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에 대한 다비드의 열정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에서는 프리메이슨Freemasons(중세 석공의 숙련공 조합원)과 건축가가 속속 배출되었다.
다비드의 아버지 루이 모리스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브레이드, 리본, 레이스, 주름장식 등을 제조하는 사업을 했다.
어머니 마리 제네비에브 부롱은 벽돌공이며 건축업자의 딸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사업이 번창하자 당시 새롭게 부상한 철 도매업에도 투자했다.
그는 돈을 주고 말단 공무원직을 샀는데 18세기 프랑스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루이 모리스는 이런 품위를 갖추는 생활에 매우 만족해 했다.
그는 1757년 12월 2일 칼바도스를 여행하던 중 피스톨 결투로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왜 결투를 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9살에 아버지를 여윈 다비드는 외삼촌 프랑수아 부롱과 이모부 자크-프랑수아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는데 보호자 두 사람 모두 목수, 건축가, 건설업자였다.
부롱가는 18세기 후반 파리의 급격한 건설붐을 타고 많은 돈을 벌었다.
다비드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보내졌고 마지막 학년을 쾨트르-나시옹 대학에서 마쳤다.
학문적으로 명문인 이 대학은 라틴어를 완전하게 구사하도록 가르쳤고 그리스사와 로마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다비드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므로 고대사와 영웅들에 관해 충분히 배워 알고 있었지만 학자로서의 자질은 없었다.
훗날 그는 모교를 두 번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1796년 죄인의 몸으로 갇힐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다음은 10년이 지난 후 영예로운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방문했는데 그 시기 이 대학은 프랑스 아카데미의 온상이었다.
어머니는 다비드가 군인이 되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고 보호자인 외삼촌과 이모부는 건축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보통의 부르주아 출신 젊은이답지 않게 그는 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비드는 훗날 자신에 관해 적었는데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한 것이 흥미롭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드로잉에 열심이었다. ...
회화에 대한 열정은 가족들의 반대에 비례해서 더욱 더 커졌는데 가족들은 화가가 되는 걸 반대했지만 그는 드로잉을 마스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