묘사했군요. 친애하는 다비드 선생, 난 밤에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낮에는 국민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그 밖에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청을 받고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앞서 혁명기간 중에 그린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다비드의 작품은 순수 미학적 동기에서 그린 것들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게 그려진 것들이다.
그래서 사실이 많이 왜곡되었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단순하고 명료함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칭찬을 받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는 것들이었다.
화가가 정치가와 유착되었을 때,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그 화가의 작품이 미학적으로는 파산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다비드의 일생을 통해 볼 수 있다.
결국 정치가와의 유착고리가 끊어졌을 때, 즉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 나폴레옹의 사람 다비드도 그와 더불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고 다비드는 스스로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 뼈를 붇었다.
미술과 정치의 관계는 이 책의 주요 내용들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